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105)화 (105/138)

검은 액체가 나를 덮친 것 같았다. 숨이 막혀 입을 벌려도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그것은 격한 감정의 파도였다. 내 것이 아닌 감정이 어지럽게 안에서 섞여 들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으면 헤어지지 않아도 됐을까?”

“아니, 아이를 원망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어.”

“하지만 그가 갑자기 내게 이별을 고할 이유는 그것뿐이었는걸.”

버림받은 자의 슬픔,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버티기 어려운 마음, 그리고 원망으로 흘러가려는 감정, 동시에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는 마음.

그 복잡한 모든 감정이, 내게 이 로어가 누구인지를 알리고 있었다.

나는 입을 벌렸다. 그리움과 슬픔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엄마?”

세찬 급류처럼 흘러가던 감정이 내가 한 마디를 내뱉는 순간, 파도가 잦아들 듯 일순간 움직임이 느려졌다.

‘반응이 있어.’

내 말에 반응한다는 건…….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아까보다 훨씬 더 또렷한 목소리로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엄마.”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빛이 들어왔다. 폐부를 찌르듯 밀려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에, 나는 쿨럭쿨럭 거친 기침을 쏟아 냈다.

어지러워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현실로 잡아끈 것은 다름 아닌, 칼리마의 목소리였다.

“각하!”

맞아, 공작님!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고개를 드니, 루크 공작 또한 나처럼 막 정신이 든 건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휘청이는 몸을 지탱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괜찮나, 에델?”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나를 찾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아요.”

애초에 로어가 흉포하게 날뛰기 시작한 것도 내가 아니라 루크 공작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설마 저 로어가 정말 우리 엄마인 걸까?’

나는 떨리는 눈으로 나에게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검은 형체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로어에게 당한 건 수년 전의 일이잖아. 저렇게 로어가 되어서 아직도 떠돌고 있을 리 없어.’

하지만 저 로어가 엄마라면 모든 이야기의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나를 쫓아오는 이유라든가, 루크 공작과 함께 있는 나를 보고 화를 낸 상황 또한.

‘내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던 그날 밤, 공작이 나를 데려갔다고 생각한 거야.’

내가 사라지는 바람에 로어로 변한 엄마였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던 아이 아버지가 딸을 데려갔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엄마…….”

엄마라고 생각하니 울컥 감정이 솟구쳤다. 어떤 모습이라도 이렇게 내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슬프지만 기쁘기도 했다.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살아 계셨던 거야.’

아직 엄마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엄마랑 그렇게 헤어진 뒤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제는 누군가와 결혼했다는 사실도.

“엄마, 아버지가 날 데려간 게 아니에요. 그날, 저는 살인미수 누명을 써서 수사를 받고 있었어요.”

그간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로어에게 하려고 할 때였다.

루크 공작이 손등으로 땀을 문질러 닦으며 중얼거렸다.

“분명히…… 분명히 그때 로어를 없앴는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그 말은, 도저히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공작을 돌아보았다.

“그럼 공작님께서 엄마를 직접 상대했다는 소리인가요?”

“에델.”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물었다.

“공작님이 엄마를…… 죽이려고 한 거예요?”

아니길, 내가 잘못 들은 것이길. 간절히 바랐지만, 돌아오는 공작의 대답은 분명했다.

“한번 로어가 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

돌이킬 방법이 없기에, 그냥 없애려고 했다는 말이었다.

비록 마물이 되었다고 해도, 내 친아빠가 엄마를 죽이려고 했다는 말에, 나는 몹시 충격받고 말았다.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끝은,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찌 저리 차가운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건가.

충격받은 내가 멍하니 굳어졌을 때였다. 으르렁거리는 로어와 우리 사이에, 커다란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 서늘한 눈매, 날렵한 몸을 가진 남자.

“제가 해치우겠습니다.”

“세루리안!”

마물을 소탕하러 떠났던 세루리안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세루리안을 마주한 로어가 사나운 비명을 계속 쏟아 냈다. 당장이라도 두 존재가 부딪칠 것 같았다. 나는 세루리안에게 소리쳤다.

“저 로어는 우리 엄마예요! 해치면 안 된다고요!”

“하지만 에델.”

세루리안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내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로어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정말 물리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는 걸까. 그렇지만 엄마가 저렇게 존재하는걸. 내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누군가가 세루리안의 팔을 붙들어 그를 내 쪽으로 밀었다.

“세루리안, 에델을 데리고 떠나거라.”

루크 공작이었다. 세루리안은 그가 지시한 대로 뒤로 물러나서도,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각하! 각하께서는 지금 냉정하지 못하십니다. 오히려 각하께서 삼켜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 없다.”

루크 공작은 로어를 향해 걸어갔다. 로어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아가리를 쩍, 벌렸다.

“에델, 아까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었느냐?”

로어에게 삼켜지면서도 루크 공작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도리어 피할 수 없었던 거다. 내 죄악의 대가가 사랑하는 사람의 파멸이라면, 내게는 그것을 끝까지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으니.”

그 순간 소름 끼치게도 내 엄마의 목소리로 로어가 지껄였다.

“나를 또 죽일 셈이에요?”

루크 공작뿐만 아니라 내게도 슬픔과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였다. 눈물 고인 눈으로 움츠러든 나와 달리, 공작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정말 나는 나쁜 놈이지. 애초에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되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당신이 내게 건네는 행복이 너무나 달콤해서.”

그는 로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숨과 같은 마지막 말이 허공을 울렸다.

“그러니 떠나는 길은 외롭지 않게 같이 가 줄게.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면.”

루크 공작은 고개를 숙였다.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진실된 사과가 입술 밖으로 힘없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리나.”

그 순간 그림자가 빨려 들어가듯, 로어가 루크 공작의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언젠가 레오프리드 신부가 말했던 로어에게 먹혔던 내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재현되었다.

루크 공작의 눈이 까맣게 물들고, 그의 몸에서 검은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칼리마가 비명을 지르면서 루크 공작을 향해 달려갔다.

“각하, 안 돼요!”

그 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모든 게 현실 같지 않았다.

“칼리마!”

세루리안이 칼라마마저 로어에게 삼켜질까 봐 다급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칼리마가 비명을 질렀다.

“단장님, 각하를 구해 주세요!”

“그건…….”

“각하께서는 로어를 받아들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신 거예요! 로어로 변하기 전에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목숨을 끊는다고?’

그러고 보니 로어를 향해 다가갈 때 루크 공작의 손에는 커다란 검이 쥐여 있었다.

처음 로어에게 정신 공격을 당했을 때부터 비틀거리면서도 검을 챙긴 이유가 그거였단 말인가!

“각하!”

당장 뛰어들려는 칼리마를 세루리안이 붙들었다.

“각하를 믿고 기다려. 로어와 교섭할 때에는 누구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하지만…… 각하께서 목숨을 끊으시면 어떡해요.”

칼리마의 눈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칼리마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오히려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죽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그 말이 내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아빠!”

로어를 완전히 삼킨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 냈다.

“이렇게 떠나려는 거라면 정말 비겁해요. 나를 위한 행동이라 해도 하나도 고맙지 않아요. 이때까지 아버지 노릇 하나 해 준 것도 없으면서, 정말 끝까지 무책임해요!”

그 말을 하는 내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제, 이제…… 이제야 겨우 나한테도 아빠가 생겼는데, 이렇게 떠나는 법이 어디 있어요? 태어날 우리 아기에게서 할아버지도 빼앗을 셈이에요?”

내 말에, 끼기긱 소리가 날 것처럼 어색하게 루크 공작의 몸이 움직였다.

루크 공작과 로어의 목소리가 중첩되어 울리는, 몹시 거슬리고 불쾌한 목소리가 나를 향해 물었다.

“……아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목소리가 닿는다는 건 상황이 완전히 나쁘지만은 않다는 뜻이었다.

“그래요, 아기. 어차피 세루리안이 분에 넘치도록 좋은 아버지가 될 테니 할아버지가 할 일은 고작 이름 정도 짓는 것뿐일 테지만요. 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줘야 손주가 행복하게 산다는 속설도 몰라요?”

내 말에 세루리안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그가 크게 뜨인 눈을 나와 맞추며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립니까, 에델?”

이렇게 폭탄선언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는 아빠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쳤다.

“그, 그게…… 당신에게 가장 먼저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세루리안. 저도 이제야 알았어요. 엊그제까지는 그냥 생리불순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날짜를 계산해 보니, 마지막으로 생리를 한 것이 벌써 한참 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의무병에게 임신이 확실하다는 진단도 받았다.

“그 말은……?”

나는 세루리안의 두 손을 꽉 붙들었다. 그 두 손으로 내 배를 감싸며 말했다.

“임신했어요. 당신의 아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