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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110)화 (110/138)

내 대답에 황제는 황궁이 떠나가라 폭소했다.

“하하하!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그대에게는 겸양의 미덕 같은 건 없나?”

“사실을 말하는 데 왜 겸양이 필요하지요?”

“하하하! 나를 웃겨 죽일 셈인가 보군!”

진심이었는데, 너무나 재미난 농담 취급을 해 주시니,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재미난 일이 얼마나 없었으면.’

이 좁은 집무실에서 만날 서류만 보고 있으니 얼마나 심심했을까. 전보다 둥글어진 턱을 보고 있으니 왠지 짠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앞에서 버티고 있으면 황제의 업무만 밀릴 뿐이니, 나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짓고 떠나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번에 황제와 마무리 지어야 하는 안건 중 한 가지를 꺼내 들었다.

“루크 공작가가 피해 보상금을 나누어 내겠다고 맹세하기에 앞서, 폐하께서도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뭐지?”

황제는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상황 폐하의 재산을 보상금에 보태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 폐하의 재산이라니? 그 소리는, 그대 앞으로 돈을 보내 달라는 말인가?”

황제가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이라면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리가 있을까. 나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모르시는 것이 필시 있으실 겁니다.”

“흐음?”

내 대답에 황제의 이맛살이 더더욱 깊이 팼다. 나는 굳이 그를 기다리게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제 친애하는 새어머니께서 루크 공작가의 지하에 묻어 두신 보물들이 있거든요.”

“……바네린느가 숨겨 둔 보물이 또 있다고?”

“베로니카 부인이 횡령한 것이 황실 유지비만이 아니었다는 뜻이지요.”

“…….”

내 말에 황제는 이번에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루크 공작가 지하, 그러니까 아무도 들어가지 않던 와인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보물을 찾게 된 건 순전히 운이었다.

‘이건 칼리마에게 감사할 일이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 어차피 술을 마실 수 없으니 관심도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나를 꼬드긴 게 바로 칼리마였다.

“명주라는 건 그냥 보고 있기만 해도 즐거워지잖아요. 어떤 귀한 술이 있나 둘러보기라도 합시다.”

그 말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촐랑촐랑 와인 창고에 갔는데, 글쎄 와인이 숙성되고 있어야 할 오크 통 안에 온갖 보물들이 들어 있는 것 아닌가.

세공부터 보석의 크기까지 모두 범상치 않은 것들이었다.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황가의 물건이라는 걸.

‘공작가에 술을 즐기는 사람이 없다는 걸 이용한 거겠지.’

이따금 바네린느가 찾는다며 세이지 부인이 와인을 가지러 내려가는 걸 누가 의심스럽게 여겼으랴.

이만한 규모라면 황실에서 먼저 파악하고 조사하러 나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지금까지 조용하다는 건.

‘어쩐지 씀씀이가 지나치게 크다 했더니 상황제의 재산까지 빼돌려 숨겨 놨을 줄 누가 알았겠어.’

세이지 부인이 마지막에 바네린느 황녀의 호출을 받고, 뭔가 사주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녀를 공작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만약 들어오게 내버려 뒀으면 이 보물들을 다 집어 갔을 거 아니야.’

가정이지만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정보를 이렇게 이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걸.’

나는 가만히 두 손을 잡고 황제의 명만 기다렸다. 황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미간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황실의 물건을 저잣거리에 돌아다니게 할 수 있나. 황실에서 값을 치를 테니 그에 관해서는 내 보좌관과 이야기를 나누게.”

“감읍할 따름입니다.”

황실 소유의 보물에는 작게라도 황실의 문장을 새기기 마련. 그런 것이 시장에 풀리면 황실 입장에서도 창피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물론, 잠깐의 수치심과 바네린느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자신에게 이익인가 저울질은 했겠지.’

잠시 말없이 멈춰 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계산을 마쳤으리라.

그리고 그 머뭇거림을 통해, 나는 새삼 깨달았다.

‘정말 바네린느를 싫어하나 보다.’

당연히 황실의 체면이 우선이어야 할 텐데, 잠깐이라도 고민했다는 건 그만큼 바네린느를 싫어한다는 뜻이었다. 바네린느가 적당히 1, 2년 만에 수도에 복귀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완전히 지워 버려도 무방할 것 같았다.

내가 빙긋 웃으면서도 황제의 속내를 읽으려고 기민하게 그를 살폈던 것처럼 그 또한 나를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굳이 내 앞에서 베로니카 부인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건, 그녀를 처벌할 증거 또한 있다는 뜻이겠지?”

옳거니. 이 또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횡령에 관한 증거는 없지만, 다른 범죄에 관한 증인은 있습니다.”

“다른 범죄?”

“루크 부인이자 루크 소공작의 암살을 꾀한 죄랄까요?”

“암살!”

내 말을 들은 황제는 입술을 씰룩이며 분노를 표했다.

“그 아이가 사주한 거겠지. 질리지도 않는군. 수도에서 쫓겨나서도 그리 나쁜 짓을 꾸미다니.”

바네린느의 수작질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바네린느를 감싸 줄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 또한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증인은 알아서 인계하도록.”

“감사합니다, 폐하.”

사실은 증인은 훨씬 더 빠르게 수도에 도착한 참이었지만. 얻어야 할 것을 모두 얻어 낸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이제 인사를 건네고 물러나려는데, 이번에는 황제가 나를 붙들었다.

“나도 ‘루크 소공작’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황제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나는 긴장해서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도대체 뭘 부탁하려고 나를 소공작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건, 그만큼 기대와 책임도 막중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긴장한 채로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황제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올곧고 정의로운 사람 같군. 앞으로 적극적으로 내무부 일을 맡아 볼 생각은 없나? 지금 내 곁에는 사심 없이 국정에 대해 간언할 사람이 필요하거든.”

파격적인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제가요? 하지만 저는 정무에 관해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황실 서기관 출신이 교육받지 않았다니, 겸손이 지나치군.”

“그건 벌써 몇 해 전 일인걸요.”

“그렇다고 해도 계속 이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을 테지.”

“…….”

그건 맞았다. 가십지의 간판 기자로 일하면서도, 나는 계속 정치 쪽 기사를 쓰고 싶어서 늘 열심히 기웃대고 있었으니까.

황제는 턱을 괴던 손을 떼고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나를 향해 반짝거리는 눈에는 미래를 향한 의지와 열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대가 말한 대로 선대가 구태를 답습한 탓에, 현재 내무부에는 틀린 것을 지적하고 고치려는 사람이 없어. 그냥 예전에 하던 대로 하려는 습성들이 있지. 짐은 그걸 고치고 싶네.”

예전에 하던 대로. 나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파벌을 없애고 싶으시다는 뜻이군요.”

“눈치가 빠른 점도 마음에 들어.”

부패한 정치인이 늘 하는 일이 뭐겠나. 바로 뇌물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업을 몰아주고 이득을 독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히 돌아가면서 이득을 취하기 위해 파벌이 생기는 것이다.

황제가 내게 맡기고 싶은 역할은 바로 그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인 것이다.

‘위험한 일이야.’

대체로 그런 파벌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침해하려는 이를 가만두지 않는다. 아마 나를 몰락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지.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뛰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저는 폐하께서 명만 내려 주신다면 어떤 일이든 맡겠습니다. 한 가지만 보장된다면 말입니다.”

“무엇을? 그대의 안전? 작위? 재산?”

황제의 말에 나는 손바닥으로 내 배를 감싸며 대답했다.

“출산 휴가요. 제가 곧 엄마가 될 예정이거든요.”

내 대답에 황제는 또다시 집무실이 떠내려가라 폭소했다. 이번에는 너무나 심하게 웃어서 보좌관들이 집무실 문을 열어 볼 정도였다.

* * *

황제 폐하와의 교섭은 성공적이었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다음 목적지까지 내 발로 걷는 것을 택했다.

깡충깡충 걸으며 나는 뺨을 발그레 붉혔다.

“예상보다 큰 수확이네요. 기사도 내보낼 수 있고, 베로니카 부인도 벌을 받고, 저는 일자리까지 얻었으니 말이에요.”

내 말에, 줄곧 내 옆을 지켜 준 세루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칭찬했다.

“정말 술술 풀려서, 제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과찬이네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준비해 간 것들이 폐하의 마음에 들었던 거죠.”

“아닙니다. 저라면 에델처럼 쉽게 대화를 이끌어 가지 못했을 겁니다.”

“헤헤.”

세루리안의 칭찬까지 들으니, 다시 심장이 콩콩 뛰었다. 저절로 빨라지는 걸음에, 세루리안이 내 허리를 붙들었다.

“너무 빨리 걸으면 넘어집니다.”

“그 정도로 빠르지 않았어요.”

“빨랐습니다. 제가 붙들지 않으면 달려갈 기세였는걸요.”

“에잉.”

이렇게 신나는데 좀 달리면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내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홑몸이라면 달리다가 넘어지든 뒤로 세바퀴를 구르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지금 나는 생명을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뒤에야, 나는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로 세루리안에게 말했다.

“이제 다 안정을 취했어요. 이제 놔 주세요, 세루리안.”

그런데 놔 주라니까, 이 남자가 또다시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냥 안고 가면 안 됩니까?”

“그건 당연히 안 되죠! 여긴 황궁이라고요. 보는 눈이 많은 황궁.”

“그게 뭐 어떻습니까.”

세루리안은 새침한 어조로 덧붙였다.

“제 부인은 수도 최고의 미녀이니 다들 그러려니 할 겁니다.”

“우와아악!”

잊고 있었던 소문이 언급되자,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수도 최고의 미녀라니!

“……설마 아직도 진행 중인가요, 그 소문?”

이제는 좀 시들해질 때도 된 거 아닌가. 그런 기대를 품고 물었더니만, 환장할 대답이 돌아왔다.

“점점 더 부풀려지는 중입니다. 제가 당신 핑계를 대고 무단결근까지 하고 있어서요.”

결국 다 당신 때문이라는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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