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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91)화 (91/138)

세루리안의 과거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 참혹함에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건…….”

무어라 위로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좀처럼 적절한 말을 고르지 못해 한참을 헤매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위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지난 일이고, 제게는 아무 느낌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도 기억납니다. 처음 뵈었던 각하의 모습이. 제가 정말 감정이 없는지 확인하셨었죠.”

세루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루크 공작의 것처럼 짙게 물들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세루리안이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각하께서는 최소한의 책임감과 필요로 저를 거두신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처음 기대했던 인정이 없는 게 당연하지요.”

“필요는 알겠어요. 그런데 책임감은 왜요?”

“…….”

내 물음에 세루리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그가 입을 다물 때는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왜 대답할 수 없는 걸까. 당황한 내 머릿속에 뜻밖의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찰스가 먹은 약과 비슷하잖아.’

감정이 사라지고 무감각해지는 증상. 내 눈으로 직접 본 찰스의 상태와 같았다.

‘설마 같은 약인가? 하지만 찰스가 먹은 약의 제조법은 공작님 개인 서재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었잖아. 세루리안의 가족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을 리가 없는데.’

정말 같은 약인가. 만일 같은 약이라면 그냥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밀려드는 상념에 눈을 찌푸렸을 때였다. 생각의 진행을 자르듯 세루리안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하여간,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수도로 돌아가십시오.”

“네? 이제야 만났는데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두운 마차 안이었지만, 워낙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세루리안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세루리안은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을 때까지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요? 이겨 낼 수 있는 거긴 한가요?”

“저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 물음에 세루리안은 당황한 듯 말문을 흐렸다.

‘그래서 공작님이 평생 안 온다고 했구나!’

가능할 리가 없지! 두려움은 인간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감정이니 말이다. 나는 세루리안의 손을 꽉 붙들었다.

“애초에 두려움은 우리에게 필요한 감정이에요, 세루리안.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중에 불필요한 것은 없다고요.”

“하지만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 로어와 싸울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반문했다.

“당신은 정말로 나를 완벽히 지키길 원하나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수도로 가는 길에 제가 다치면 어떻게 해요? 산적을 만나거나, 마차가 전복될 수도 있잖아요.”

“그건…….”

반박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세루리안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사고라는 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만나는 것 또한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고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애초에 그가 나를 완벽하게 지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루리안은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세루리안.”

가늘게 떨리는 그의 팔에서 그가 가진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그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의 팔이 베이고 피가 솟구치는 것을 보며 자칫하면 팔이 잘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 아찔했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무작정 떨어져 있는 것이 정말 나를 보호하는 길일까.

“내 곁에 있으면 당신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했지요?”

세루리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손을 붙들었다.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건 결국 다른 감정들도 사라진다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저는 거기에 찬성할 수 없어요.”

“에델.”

“두렵더라도, 부족하더라도, 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당신을 원해요.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요?”

그는 두려움을 가지고 로어를 마주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세루리안은 그저 로어 사냥꾼인 세루리안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완벽한 해답은 없어요. 그러니 지금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고요.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거예요. 제게서 멀어지려고 하지 말아요.”

“에델.”

세루리안이 반박할 것 같아서, 나는 입술로 그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 * *

마차 안에서 편안하게 자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세루리안이 있어서인지 오늘은 마음을 푹 놓고 잘 수 있었다. 잘 때는 분명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있었는데 눈을 떠 보니 그의 다리 위에 앉아서 그의 품에 폭 안겨 있었다.

“어머나.”

설마 밤새 이러고 있었나. 나는 얼른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얼굴을 붉혔다.

“힘들었을 텐데. 왜 이렇게 안고 있었어요?”

“새벽에 당신이 추워 보여서요.”

“그래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세루리안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세루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허탈한 목소리였다.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당신 곁에서 잠시 떠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물러난 것인데, 막상 당신 얼굴을 보고 나니 어떻게 떠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으아앗!”

부끄러움을 모르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여전했다. 나는 세루리안의 입을 두 손바닥으로 막았다. 푸른 눈이 재미있다는 듯이 휘어졌다.

그가 손바닥을 치워 달라는 듯이 검지로 톡톡 손등을 건드렸다. 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다가 천천히 손바닥을 내렸다. 그가 내 허리를 힘주어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제 당신이 말한 대로 해 볼까요?”

“제,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지금 순간에 충실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줄이 되어 나를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떨렸다.

“눈을 감아 주시죠.”

새끼 사슴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세루리안이 속삭였다.

“착하네요.”

어쩐지 웃음기가 어린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 신경이 다 타 버리는 것 같았으니까.

* * *

긴긴 입맞춤을 끝내고 마차 밖으로 나왔더니, 주변을 둘러보던 칼리마가 긴 팔을 붕붕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마님.”

칼리마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세루리안에게 시달려서 심장이 너덜너덜해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칼리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더 활기가 넘치네요.”

칼리마는 내 말에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손뼉을 쳤다.

“그러니까요! 역시 이곳이 원래 제 자리구나 싶어요.”

칼리마의 말에 근처에 무질서하게 앉아 있던 기사들이 맞장구를 쳤다.

“말만 그렇게 하지 마시고 복귀하시죠.”

“칼리마 경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칼리마를 향한 두터운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말에 칼리마는 팔짱을 끼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 우리 아버지에게도 해 주세요.”

포텐샤 공작이 언급되자 다들 꼬리를 내렸다.

“그건 무립니다.”

“포텐샤 공작님의 딸 사랑은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런 유의 농담을 주고받은 것이 그간 적지 않았는지, 칼리마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옆얼굴을 보고 있는 내 마음은 쓰라렸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지내면 좋을 텐데.’

겉으로야 밝게 웃고 있지만, 속은 얼마나 답답하겠나.

‘포텐샤 공작님께서도 칼리마의 저런 집념까지는 모르시니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 아닐까.’

수도에 가면 꼭 포텐샤 공작님을 만나 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칼리마와 대화를 하고 있으니, 곧이어 마차에서 나온 세루리안이 등 뒤에 섰다.

나는 칼리마가 건네는 물컵을 세루리안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일단 남부의 거점인 헤이스팅스 성으로 가려고 합니다.”

지금껏 가 볼 일 없었던 낯선 지명이었다. 나는 찬물을 마시는 세루리안을 장난스럽게 쿡 찔러 보았다.

“저를 수도로 쫓으시는 건 포기하신 거예요?”

“지금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으니까요.”

세루리안은 빈 잔을 다시 칼리마에게 휙 던지며 대답했다.

“하지만 기사단 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당신을 성에 데려다 드린 뒤, 남은 일정을 소화하려고 합니다.”

“좋은 생각이네요. 저, 사실 남부는 처음 와봐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수도에 사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남부에는 마물이 서식하고 있어 몇몇 마을을 제외하고는 여행지로 삼기에도 어려웠다.

‘기자로서도 좋은 경험인 거 같아.’

세루리안이 일할 때 나는 남부에서 뭘 하면 좋을까. 마물이 번식할 시기라고 하니 자유롭게 다니진 못해도 성 주변이나 도시 내에서는 제약이 없을 터였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칼리마가 살갑게 말을 붙였다.

“헤이스팅스는 맥주가 특산물이에요. 아마 마님도 크게 만족하실 거예요.”

“……제가 술을 좋아한다고 칼리마에게 말한 적이 있던가요?”

칼리마의 말에 나는 뜨끔하고 말았다.

세루리안을 만난 뒤로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 내가 애주가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칼리마는 시원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집에 커다란 맥주잔이 여러 개 있던걸요. 같은 것이 여러 개 있는 걸 보고 일부러 수집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이렇게 쌓였다는 사실을 눈치챘죠.”

“아니, 언제 그런 것까지 눈여겨보신 거예요?”

우리 집 그릇 사정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단 말인가. 달걀프라이도 못하면서!

내가 깜짝 놀라자, 칼리마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 정보는 마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나름대로 잘 감추고 있었는데.”

숨겨 둔 비밀을 들킨 기분이 들어 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칼리마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이참에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바람에 귀중한 명주들의 무덤이 된 루크 공작가의 와인 저장실을 점령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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