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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94)화 (94/138)

약한 소리에도 의외로 세루리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요?”

“이렇게 둘이 물속에서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즐거우니까요.”

“……!”

세루리안의 말에 나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듣고 보니 그의 말대로, 그는 상체를 벗고 있는 데다가 나도 얇은 수영복 한 장만 걸친 채로 서로를 빈틈없이 끌어안고 있었다.

‘으으, 괜한 말을 해서……. 의식되잖아.’

맞닿아 있는 피부가 신경 쓰여서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그조차도 민망하게 느껴져서 그냥 세루리안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머리를 묻었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맨살도 깔끔하대.’

피부만 흰 것이 아니라, 느낌 자체가 청결했다. 평소에는 이렇다가도 흥분할 때면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르는데…….

‘생각 그만! 생각 그만!’

고개를 흔들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지난 밤의 기억을 지워냈다.

내가 물이 무서워서 그리 반응한다고 생각한 건지, 세루리안은 달래듯 커다란 손바닥으로 나를 토닥였다.

“하지만 에델에게 수영 같은 취미가 있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야 다들 배려해 줘서 이렇게 느긋하게 보낼 시간이 있지만, 다음에는 어떨지 모르니까요.”

결국 안 배워도 좋고, 배워도 좋다는 소리였다.

나는 엄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진지하게 수영에 대해서 생각중이었구나. 부끄러워진 나는 뺨을 붉히며 새초롬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오늘따라 말이 많으시네요.”

“음.”

내 지적에 자신이 평소보다 배로 말이 많았다는 걸 깨달은 세루리안이, 긴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부드럽게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사실 좀 기뻤던 거 같습니다. 당신이 저와 다음을 이야기해 주어서요.”

남부에 또 함께 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한 말이, 그에게는 몹시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기뻐 보이는 그의 옆얼굴을 보던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도 그런 두려움을 느끼세요? 제가 갑자기 사라질 것 같고?”

황궁 정원에서의 일로 인해 피어난 그의 두려움.

“당신과 함께하는 한 그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기는 어렵겠지요.”

세루리안의 얼굴이 금세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한 어조로 덧붙였다.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 이렇게 기쁨과 즐거움에 익숙해지다가 그것들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지 못하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그를 보니 괜히 내 마음이 찡하게 아팠다.

그의 얼굴 뒤로, 과거의 일을 이야기할 때만 생기 있는 눈을 하던 루크 공작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씩씩한 어조로 다짐했다.

“제가 꼭 당신보다 오래오래 살게요, 세루리안.”

“예……?”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던 세루리안이, 이내 쿡쿡 작은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드물기 짝이 없는 그의 미소를 몇 번이나 목격한 나는 괜히 뿌듯해졌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나 봐.’

세루리안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듯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세루리안과 함께 있어서인지, 물이 아까처럼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고, 겨드랑이까지 차올라도 무섭지 않았다.

“천천히 다리를 내려 볼까요? 발꿈치를 들면 닿을지도 몰라요.”

수영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런 의지로 말했더니, 도리어 세루리안이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냥 그대로 계십시오.”

“네?”

“생각해 보니 수영을 배울 날이 많은데,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세루리안.”

“그보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세루리안이 고개를 내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 바람에 길게 뻗은 목선과 툭 튀어나온 울대, 귀로 이어지는 턱선이 도드라졌다.

‘아니, 이 남자는 어떻게 뼈까지 예쁘지.’

충동적으로 그의 턱 끝에 입을 맞추려고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갑자기 발소리가 울리더니 불쑥 기사 한 사람이 수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장님! 바로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바람에 세루리안의 턱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들킬 뻔한 나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 * *

다급하게 달려간 본부에는 난생처음 보는 중년 남자가 기사들에게 자신이 목격한 것을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괴물이었어요! 괴물이 제 동료를 삼켰다고요.”

괴물이라. 역시 험한 남부구나. 나는 얼른 일하러 가라는 뜻으로 세루리안의 팔을 토닥였다.

“절 좀 보호해 주십시오! 그 괴물이 찾으러 올지도 모릅니다.”

그때였다. 도와줄 사람을 찾는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의 시선이, 나를 보는 순간 번쩍 빛났다. 그는 내 앞으로 달려오더니 넙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부인!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저를 어떻게 알고요?”

정말 난생처음 보는 남자인데. 당황스러워서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으니, 그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저, 저희는 베로니카 부인의 사주를 받아서 부인을 해치러 남부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베로니카 부인?”

그는 동료와 함께 나를 해치러 남부로 내려왔단다. 그것도 베로니카 부인이라는,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사주를 받아서 말이다.

충격적인 소식이 연달아 이어져 정신이 일순간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누군지 아느냐는 뜻으로 세루리안을 돌아보았다.

세루리안의 설명에는 감정이 빠져 있어서 명쾌했다.

“바네린느 황녀가 황궁 예산을 횡령하도록 도와준 중간 연결책입니다. 그 사실이 밝혀져서 얼마 전 궁에서 쫓겨났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에 앙심을 품은 모양이군요.”

‘또 바네린느와 연관되어 있구나.’

도대체 이 악연은 어디까지 따라올 건지. 솔직히 이번에도 바네린느가 사주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가장 먼저 들었다.

‘역시 처벌을 받는다고 끝이 아니야.’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을 때였다. 내가 심각해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걸 알아챌 만한 정신이 없는 것인지, 남자가 횡설수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헤이스팅스로 오는 길목에서 까만 늑대처럼 생긴 괴물이 제 동료를 삼켜 버렸습니다! 으르렁……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까만 늑대?”

그건 로어의 특징 아닌가. 그의 말에 섬뜩해진 나는 세루리안을 돌아보았다. 세루리안은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놀라서 헛것을 본 것 같군.”

“대낮이었는걸요! 어떻게 헛것을 봅니까!”

“대낮이니 더더욱 신뢰가 가지 않는다. 어떤 마물도 대낮에는 활동하지 않아. 특히 로어는.”

기존의 상식대로라면 남자가 말한 괴물은 로어와 어느 것 하나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까만 늑대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로어는 수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낮에는 생겨나지 않는다.

‘혹시 이것도 함정인가.’

로어에게 습격당한 척하면서 나에게 접근해서 해를 끼치려는 수작이 아닐까. 바네린느 황녀가 언급되니 온갖 의심이 밀려왔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자신의 말이 거짓으로 치부되는 것 같은지 남자는 더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눈에서는 검은 물이 뚝뚝 떨어졌습죠. 눈만이 아니었습니다. 실루엣, 그 실루엣이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았습니다! 얼음으로 조각해 놓은 늑대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울음소리라고 생각했던 건…… 사실 비명이었고요. 수십 개의 비명이 겹쳐져서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던 겁니다.”

그의 설명에 모두의 입이 다물렸다. 어색한 침묵이 본부 안에 내려앉았다.

생생한 묘사였지만 로어의 외관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듣는 것은 처음인 탓에 나는 쉽사리 놈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했다.

“단장님.”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세루리안을 불렀다. 세루리안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로어다.”

로어가, 남부까지 내려온 것이다.

* * *

나는 새로이 알게 된 것들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로어는 검은 얼음이 녹아서 떨어지는 듯한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울링이라고 생각했던 건 사실 비명이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로어는 본래 수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지. 그런데 이번에는 남부에 나타났어.’

왜 하필 내가 남부로 떠나 왔을 때 로어가 나타난 걸까. 나와 관련이 느껴진다면 과민한 걸까.

이 모든 가정의 답을 한 사람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지금 너무도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채였다.

남자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세루리안.”

나와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에 어지러운 파문이 번졌다. 그가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공작가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에델.”

다급한 목소리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멍해진 나에게, 나보다 더 혼란스러운 듯한 세루리안이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러다가 돌아가는 길에 로어를 마주하기라도 하면…… 차라리 제 곁이 안전…….”

그가 이리도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힘을 주어 그를 불렀다.

“세루리안.”

세루리안이 창백한 얼굴로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빙긋 웃었다.

“난 여기 있어요.”

그 말에 세루리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입술을 짓씹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목이 졸린 듯 그가 꺼질 듯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가능하면 이런 불안은 영영 모르고 싶었습니다.”

“…….”

어떻게 그를 위로할 수 있을지 방법을 몰라서, 나는 그저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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