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연스럽게 세루리안과 함께 남부로 내려온 특수부 기사단과 합류했다.
기사들은 한때 동료였던 칼리마를 두 팔 벌려서 환영해 주었다.
“여기서 칼리마 경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깔끔한 궤적이라니. 은퇴하셨어도 실력은 여전하시군요!”
“어이, 땅꼬마.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어째 키가 조금도 자라지 않았냐.”
그녀를 환영하는 소리는 가지각색이었다. 칼리마는 그들에게 하나하나 응답해 주었다. 그녀가 지긋지긋하다고 했던 ‘땅꼬마’ 같은 놀림에는, 그렇게 말한 기사의 복부에 보디블로를 꽂아 넣는 것으로 해결했다.
‘기사 시절의 칼리마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신기한 눈으로 북적이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오래 엿들을 수는 없었다. 세루리안이 곧장 내 손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잠시만요, 에델.”
세루리안이 여자 손목을 잡는 모습을 본 기사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웅성거렸다.
“단장님? 그분은 누구십니까?”
“설마……!”
하지만 세루리안이 걸음의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끌려가듯 급히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기사들하고 이야기해 보고 싶은데! 앞으로도 기회가 있겠지?’
일단은 세루리안과 이야기를 하는 게 먼저였다.
다른 기사들이 엿듣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숲속에 와서야 세루리안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마주했다.
나는 잠시 숨을 참았다. 심장이 쿵쿵 울려 어지러웠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두려움이 아니라, 그를 다시 만난 설렘 때문이었다.
‘신기해.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어두워서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세루리안과 함께 있으니 조금도 무섭지 않아.’
내 안에서 세루리안이 어떤 의미인지,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었다. 한편 세루리안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 있는 겁니까, 에델?”
“당신을 데리러 왔어요.”
“저를요?”
세루리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만나게 된 기쁨도 잠시, 그 태연자약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다시 속이 뒤집어졌다. 나는 따져 물었다.
“어째서 남부로 가 버린 거예요! 저한테 말도 없이.”
내 말에 세루리안의 미간은 더더욱 찌푸려졌다. 그는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몇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곧 남부에 가야 한다고요.”
“하지만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는 하지 않으셨잖아요!”
“예?”
시치미 떼는 표정을 보니 감정이 북받쳤다. 나는 울먹거리며 쌓였던 이야기를 쏟아 냈다.
“게다가 친자 입적과 혼인무효라니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중요한 사안을 마음대로 정하다니.”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서러움이 세루리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폭발했다.
‘너무해.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하고 인사도 없이 떠나 버리다니.’
너무나 급박하게 움직여서 자각하지 못했을 뿐, 사실 그 행동은 내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런데 막상 이 남자를 마주하니 화를 못 내겠어.’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좋기도 하고 서럽기도 한 감정에 내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우물거릴 때였다.
내 말을 들은 세루리안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에델, 혼인무효를 청했습니까?”
“저 말고 당신이 그렇게 해 두고 갔다면서요!”
내가 혼인무효를 청할 리가 없잖아!
답답해진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내 말에 눈을 깜빡거리던 세루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먼저 원하다니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네에?”
그의 확고한 대답에 오히려 당황하게 된 쪽은 나였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세루리안의 얼굴만 바라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왜 친자 입적 신청서를 남겨 두고 갔는데요?”
“에델이 각하의 친자이니 당연히 친자로 입적해야지요.”
“그러면 당신과 제가 남매가 되어서 자연히 혼인무효가 되잖아요!”
“절 먼저 파양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그 말이야 맞지만, 분명히 공작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세루리안이 혼인무효를 원해서 친자 입적을 하라고 했다고 했단 말이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다시금 그의 말을 확인했다.
“그럼 여기 오신 것에 다른 이유는 없는 거예요? 그저 임무 때문에? 저랑 파혼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물론, 각하께 남부에 체류하는 기간이 길 거라고는 미리 말씀드리고 왔습니다. 그 기간이 미정이었지만…….”
꼬인 부분이 그 부분인가! 나는 세루리안의 대답을 채근했다.
“평소에는 한 달 정도 체류한다면서요. 이번에는 왜 갑자기 체류 기간이 길어진 건데요?”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루리안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두려움도, 공포도 이겨 낼 시간이 말입니다. 그런 감정을 안고서는 로어와 마주할 수 없으니까요.”
“마음을 추스르려고 했다고요?”
“예.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요.”
“아.”
결국 그의 마음도 내 곁을 향해 있다는 소리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에델?”
휘청거리는 나를 세루리안이 두 손으로 붙들었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시선이 흔들렸다. 나는 흐물흐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우리 사이가 완전히 끝난 줄 알았어요! 당신이 저로부터 도망치는 줄 알았다고요.”
“제가 당신을 두고 완전히 남부로 내려온 줄 아셨습니까?”
“그야 공작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세루리안이 떠났다고 하는데 다르게 생각할 재간이 있나. 기쁨과 허탈, 다음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수도에서 혼자 느긋하게 지내고 있을 루크 공작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야 알겠네요. 모두 공작님의 심술이었어요. 정말,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는 분이로군요!”
나와 세루리안의 애정을 시험한 것이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시험할 수 있어? 그것도 그렇게 진지하게! 깜빡 속아 버렸잖아!’
부글거리는 나와 달리, 세루리안은 루크 공작에게 너그러웠다. 세루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심술이라기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말씀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두려움을 이길 때까지 남부에 있겠다고 했고, 그사이 에델의 친자 입적도 진행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으니까요.”
“두려움을 이기는 데 평생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셨다?”
“그러셨을 수도 있지요. 두려움을 느끼는 저는 필요 없다고 대놓고 말씀하시던 분이니.”
두려움을 느끼는 세루리안은 필요 없다니! 그렇게 심한 말도 했단 말인가.
‘공작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안 되겠네!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한 거 취소야, 취소!’
내가 씩씩거리고 있을 때였다. 세루리안이 부드럽게 휘어진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저를 붙잡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와 주신 겁니까, 에델?”
“그렇죠! 만약 속사정을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급하게 달려오지는……!”
“기쁘군요.”
발끈해서 속내를 털어놓던 나는 세루리안의 대꾸에 얼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대답이 없는 내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건지, 세루리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당신이 저를 이토록 깊이 생각해 주었다니 무척 기쁩니다.”
“그…….”
그의 진심을 전해 들은 내 얼굴에 설렘이 파도처럼 번져 갔다. 손가락이, 손바닥이, 그리고 목덜미에서 얼굴까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런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세루리안이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동안은 기쁨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누군가가 기쁘다고 말을 해도 그저 제 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알겠습니다. 마음을 쥐어짜는 것 같은데,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기분, 이것이 기쁨이군요.”
사랑을 모르는 남자가, 담담히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는 건, 어떤 격정적인 고백보다도 더 격렬한 애정 표현으로 들렸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고 싶습니다.”
“아, 진짜!”
결국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내가 그에게 바락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런 말을 할 때는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해 주세요! 당신이 너무 담담하니까 듣고 있는 제가 부끄럽잖아요.”
“사랑합니다, 에델.”
세루리안은 내가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의 고백을 이어 나갔다. 그의 입술이 옅지만 분명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숨겨진 보물처럼 그동안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의 미소였다.
“당신에게 진심으로 이리 고백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으으…….”
이 남자는 알까. 그가 갑자기 남부로 떠나 버렸다는 말에, 내 마음이 얼마나 쥐어짜듯이 아팠는지. 다시 만나도 그가 나를 거부할까 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불안하고 또 불안한데도, 그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를 만나러 이곳까지 달려온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까?
하지만 그처럼 내 마음을 그린 듯이 설명할 수가 없어서, 나는 겨우겨우 목이 메는 소리로 이렇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도 사랑해요, 세루리안.”
그가 긴 팔을 뻗어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게 울렸다. 나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소리였다.
그의 품에 안겨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정말 여기가 어두운 숲이라서 다행이다.’
환한 햇살 아래서 그의 얼굴을 마주했으면 내 심장은 터져 버렸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