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쓰레기였다고 종종 말하던 엄마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엄마를 그리워하던 루크 공작님을 떠올렸다.
엄마는 불현듯 떠오르는 지긋지긋한 기억들을 어쩌지 못하겠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되돌아 생각해 보면 엄마도 아빠를 잊을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엇갈린 나머지 서로 평생을 그리워하다가 끝이 나 버렸지.’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서로 사랑하는데 평생 그걸 모르고 엇갈리다니.
‘공작님이 혼자서 생각하고 이별을 고했기 때문이야. 물론 그때는 그것만이 정답인 거 같았겠지.’
결과적으로 엄마의 마음에 대못만 박았지 않나.
‘나는 세루리안에게 물어야겠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분명 우리의 관계를 지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야.’
그리 결심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루리안을 찾아가는 내게 등 뒤에서 칼리마가 박수를 쳐 주었다.
“역시 저는 마님이 씩씩해서 좋아요. 겁쟁이 단장님을 혼내 주세요.”
딱히 내가 용감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나는 헤헤, 하고 웃으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하늘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그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밤이 되면 마물이 움직인다. 기사단도 출정을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 전에 세루리안과 상의해야겠어. 나는 이 사건을 언론에 풀어 공론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세루리안이 있을 회의실에 다가갈수록 소란스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회의실 문 앞에 선 칼리마가 낯익은 기사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어수선하지? 무슨 일이 있나?”
“아, 칼리마 경.”
기사는 칼리마에게 정중히 대답했다.
“로어가 출현한 거 같습니다.”
“아아, 감히 우리 마님을 해치려고 한 멍청이 말이지?”
기사의 대답에 칼리마는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베로니카 부인의 사주를 받았다는 그 사람을 떠올린 것이다. 기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거 말고요. 또 다른 목격자가 신고한 모양입니다.”
“뭐?”
칼리마는 반사적으로 창밖을 돌아보았다. 아까 전 낮에 활동하는 로어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음에도, 그 사실을 쉽사리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사는 나와 칼리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덧붙였다.
“단장님께서 가셨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루리안이 직접 나섰다는 말에 칼리마의 얼굴 또한 한결 나아졌다.
“그렇대요, 마님. 마님은 저랑 함께 있는 게 좋겠네요.”
하지만 나는 두 사람처럼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칼리마의 옷자락을 붙들고 말했다.
“우리도 가 봐요, 칼리마.”
“토라지실 때는 언제고 또 단장님이 걱정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단장님은 강하다니까요.”
“그런 게 아니에요, 칼리마.”
평소라면 나도 이렇게까지 불안해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세루리안은 평소와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
“세루리안은 지금 감정적으로 동요된 상태라고요! 로어와 마주치면 위험하단 말이에요!”
“네?”
칼리마의 눈이 크게 뜨였다.
* * *
“세루리안 경, 이쪽입니다.”
기사의 말을 들으며 세루리안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모든 제보에 기사단이 이토록 예민하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마물이라고 해서 모두 다 다루기 어려운 것은 아니며, 하물며 이번에 입수된 제보는 그저 검은 그림자 같은 물체가 숲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세루리안은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에델을 노리고 있는 거라면 그냥 놔둘 수 없어.’
남부에서 발견된 로어와 이전의 로어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지만, 지금 세루리안의 마음이 다급한 데에는 에델의 안전 문제가 더 컸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한곳으로 몰아간 다음…….”
어차피 로어를 마주할 때는 오롯이 그 혼자여야 했다. 그가 비장한 눈으로 어두운 숲을 쳐다볼 때였다. 기사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로어가 남부 지역에 출몰하는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다른 지역까지 번졌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요?”
불안하기는 다른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로어를 상대하는 전문 사냥꾼들은 수도에 남았기 때문에, 함께 남부로 온 기사들은 로어를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비관적인 전망은 하지 맙시다.”
세루리안의 딱딱한 말에 기사들 사이의 소란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담담한 말투, 그리고 변화 없는 그의 표정은 그 자체로 안정제와 다름없었다.
‘에델.’
하지만 평온한 외관과 달리, 세루리안의 속은 평생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소란스러웠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델은 기밀을 알아 버렸다. 에델은 기자가 된 후로 계속 로어를 쫓았던 만큼 조용히 입을 다물 사람이 아니었다. 상황제 또한 에델이 기밀을 알아낸 것을 알게 된다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내가 돌아가지 못하면 에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모든 압박 속에서 에델이 안전히 도망칠 수 있을까? 루크 공작이 정말 그녀를 보호해 줄까?
자신이 없는 곳에서 에델이 위험에 처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이런 감정이 두려움인가.’
에델은 두려움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감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루리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에델처럼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할 수 없었다.
“단장님?”
“……아무것도 아니다.”
참을 수 없이 마음이 불안했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세루리안은 다시금 침착하게 눈앞의 숲을 응시했다.
바로 그 순간, 절대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세루리안!”
세루리안은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칼리마와 함께 말에서 내리는 사람은 분명 에델이었다.
그녀를 확인하는 순간 버럭 천둥 같은 소리가 먼저 튀어나갔다.
“어째서 여기 있는 겁니까!”
상대가 걱정되면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수도 있구나. 세루리안은 낯선 자신의 목소리에 얼떨떨해졌다.
에델 또한 놀란 듯 굳어졌다가 그 못지않게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이 걱정되니까요! 수도에 지원 요청을 하도록 해요. 이렇게 무모하게 나서지 말고요!”
“그건 당신이 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돌아가십시오.”
“세루리안!”
“저는…….”
이 불안을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그녀에게 전해질까. 세루리안이 드물게 말문이 막혀서 입술만 벙긋거릴 때였다. 상황이 갑자기 급변했다.
“단장님! 움직입니다!”
“큭.”
에델이 있는 상황에서 로어를 마주하게 되는 건가. 세루리안이 힘껏 검을 붙들었다.
이어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풀숲이 흔들렸다. 세루리안이 긴장된 눈으로 숲 안쪽을 응시했을 때였다.
검은 물체가 풀숲을 헤치고 나오긴 했다. 다만, 그 물체가 제 손으로 검은 후드를 걷어 내니, 사람의 것이 분명한 흰 얼굴이 나왔을 뿐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다들 뭐 하는 겁니까?”
“……레오프리드?”
놀랍게도 그 얼굴은 기사들도 익히 아는 이의 것이었다. 수도에서 활동하는 로어 탐색꾼 중 하나, 평소에는 고아원을 운영하며 조용히 지내는 레오프리드 신부였다.
모두가 황당해져 아무 말도 못 하는 상황에서, 에델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신부님이 왜 여기 계세요?”
* * *
사정을 들어 보니, 애초에 목격자는 검은 물체가 헤이스팅스로 향하는 숲을 휘젓고 있다고 제보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워낙 변이된 로어에 대한 경계심이 치솟았던지라, 로어로 우선 단정지었던 것이다.
‘괜히 긴장했네.’
맥이 빠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당한 것은 로어로 오해받은 레오프리드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검은 망토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아아, 은신용으로 검은 옷을 입었는데, 그 때문에 도리어 경계를 산 거 같군요.”
“이렇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 대체 어딨습니까!”
“제 마음입니다.”
기사들이 항의했지만, 레오프리드 신부의 시큰둥한 대꾸 때문에 결국 반발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해후를 나누는 동안, 세루리안은 칼리마를 돌아보았다.
“칼리마.”
푸른 눈동자가 너무도 매서워 내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세루리안은 냉정한 어조로 질책했다.
“네 임무는 에델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었을 텐데.”
“로어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 온 거예요. 기운을 느꼈다면 당연히 데려오지 않았겠죠.”
칼리마가 로어 탐색꾼다운 반박을 했지만, 도리어 세루리안의 화를 돋웠다. 세루리안의 굵은 눈썹이 쓱 올라가자, 칼리마는 후다닥 내 등 뒤로 도망치며 소리쳤다.
“그리고 제 고용인은 단장님이 아니라 마님이거든요! 단장님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요.”
아니, 내가 언제 고용했는데.
합의되지 않은 변명에 어이가 없었지만, 나에게는 마땅히 칼리마를 감쌀 의무가 있었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딛으며 세루리안과 시선을 마주했다.
“방해했다면 미안해요. 당신이 걱정돼서 그랬어요.”
“이건 제 일입니다, 에델.”
“하지만 걱정되는걸요. 당신을 걱정하는 건 당신의 부인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제 권리예요.”
“그건 궤변입니다.”
“그럼 당신은 제 걱정 안 하실 거예요? 제가 마물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취재를 떠나도요?”
“그건…….”
내 반박에 세루리안의 입이 다물렸다. 잠시 창백한 얼굴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세루리안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작게 투덜거렸다.
“너무합니다. 화도 못 내게 하고.”
그는 너무나 심각한 얼굴인데도, 나도 모르게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으십니까?”
“저도 똑같은 생각을 했거든요.”
내 말에 세루리안이 무슨 의미냐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뜻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