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
세루리안은 아직도 상황 판단이 되지 않은 듯 멍한 얼굴로 내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얼굴이건만,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이 손에 잡히듯 내게 전해져 왔다. 그는 분명 감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어에게는 우리의 사랑의 결실이 축복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쩍,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로어가 루크 공작에게서 다시 빠져나왔다. 검은 액체를 떨어뜨리며 로어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아기는 불행해. 불행해질 거야. 없어져야 해.”
그건 나를 가졌을 때 엄마가 했던 생각일까? 로어에게 먹혔을 때 쏟아졌던 원망을 떠올리며 나는 입술만 사리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너만 사라졌으면!!”
로어가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저 침식시키려고 할 때와는 다른 물리적 공격이었다.
로어가 나를 향해 살의를 드러낸 것이 처음이었던 탓에, 나는 뻣뻣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때 세루리안이 나를 감싸 안아 로어를 막아섰다.
“세루리안!”
바로 얼마 전, 세루리안의 팔이 베였던 때가 떠오르며 머리가 새하얘졌다. 세루리안의 단단한 팔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피도,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로어의 주둥이를 검집째로 막은 세루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행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어둠조차 걷어 내는, 믿음직한 목소리였다.
“에델도, 그녀의 아이도 행복해질 겁니다.”
그의 말에 내 손의 떨림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세루리안은 로어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안심하시고 맡겨 주십시오.”
검은 그림자가 크게 흔들렸다. 잠시 비명을 쏟아 내는 것 같던 로어는 아까보다 훨씬 크기가 줄어들었다. 녹아내리는 것 같던 실루엣이, 이제는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에델, 우리 아기.”
다시 한번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왈칵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엄마, 나 혼자 행복해서 미안해. 근데 나…… 엄마가 떠나고 지금 처음으로 행복해. 우리 아기와 나, 잘 지낼 수 있게 엄마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나도 모르게 로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그것을 톡 건드리기 무섭게 로어는 일렁거리며 점점 투명해졌다.
“네가 행복하면 엄만 다 괜찮아.”
붉게 물들어 가는 저녁 하늘에 흰 구름이 계단처럼 퍼져 있었다. 마치 천국으로 올라오라는 듯이.
* * *
로어가 그렇게 사라진 뒤에도 헤이스팅스 본부는 조용하지 못했다. 쓰러진 루크 공작 때문에 의원이 불려 왔고, 칼리마는 다른 로어가 없는지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얼추 일이 마무리되고 나니, 피곤이 몰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세루리안은 휘청거리는 나를 침대 위에 눕혔다.
물론, 그 사건이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건 아니었다.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었음에도 나는 참을 수 없는 불안감에, 세루리안을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더니,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세루리안!’
그 짧은 순간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로어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고, 내가 자는 사이 세루리안을 삼킨 건 아닐까, 같은.
내가 문을 활짝 열자, 문 앞에 세루리안이 온갖 음식으로 가득한 쟁반을 양손에 각각 들고 서 있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에델. 안 그래도 문을 어떻게 열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세루리안.”
세루리안의 얼굴을 마주하니, 밀물처럼 안도감이 몰려왔다.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기는 나를 본 세루리안은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재빨리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나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손이 비었습니다.”
안고 싶다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읽은 걸까. 나는 도도도 달려가서 세루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세루리안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제가 보고 싶으셨습니까?”
“당신이 보이지 않아서 조금 놀랐어요.”
“아침 식사를 가지러 다녀왔습니다. 배가 고프실 거 같아서요.”
세루리안의 말을 듣고 나니 거짓말처럼 허기가 밀려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제 저녁도 먹지 못했다. 세루리안이 나를 힘주어 한 번 끌어안고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쟁반을 두 개나 들고 오나 했더니, 테이블 위에는 종류별로 여러 가지 음식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내가 깜짝 놀라자, 세루리안은 뿌듯한 듯 은은하게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임신 초기에는 입맛이 평소와 달라진다고 들었습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거지, 저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걸요.”
오히려 너무 증상이 없어서 임신이라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의무병에게 진단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의심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루크 공작을 위해 의원을 부른 뒤, 정신없는 와중에도 세루리안은 내 진료를 부탁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나를 마주한 의원은 안경을 고쳐 쓰며 이렇게 말했다.
“임신이네요. 주 수가 꽤 지난 것 같고요. 그동안 잠이 많이 쏟아졌을 텐데, 전혀 모르셨습니까?”
의원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둔했나 봐.’
솔직히 졸린 것도 잘 모르겠고, 입맛이 변하는 것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생리주기를 떠올리지 못했으면 지금도 몰랐을 거야.’
뺨을 긁적거리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임신 초기에 남부까지 오게 만들다니. 모두 제 잘못입니다.”
늦게 알아차린 것도 창피한데, 사과까지 받다니! 나는 화들짝 놀라서 세루리안의 어깨를 붙들었다.
“모르고 온 거니까요. 그리고 그게 왜 세루리안의 잘못이에요. 세루리안의 남부행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걸요.”
“당신이 임신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 또한 제 불찰입니다.”
“아니, 세루리안…….”
세루리안이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벌써부터 불면 날아갈까 극진하게 대하니 나도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세루리안이 나를 위해 세심하게 하나하나 챙겨 주는 것은 기뻤다. 천천히 말을 고르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선생님처럼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어서 아침 식사부터 하시지요. 그다음에는 10분 동안 산책을 할 겁니다.”
“……지금부터 계획대로 움직여야 하나요?”
역시 유난스럽게 굴지 말자고 해야 하나 보다.
* * *
루크 공작은 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의원은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에델은 식사를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 말하는 세루리안과 함께 식사하고, 아까 말한 대로 산책까지 한 뒤 본부 건물로 돌아오니, 레오프리드 신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 상황을 전해 들었는지, 첫인사부터 다행이라는 말이었다.
“로어가 나타나다니.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단장님께서 중간에 돌아가신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군요. 물론, 저는 덕분에 개고생했지만요.”
사실 다행이라는 말보다, 자신이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세루리안은 깔끔하게 그 불평을 묵살하고 대답했다.
“나는 한 것이 없어. 모두 에델이 해낸 일이지.”
세루리안의 대답에 레오프리드 신부가 얼굴을 와락 구겼을 때였다.
나는 손바닥을 짝 하고 쳤다.
“아,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요. 아무래도 로어의 특성이 제게는 통하지 않는 것 같아요.”
공작의 곁을 지키며 나는 세루리안에게 어제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공작님과 함께 로어에 삼켜졌을 때도, 제 귀에는 로어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렸거든요. 하지만 세루리안은 그런 경험이 없다면서요.”
어젯밤에 경험한 일을, 로어 사냥꾼 중 누구도 겪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전에도 로어의 침식에서도 빠져나왔어. 내게 로어에 대한 내성이 있는 건 아닐까.’
심지어 엄마는 나와 접촉한 뒤,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본인이 나의 엄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와 함께 보냈던 날들의 긍정적인 감각을 되찾아서 사라진 거라면 할 말은 없지만.
‘분명 비밀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을 거야.’
세루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안 그래도 당신과 이야기를 나눈 뒤, 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신을 가졌을 때, 모친께서 진정 시럽을 다량으로 복용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임신 중인 여성에게 그 약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지만, 그로 인해 내성이 생겼을 가능성 또한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세루리안을 마주 보고 말했다.
“제가 정말로 로어에 대해서 내성이 있는지, 다른 로어에게도 적용이 되는지 한번 실험을 하면 어떨까요?”
“에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루리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쿠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는 테이블을 짚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그저 운이 좋았던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단 한 번의 예외를 믿고 뛰어드는 건 그저 무모할 뿐입니다.”
“하지만 세루리안, 어쩌면 해독약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아도, 상황제가 그 죗값을 치른다고 해도 이 문제는 끝이 나지 않아요. 근본적으로 병을 치료할 방법을 만들어야죠.”
“만약 해독약 같은 건 만들 수 없다면요? 오로지 당신만이 로어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요?”
그렇다면 별수 있나. 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제가 로어와 직접 맞서 싸워야지요.”
“저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세루리안이 곧장 반대했다.
“우리에게는 아이도 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위험한 길에 뛰어드는 걸 어떻게 팔짱을 끼고 쳐다보란 말입니까?”
“하지만 세루리안.”
“더 이상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십시오. 안 됩니다.”
세루리안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강경했다. 그를 설득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내가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을 때였다.
“에델의 말도 일리가 있군.”
누군가가 내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공작님.”
문간에 기대선 사람은 다름 아닌 루크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