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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103)화 (103/138)

* * *

그녀는 배 속의 아기로 인해 악착같이 버티고는 있었지만 깊게 난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임신과 함께 찾아온 호르몬 변화에 휘둘리고 있는데, 그 와중에 아기 아빠와의 이별까지 겹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여자를 힘들게 한 건 불면증이었다.

잠들지 못해 괴로운 밤, 열이 날 때마다 먹었던 ‘진정 시럽’을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기 엄마가 약을 조심해야지, 함부로 먹으면 안 돼. 아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

그렇게 따스한 충고를 건넨 사람도 있었지만, 여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만 마시면 심장을 가르는 것만 같은 통증이 가라앉고 차가운 이성만이 남아 죽은 것처럼 잠을 잘 수 있었으니.

그것이 이런 불행을 초래할 줄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알 수 없었지만.

설령 그 약에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알았어도 그때 그녀는 그 약을 마셨을 것이다. 상념에서 벗어난 단잠이 너무도 소중했기에.

* * *

남부에서는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점심 무렵 잠들었던 세루리안이 일어나면 함께 늦은 점심을 먹고, 헤이스팅스 거리를 조금 걷고 나면, 세루리안이 나가야 할 시간이 되는 것이다.

오늘 구조 요청이 온 곳은 헤이스팅스에서 멀어서 평소보다도 한 시간 정도 일찍 나서야 했다.

햇살이 따가운 늦은 오후에 그를 배웅하러 나가니, 그는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으로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제가 없어도 각하께서 계시니 안전하겠군요. 다행입니다.”

“원래도 칼리마가 지켜 주었는걸요.”

마음 같아서는 나도 마주 입을 맞춰 주고 싶었지만,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볍게 세루리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도 오늘은 푹 잔 것처럼 보이네요. 공작님이 오셔서 마음이 놓이나 봐요.”

“예, 각하는 의지할 만한 분이십니다.”

로어 사냥꾼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모양이었다.

‘세루리안이 이렇게 의지하는 것을 보면 내가 들은 것보다도 훨씬 더 유능한 사냥꾼인가 봐.’

그런데 막상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세루리안이 잠시 멈칫거렸다. 그는 내 쪽으로 가까이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입술을 대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당신을 지키는 건 제 일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말에 나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알아요. 아주 잠깐만 맡긴다는 거죠?”

세루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보다 감정이 풍부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콩콩 뛰었다.

우리가 서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선으로 교감을 나누고 있으니, 손에 두꺼운 장갑을 끼우며 걸어 나오던 레오프리드 신부가 툴툴거렸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두 분이 이리 다정한 모습을 보이시다니요.”

“어머, 주례까지 서 주신 신부님께서 하실 말씀인가요?”

바네린느가 찬물을 끼얹는 바람에, 엉망이 된 결혼식을 수습하기 위해서 앞에 나선 것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그것도 주례는 주례지. 신랑과 신부가 한 맹세의 증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내 대답에, 우리의 결혼식을 떠올린 레오프리드 신부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절대로 안 가려고 했습니다. 노엘 양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안 갔을 거고요.”

“하지만 오셨죠. 상냥하신 분이 억지로 퉁명스러운 체하실 필요 없어요.”

“흥.”

아무래도 내가 걱정되어서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평생 인정하지 않으실 모양이다. 그 또한 레오프리드 신부님다워서 나는 살짝 눈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신부님은 평소와 다르게 신부복 차림이 아니었다. 검은 코트에다 허리의 벨트를 단단히 조여서 날렵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신부님도 오늘 출정하시는 거예요?”

“저는 세루리안 경과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루크 부인 곁에는 칼리마가 붙어 있을 테고.”

“당연하죠! 마님은 제가 지킵니다.”

칼리마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씩씩하게 맞장구쳤다. 그 모습을 본 레오프리드 신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각하께서 질색하시겠군요. 안 그래도 칼리마를 꺼리시는데.”

“에델의 일이니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실 거다.”

“두 분 다 무슨 무례한 소리예요! 각하께서는 저를 특별히 귀애하신다고요!”

세 사람의 대화에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등 뒤에서 바위처럼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뭐가 그리 재미있나.”

“각하!”

바로 루크 공작이었다.

피곤해서 한숨 잔다고 들어간 뒤 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였다.

세루리안은 루크 공작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에델을 잘 부탁드립니다.”

“쓸데없는 소리.”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세루리안은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도대체 저 대답…… 어디서 안심을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니, 칼리마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싫으면 싫다고 하시거든요. 그러니까 저 말씀은 믿고 다녀오라는 뜻이지요.”

“…….”

아무래도 칼리마는 루크 공작 전용 통역가로 일해야겠다.

* * *

세루리안과 기사들은 헤이스팅스를 떠났다. 본부에는 나와 공작님, 그리고 칼리마 셋이 남았는데…….

“…….”

어색했다. 아주아주 많이 어색했다.

‘사실 다시 만나면 왜 세루리안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했냐고 추궁할 셈이었는데.’

막상 내가 걱정되어서 남부까지 내려온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런 것까지 추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

덕분에 세루리안과 한층 더 감정적으로 가까워졌다. 내가 이렇게 남부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루크 공작의 말처럼 두려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세루리안이 남부에 오랜 시간 체류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공작님께서 거기까지 생각하고 건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슬쩍 루크 공작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우리의 시선이 어색하게 부딪쳤다.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저렇게 물끄러미 쳐다볼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내가 얌전히 두 손을 맞잡고 서서 공작의 말을 기다리고 있으니,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공작이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행복한가?”

“네?”

“…….”

너무 막연해서 부연해 달라는 의미로 그를 바라보았더니만, 그는 도리어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니, 질문하는 사람의 태도가 뭐 저렇지?’

내가 기가 막혀서 눈살을 찌푸리니, 아까부터 루크 공작의 통역가를 자처하는 칼리마가 소곤소곤 번역해 주었다.

“단장님과 결혼해서 행복하냐고 물으시는 거 같은데요.”

그보다 훨씬 막연하고 포괄적인 질문이었던 거 같은데. 문득 세루리안이 계약 결혼을 하게 된 데 있어 공작의 책임이 절반은 된다는 게 생각났다.

애초에 그가 바네린느에게 휘둘려 공작 위 계승 조건에 결혼 따위를 넣는 것을 승낙하지 않았으면, 그가 계약 결혼에 응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심술궂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처음 결혼할 때에는 세루리안이 공작 위를 얻으면 바로 이혼하기로 했었죠.”

“……뭐?”

이맛살을 찌푸린 공작에게 나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세루리안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인걸요. 세루리안도 저를 사랑하고요.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행복해요.”

내 대답이 루크 공작에게는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루크 공작은 구겨진 미간을 풀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혼약서에 인장을 찍은 것은, 네 이름을 보고 너와 나의 인연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명은 운명이지. 친딸을 떼어 놨는데, 며느리가 되어서 돌아오다니.

루크 공작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잠자코 있던 세루리안이 혼약서를 내밀기에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인 줄 알았더니…….”

그 지적만큼은 얌전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시작이 어떠했든 저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어요. 게다가 그때 제 주변엔 아무도 없었는걸요. 아빠가 있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죠, 뭐.”

가시 돋친 말에 공작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렇겠지.”

더 반박할 줄 알았는데, 공작은 선선히 돌아섰다. 조금씩 멀어지는 등을 보며 칼리마가 안절부절못했다.

“각하께서 상처받으신 것 같은데요.”

“제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걸요.”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칼리마가 조금 더 채근하듯 내게 말했다.

“각하께서는 정말 마님의 행복을 걱정하셔서 물으신 거 같은데.”

걱정? 그래. 걱정하는 마음으로 저리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나는 강경했다.

“칼리마,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정말로 제 행복을 걱정하셨다면, 제가 자라는 동안 적어도 한 번은 저를 보러 왔어야 한다고요.”

내가 세루리안과의 계약 결혼을 결정할 때, 나는 로어와 복수라는 두 단어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조언을 건네줄 어른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를 방치했던 그에게, 과연 그때 나의 결정이 옳았는지 글렀는지 이제 와 간섭할 자격이 있는가?

“공작님을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지난 일까지 간섭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단호한 대답에, 칼리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한숨을 쉬고 돌아서려는 내게 칼리마가 작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하지만 마님께서 모르는 사연이 더 있을 수도 있잖아요.”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그 또한 그분의 몫이죠.”

냉담하게 선을 그은 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칼리마에게 물었다.

“혹시 저는 모르는데 칼리마는 아는 게 있는 건가요?”

“저, 저, 저도 몰라요!”

칼리마는 온몸으로 안다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흐음,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뜨니, 칼리마는 빠른 걸음으로 본부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도리질 쳤다.

“몰라요! 알아도 모르는 겁니다.”

그런 칼리마를 붙들고 추궁하려고 할 때였다.

“크, 큰일입니다!”

병사 하나가 본부를 향해 달려와서 문을 열어젖히고 소리쳤다.

“마물이 나타났습니다!”

헤이스팅스 본부와 가까운 곳에 마물이 나타났다.

남부의 거점인 헤이스팅스까지 마물이 내려온 것도 드문 일인데, 마물에 대한 병사의 설명은 더더욱 놀라웠다.

외형은 커다란 늑대와 같지만 실루엣이 녹아내려 확실하지 않다. 눈도 코도 입도 모두 다 뭉개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바로 로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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