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저장실이 있어요? 루크 공작가에?”
“그럼요. 제가 언뜻 살폈는데 엄청 오래된 최고급 와인도 대거 있던걸요.”
“오오!”
품질 좋은 포도로 만든 와인은 숙성될수록 가치가 올라간다. 물론 온도나 습도, 차광 등 조건이 까다롭다고는 하지만, 공작가에서 귀한 와인을 아무렇게나 보관했을 리 없었다.
현 공작이 술을 즐기지 않았다면 적어도 20년은 된 술이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을 터.
‘어떤 명주가 숨어 있을지 너무너무 기대되는걸!’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좋아요. 우리 언제 함께 건배해요!”
“마님이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나와 칼리마는 루크 공작저에 돌아가서 와인을 마시기로 약속하며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그리고 어깨동무를 풀고 돌아서니, 뜻밖에 세루리안이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들 보기에 평소와 같은 세루리안 루크일 터였으나, 그에게 익숙해진 나는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못마땅한 표정이라는 걸!
“세루리안? 왜 그런 표정이에요?”
그 물음에, 조금 당황한 듯 아몬드형의 눈을 깜빡거리던 세루리안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제겐 와인을 좋아하신다는 걸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때문인가 했더니, 자신이 몰랐던 이야기가 나와서 그랬던 모양이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세루리안의 팔에 팔짱을 끼웠다.
“그동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잖아요. 굳이 공작 부인에게 트집을 잡히고 싶지도 않았고요.”
“와인을 즐기는 게 왜 트집거리입니까?”
“저도 세루리안의 말에 동의하지만 공작 부인께는 아니었을걸요. 귀족 사회에서 귀부인에게는 애주보단 절주가 미덕이고, 공작 부인은 없는 허물도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세루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사회에서 와인에 대한 소양을 가지고 있는 건 필수였지만, 또 와인을 몹시 즐기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건 금기시되었다.
‘바네린느는 내가 와인 한 잔만 해도 고주망태인 것처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고 말이지.’
세루리안은 입을 꾹 다문 상태였다. 내 말에 납득은 했지만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세루리안에게 물었다.
“세루리안, 혹시 질투해요?”
세루리안은 정색하고 고개를 휙 돌리며 대답했다.
“제가 칼리마를 왜 질투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자꾸 그렇게 물어보세요? 진짜 질투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세루리안이 계속 부정을 하니 비슬비슬 웃음이 나왔다. 나는 세루리안이 고개를 돌리는 쪽을 따라 휙휙 얼굴을 옮기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세루리안을 놀리는 모습을 보며 칼리마가 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처음에는 단장님께서 저렇게 무뚝뚝한데 우리 마님 어쩌나, 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요. 아주 단장님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놀리고 계시니.”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격렬하게 부정했지만, 속은 찔렸다.
‘칼리마, 눈치가 너무 빨라.’
아무래도 칼리마 앞에서는 세루리안을 놀리지 말아야겠다.
* * *
아침 식사를 한 뒤, 우리는 마차를 타고 헤이스팅스로 이동했다.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헤이스팅스는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도시였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헤이스팅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와아, 확실히 더운가 봐요. 사람들 옷차림이 얇아요.”
그리고 대부분이 소매가 짧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
마물의 번식기라 어수선하다고 해도, 헤이스팅스에서는 그런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활기찼고, 항구에는 작은 배들이 줄지어 드나들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칼리마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물은 낮에는 거의 활동하지 않거든요. 번식기의 암컷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침범당하면 움직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아주 드물어요.”
“아아, 그럼 낮에는 다들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요.”
“헤이스팅스는 밤에도 안전한 도시이긴 해요. 헤이스팅스 밖의 작은 마을들은 마물이 나타날 기색이 느껴지면 보통 대피소에서 밤을 보내지요.”
지난번 텅 비어 있었던 마을이 그런 맥락이었나 보다.
그렇게 칼리마의 설명을 들으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마차가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가로의 길이는 꽤 되었지만 높이는 한 층뿐인 흰 건물이었다.
고개를 휘휘 돌려 보니 대부분의 건물이 단층이었고 2층 이상의 높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많은 건물 너머로 멀리 희미하게 절벽처럼 우뚝 선 흰 성벽이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인구수가 많구나. 헤이스팅스가 안전하다는 건 역시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서겠지.’
수도만큼은 아니어도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된 듯했다.
‘방패처럼 세워진 성벽도 보이고.’
도시 전체를 에워싼 수도의 성벽과 달리, 헤이스팅스는 산 쪽에만 성벽이 세워져 있었다. 바닷가 쪽으로는 벽이 세워지지 않은 걸 보면, 바다에서 밀려오는 마물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항구도시에서 항구가 폐쇄되면 타격이 클 테니.’
그런데 정말 바다에서 짠 냄새가 나는구나. 마냥 상쾌하지만은 않고, 묘하게 비릿하고 끈적한 냄새였다. 내가 코끝을 씰룩이고 있으니, 칼리마가 바다 쪽을 가리키며 소개해 주었다.
“여기 해수가 아주 건강에 좋다고 소문이 나서 수영장과 목욕탕도 발달했답니다. 나중에 한번 가 보세요.”
“딱 휴양 도시 느낌이네요.”
따뜻하고, 수도의 소식이 느릿하게 전달될 정도로 먼 데다, 건강에 좋은 물에 몸을 마음껏 담글 수 있다.
‘수영장이라.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는 본 적이 없는데.’
칼리마가 설명한, 해수로 채워진 수영장과 목욕탕의 모습이 머릿속에 바로 그려지지 않았다. 목욕탕은 수도에도 있긴 하지만,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칼리마가 물었다.
“마님께선 수영은 잘하시나요?”
“아뇨.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영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요?”
“수도가…… 좀 그렇긴 하지요.”
해안가 도시가 아니고서는 도시 사람들이 수영할 수 있는 곳은 강이나 호수뿐. 하지만 수도의 강은 너무나 크고 물살이 세찬 데다가, 잊을 만하면 시체가 떠내려와서 거기에 배를 띄우는 사람은 있어도 수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때마침 말을 부관에게 건넨 세루리안이 내 곁에 와 섰다. 나는 세루리안에게 물었다.
“당신은 수영 잘해요?”
뜬금없는 물음에도, 세루리안은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몸으로 하는 건 대부분 잘하는 편입니다.”
“지난번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시긴 했죠.”
그런데 굳이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한다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있나. 아니면 그걸 듣고 이상한 생각을 하는 내가 쓰레기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칼리마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진짜 그렇기는 해요, 마님. 단장님께서 처음 수영 배운다고 할 때 얼마나 얄미웠다고요.”
“얄미웠다고요?”
“하도 표정이 없으니 당황한 얼굴이라도 보자며 사관학교 선배들이 물에 빠뜨렸었거든요. 수영을 처음 해 본다는 말을 듣고요.”
“세상에, 그거 위험한 거 아닌가요?”
자칫하면 세루리안이 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게 어려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세루리안을 돌아보았다. 세루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문제 될 건 없었습니다. 수영 이론은 확실하게 습득하고 있었으니까요.”
“네?”
이건 또 무슨 대답이란 말인가. 도무지 맥락을 이해할 수 없어서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칼리마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분이라니까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이론대로 몇 번 발차기를 하시더니 금세 수영을 하더라고요. 등을 떠민 사람들만 무안해졌지요.”
“다행이에요. 세루리안이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큰일이 났을 거라고요.”
내 말에 세루리안은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떤 상황이든 냉철한 이성만 지니고 있으면 사고는 쉽게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이 그렇게 냉철할 수가 없다고요.”
“……?”
살짝 입술 끝을 깨문 얼굴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 있다는 건 들어서 알지만, 역시 이해는 못 하겠다는 표정이네.’
어쩌겠나. 상대는 감정도 내 얼굴을 관찰하면서 배워 가는 중인데.
나는 세루리안의 손에 깍지를 끼어 꽉 잡았다.
“좋아요! 정 이해가 되지 않으면 저라고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내 말에 세루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접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칼리마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서, 설마 단장님, 지금 웃은 거예요? 웃었죠!”
세루리안은 금세 다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칼리마가 몇 번이고 소맷부리로 자신의 눈을 문지르는 걸 보며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 * *
남부를 향해 부지런히 말을 타고 가다가 잠시 쉬는 길.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이 시기에 남부라니. 베로니카 부인은 뭣도 모르면서 말만 하면 다인 줄 아나 봐.”
“그러니까. 해가 지면 이동도 못 하고, 쉬어 갈 마을이 많은 것도 아니고.”
물통을 넘겨받은 사내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베로니카 부인으로부터 에델 루크를 해치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잠시 목을 축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선금도 꽤 많이 받았는데 이대로 튀어 버릴까? 어차피 쫓아오지도 못할 거 아니야. 그 여자도 이제 끈 떨어진 신세 같던데.”
“그래도…….”
잠시 대화하던 사내가 토끼처럼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 무슨 소리 안 들려?”
“소리는 무슨. 아직 해가 중천이거든?”
“아니, 그래도.”
뭔가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이쪽에서…….
그 순간 긴 비명이 숲을 울렸다.
“으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