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갑자기 루크 공작이 남부까지 내려올 줄은 몰랐다. 어지간히 급하게 달려온 건지, 그의 이마에는 땀으로 젖은 머리칼이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앉으세요. 식사는 아직이시지요?”
“에델.”
급한 대로 내 몫의 식사와 자리를 그에게 양보할 셈이었다. 나야, 조금 늦게 먹어도 상관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루크 공작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손목을 꽉 붙들었다.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네가 위험하다는 소리를 듣고…….”
“제가요?”
아까도 문을 열자마자 저렇게 말을 했지. 하지만 수도에서 여기까지 달려올 정도로 위험한 일은 없었는데 말이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아, 로어 때문이시군요!”
“……로어?”
최근 내가 위험에 빠진 일이라면 로어가 갑자기 출몰한 것밖에 없지 않나. 내 대답에 루크 공작은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로어라고?”
계속 반문하는 어투가 마치 그럴 리 없다는 듯이 들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오셨는데요?”
내 물음에 루크 공작은 언제 다급했냐는 듯이 내 손을 놓고 몸을 휙 돌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다.”
자신이 열고 들어온 문을 노려보는 시선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감히 루크 공작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사람은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칼리마가 서신을 보낸 건가!’
곧 해결책이 날아올 거라더니, 루크 공작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렇지, 정확한 판단이지. 루크 공작은 훌륭한 로어 사냥꾼이고 경험도 많으니, 변이된 로어를 상대하는 데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도 없을 거야. 세루리안에게도 도움이 될 거고.’
역시 칼리마. 믿음직한 상담자였다. 나중에 칼리마를 만나면 꼭 고맙다고 안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에게 별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공작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근처에 있는 의자를 빼서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특유의 퉁명스러운 어조로 세루리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로어라니? 남부에선 로어가 발생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출몰했습니다.”
“……확신할 만한 증거가 있었느냐?”
세루리안은 간단하게 로어에 대한 제보 내용과 목격자에 대해 설명했다. 그 목격자가 나를 암살할 예정이었다는 소리를 들은 루크 공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직도 에델을 노린다고?”
언젠가 내가 칼리마에게 흉내 내어 보인 바로 그 불퉁스러운 표정 그대로였다. 세루리안은 냉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바네린느 황녀가 유배를 떠난 것이 에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베로니카 백작 부인은 바네린느 황녀를 자식처럼 여겼으니까요.”
“정말 우스운 일이구나. 제가 판 함정에 드러누운 주제에 남을 탓하다니.”
“수도로 귀환한 다음에 가문 차원에서 항의해야겠습니다.”
“증인을 일단 죽지 않게 잘 보호해서 끌고 가야겠구나.”
“이미 신변 보호와 이송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그래.”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니 일이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서로를 신뢰하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대화였다.
‘예전이라면 돈독해 보인다며 흐뭇해했을 텐데.’
내 쪽이 친자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니, 두 사람의 대화를 전처럼 볼 수가 없었다.
‘나랑은 저렇게 대화하지 못하잖아?’
항상 저쪽은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내뱉고, 나는 거기에 반문하는 식의 대화만 오가는데.
나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루크 공작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왜 그런 표정이지?”
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공작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많이 하시는 걸 처음 보는 거 같아서요.”
내 대답에 공작은 코웃음을 쳤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표정 때문에 오히려 더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의 처음은 참 쉽구나. 수도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럼 공작님의 처음은 어려우시고요?”
속이 점점 꼬여 들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 나를 보며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세루리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말했다.
“전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에델도 공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까?”
여전히 냉담한 반응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으면 이만 일어나자꾸나.”
‘역시 나랑 잘 안 맞아.’
루크 공작과 평범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세루리안뿐이지 않을까. 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공작이 슬그머니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나를 공작님이라고 부르지?”
“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공작이 머쓱한 듯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네가…… 아니다.”
“제가 뭐요? 뭔데요?”
“아니다.”
계속 추궁하자,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 바람에 구겨진 망토 자락을 추스르며 말했다.
“피곤하구나.”
“네, 쉬세요.”
빙긋 웃으며 그를 배웅한 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 없는 척, 못 알아들은 척했지만 공작의 말뜻은 모를 수가 없었다.
‘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냐는 거지?’
나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 의도와 마음을 알면서도 눈치 없이 공작님이라 부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흥, 그렇게 쉽게 불러 줄 수는 없지.’
독단적이고 감정 표현이 적은 아버지를 둔 죄로, 태어나기도 전부터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렇게 쉽게 아버지로 인정하고 도란거릴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나는 나쁜 며느리 하려고 이 집안에 들어온 거잖아? 아주 오래오래 끌어 주겠어, 그 역할.’
아주 작은 심술을 부릴 생각을 하며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을 때였다. 세루리안의 손바닥이 가볍게 내 뺨을 쓸어내렸다.
“에델, 표정이 이상합니다.”
“앗! 혹시 너무 사악한 얼굴이었나요?”
“아닙니다.”
세루리안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목덜미 뒤로 넘어가면서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파고들었다.
“그저 아까 하던 걸 마저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를 응시하는 세루리안의 눈가가 살짝 붉었다.
그때 문 앞을 서성이던 칼리마를 발견한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과장스럽게 말했다.
“아, 진짜. 이러다가 제가 정말 세기의 미녀라고 착각하겠어요!”
그렇게 수습하려고 했더니, 세루리안이 얼굴을 굳히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착각이 아니라 에델은 아름…….”
“아하하, 칼리마! 공작님께 서신을 보낸 건 칼리마지요? 고마워요. 정말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네? 네.”
급하게 말을 돌리는 내게 떨떠름하게 대답을 한 칼리마가 내게 소곤거렸다.
“그런데 저 들어가도 되나요? 단장님이 얼른 나가라고 눈빛으로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요.”
“…….”
세루리안을 마주할 때와 다른 창피함에 나는 목덜미까지 새빨개지고 말았다.
* * *
어찌 되었든 칼리마 덕분에 세루리안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루크 공작이 함께 있으면 세루리안이 로어를 마주할 때 흔들리더라도 도와줄 테니 말이다.
잠든 세루리안에게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고 나오자마자, 나는 곧장 칼리마를 찾았다.
“고마워요, 칼리마!”
칼리마를 와락 끌어안으며 그렇게 말하자, 칼리마는 까르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에이, 별말씀을요. 덕분에 저도 아주 재미있는 걸 봤는걸요.”
“재미있는 거?”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각하라든가?”
“……그거 정말 재미있는 거 맞나요?”
피곤하다던 공작이 쉬지 않고, 칼리마를 찾아가서 무언의 시위를 한 모양이었다.
매섭게 노려보는 루크 공작의 모습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을 정도였는데 정작 칼리마는 보조개가 쏙 들어가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저는 루크 공작 각하의 새로운 면을 볼 때마다 늘 짜릿하답니다.”
칼리마가 이렇게 루크 공작을 친근하게 대할 때면, 묘한 서운함이 느껴졌다. 친딸보다도 더 친근해 보이니 말이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칼리마는 공작님을 어려워하지 않네요.”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가까이서 봐서 그렇지 않을까요?”
“역시 같은 공작가라서 교류가 많았던 걸까요? 공작님이 누굴 저택에 초대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되는데요.”
“처음에는 그렇게 발을 들였는데, 그 뒤로는 제가 많이 찾아갔어요.”
루크 공작가에 방문하는 어린 칼리마와, 무뚝뚝하게 굴면서도 마지못해 받아 주는 루크 공작의 모습을 떠올리니, 저절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역시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한참 뒤야. 친딸에게는 얼굴도 보여 주지 않았으면서, 칼리마와는 착착 어린 시절의 추억을 쌓고 있었다니.’
그가 왜 엄마와 나를 뒤로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역시 섭섭했다. 그렇다고 내 섭섭함을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찾아가면 환영해 주셨나 보군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박정하기 그지없었다.
“아뇨? 문도 안 열어 주고 말도 안 거셨어요.”
“네? 그런데 왜 계속 찾아갔어요?”
“오라버니들을 두들겨 패고 부모님께 혼쭐이 날 것 같으면 숨는 곳이 루크 공작가였죠. 거기까지 쫓아와서 화는 안 내시니까.”
“……처음부터 공작님을 너무나 편하게 대한 거 아닌가요.”
어린 칼리마는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말썽꾸러기였던 모양이다. 언젠가 아이를 낳은 뒤로 한시도 마음이 편안했던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던 포텐샤 공작 부인의 말을 떠올렸다.
‘역시 육아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야. 나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둬야겠다.’
세루리안을 닮아서 얌전한 아이일 수도 있지만, 나를 닮아서 왈가닥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 찾아올 우리 아이를 떠올리던 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도 생리를 안 한 거 같은데?’
최근 벌어진 일들로 정신없어 자연스럽게 건너뛰게 된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