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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108)화 (108/138)

“……어른이 되었구나.”

루크 공작은 눈을 찡그렸다. 쓴웃음을 지으려고 했지만, 그런 웃음조차도 익숙하지 않아 그저 찌푸린 표정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더 살피기도 전에, 그의 얼굴에서는 다시 감정의 자취가 사라져 버렸다. 그는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기사를 실어 주는 신문사가 없을 텐데, 그건 어떻게 할 셈이냐?”

“그 부분은 세루리안이 생각해 둔 바가 있어요.”

안 그래도 나도 그 부분이 가장 고민이었는데 세루리안이 명답을 주었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내 얼굴을, 루크 공작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눈에 담았다.

“영민하구나. 난 사랑하는 여자와 내 아이를 포기하고 외롭게 로어를 사냥하며 지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

아니, 나를 통해서 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이제야 네 덕분에 진정한 의미의 사죄를 하게 될 것 같구나.”

힘없이 눈을 감은 얼굴은, 전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 * *

수도로 돌아올 때는 집에서 마음 편안히 뒹굴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작은 마님, 여기 서명해 주셔야 합니다.”

“이것도요.”

“의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련님은 어디 계시지요?!”

바로 우리의 가족 관계 정리 때문이었다.

‘친자 입적과 양자 파양. 말로는 참 쉽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놈의 서류가 이렇게 많아?!

다 귀찮으니 때려치우자고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 과정을 해치울 수밖에 없었다.

‘세루리안이 알려 준 방법을 사용하려면 내가 루크 공작의 적자가 되어야 하니까.’

그리고 그 와중에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강아지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세루리안이었다.

사각사각 서류를 작성하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세루리안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왜 여기 있어요? 출근 시간은 지난 거 같은데요.”

이미 수도에 도착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 그런데도 세루리안은 출근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세루리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휴가계를 냈습니다.”

“……휴가계라는 게 내고 싶은 만큼 무한정 낼 수 있는 거였나요?”

이미 결혼 전에도 잔뜩 냈잖아, 그 휴가계!

내 추궁에 세루리안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이 우리 아이를 가졌는데 한가롭게 일이나 하고 있을 수 없지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부부간의 금실이 너무 좋은 것을 표 내는 것도 귀족 사회에서는 흠이 된다. 나는 계속 내 곁에 붙어 있으려는 세루리안의 등을 떠밀었다.

“아가도 열심히 일하는 아빠가 멋있을 거예요. 얼른 가서 일하고 오세요.”

“그럼 아기가 태어난 다음부터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처음에는 너무 말이 없어서 사람을 답답하게 하더니, 이제는 또박또박 말대답도 잘한다.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투덜거렸다.

“왜 이렇게 말을 잘해요? 그동안은 입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살았어요?”

“당신하고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신뿐이니까.”

“으이구.”

무슨 말을 해도 저렇게 사랑스럽게 대답을 하니, 결국 늘 지는 건 나였다.

나는 세루리안을 내쫓는 것을 포기하고 세루리안의 손을 붙들었다. 아직 해가 중천이었지만, 우리는 사이좋게 침대에 누워서 노닥거리기로 했다. 물론, 세루리안은 무척 기뻐했다.

“태담은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정말 아직 배가 납작한데도 이렇게 유난이니,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 얼마나 난리를 피울까 미리 걱정이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날까.’

잠시 생각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보니와 찰스가 떠올랐다. 나는 세루리안에게 물었다.

“보니와 찰스는 잘 지내고 있겠지요?”

“보니는 잘 지낼 겁니다. 파르메 대공령이 갑자기 나타난 아이로 인해 한바탕 뒤집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찰스는 세이지 부인과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잘 지내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할 텐데요.”

친엄마랑 지내게 되었으니 당연히 잘 지내겠지. 그래도 어쩐지 불안한 건 내가 걱정이 많아 그런 걸까.

으으, 이렇게 혼자 낑낑대 봐야 아무 소용없지. 나는 세루리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고민했더니 머리가 아픈 거 같아요. 누워야겠어요.”

그러자, 세루리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팔베개를 해 주었다. 나는 검을 잡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곧고 예쁜, 세루리안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세루리안 루크가 되기 전에는 이름이 뭐였어요?”

“글쎄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세루리안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어차피 중요하지도 않고요.”

그로서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그의 예전 이름을 물은 건, 그저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질문을 바꾸었다.

“그러면 부모님은 어디에 모셨는지 아나요?”

내 질문에 세루리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그건 왜 묻습니까?”

예민한 반응에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당신 부모님이니까 한 번쯤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

내 말에, 세루리안은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무심코 상대의 상처를 건드려 버렸구나.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서 세루리안에게 사과했다.

“제가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했나 봐요. 미안해요, 세루리안.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아닙니다, 에델. 제가 대답하지 못한 건…….”

세루리안도 덩달아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하지만 나를 달래려던 손은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다.

잠시 물 위로 나온 고기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헛숨을 쉬고 있던 세루리안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잊고 있었던 걸까요, 지금까지.”

“세루리안?”

허탈하고 안타까운 그 목소리는 내가 세루리안을 알게 된 뒤로 처음 듣는 것이었다. 놀라서 토끼처럼 눈을 뜨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내게로 완전히 등을 돌리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잠시만.”

그의 너른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세루리안, 왜 그래요?”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세루리안은 멍하게 눈을 껌뻑거렸다.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는데도, 세루리안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갑자기 부모님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같이 아파져서……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리 와요, 세루리안.”

세루리안이 가엾어서, 나는 그저 그를 두 팔 가득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를 보듬고 있으니, 어느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한때 다 타 버린 숯덩이가 된 것처럼 완전히 슬픔에 매몰되어서 엄마의 죽음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정신없이 울고 나니 내 힘으로 일어날 용기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부모의 죽음을 추모할 기회조차도 없었던 거야.’

세루리안은 그동안 감정을 느끼지 못했지만, 감정은 그 감정을 마주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어딘가에 쌓여서 정상적인 감정의 흐름을 막아설 뿐.

세루리안은 이제야 부모님이 돌아가신 슬픔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간 나를 안고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던 세루리안이, 여전히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마주했다.

“내게 당신은 기적입니다, 에델.”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엄지로 눈물이 흘렀던 뺨의 곡선을 완만히 훑었다가, 붉어진 눈꼬리를 문질렀다. 간지러움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세루리안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하나둘 떠오릅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손등을 덮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많이 떠올리도록 함께 노력해 봐요. 이제는 떠올려도 되니까요.”

“이제는…….”

세루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가 내뱉은 말을 따라 읊었다. 그리고는 이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이제는 어떤 것도 외면할 필요가 없지요.”

분명 그가 나를 안고 있었지만, 내 어깨에 얼굴을 깊게 묻어 마치 내가 그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세루리안의 얼굴에서는 금세 슬픔이 자취를 감췄건만, 나는 오래오래 눈물을 흘렸다. 마치 그를 대신해서 눈물을 쏟아 내듯.

* * *

그날, 세루리안은 에델 아지안을 만났던 날의 꿈을 꿨다.

아지안 모녀는 고아원에 색색의 꽃을 잔뜩 들고 찾아왔다. 오래전 과거를, 마치 낡은 그림을 넘기듯 멀리서 바라보며 세루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줄곧 궁금했어. 왜 아지안 모녀를 피해서 도망쳤는지.’

그 해답이, 오늘 꿈에서 또렷하게 드러났다. 아지안 부인이 고아원에 들어서며 세루리안에게 한 송이 꽃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카네이션은 가족을 상징하는 꽃인 동시에 추모의 뜻도 담고 있단다. 카네이션 향은 우울함을 쫓을 때 도움이 되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세루리안은 꽃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그때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원인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슬픔을 혼자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가 갑자기 감정을 잃은 것도, 다른 ‘진정 시럽’ 복용자들과 달리 감각에까지 이상 반응이 나타났던 이유도.

온 가족의 죽음이라는 참담한 사고 앞에, 어린 그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왜 여기 혼자 있어?”

에델만은, 그가 홀로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가 붉은 꽃송이를 그의 손에 쥐여 주는 순간, 무채색이었던 세상에 빛이 돌아왔다. 멈춰 있던 심장이 뛰고, 덮어둔 채로 굳어졌던 감정도 다시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세루리안은 제 옆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 에델을 끌어안았다. 자세가 바뀐 에델이 불편하다는 듯이 꼼지락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세루리안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정말 그녀는 그의 기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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