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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87)화 (87/138)

그의 밤은 항상 악몽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헤어진 그녀의 뒤를 덮치는 로어, 그리고 그녀가 로어가 되어서 그를 덮치는 꿈.

오늘도 식은땀을 흘리면서 일어난 루크 공작은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죗값을 치르는 거다. 나 같은 존재가 행복해지려고 했기 때문에.’

자고 일어났음에도 눈은 뻑뻑하고 여전히 피곤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감정을 사라지게 하는 약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딴 것과 연관되는 바람에…….’

루크 공작은 먼 옛날, 자신이 아직 공작 위를 물려받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약은 본래 루크 공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강력한 효과를 보였던 적은 없었다. 한때 포텐샤 공작가가 루크 공작가보다 마물 사냥꾼으로 이름과 명예가 높았고, 열등감을 견디지 못한 선대 공작이 찾아낸 것이 바로 그 약이었다.

“내가 공작이 되면 저것부터 없애 버릴 거야. 저런 끔찍한 약 따위.”

루크 공자로 불리던 시절, 루크 공작은 그 약을 혐오했다. 마시는 순간 혀가 뻣뻣해지며 머리가 둔해지고 감각이 사라져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다지만, 상처의 아픔 또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주저 없이 전장에서 목숨을 걸었다. 그의 형 또한 그런 이유로 죽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젊은 공작이 되었을 때, 황제는 그를 불렀다.

“루크 공작가 안에서만 은밀히 사용되는 약이 있다지? 제법 효능이 뛰어나다고 들었네만.”

그것을 폐기할 생각이었던 루크 공작은 얼굴을 굳혔다.

“엄청난 효능을 가진 건 아닙니다. 마물을 상대할 때 일시적으로 두려움을 가시게 만드는 안정제인 셈이죠.”

“오, 그거야말로 짐이 바라던 것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황제를 만들 수 있겠구나. 짐의 명령이면 두려움 없이 달려드는 군대도 만들 수 있고.”

“폐하께서 원하시는 효과를 얻기에는 미흡합니다.”

하지만 황제는 그것을 손에 넣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뒤였다. 아무리 루크 공작이 만류해도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개량을 거치면 효능도 점차 강해지겠지. 발견이 어려운 것이지 효과를 개량하는 게 어렵겠나.”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잔말 말고 그 약이나 내놓으시게. 정당한 값을 치를 테니. 루크 영지의 구리 광산 개발 허가권은 어떤가? 안 그래도 영지 사정이 좋지 않을 텐데.”

그 달콤한 회유에 루크 공작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루크 공작가의 영지는 매우 척박한 토양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유용한 자원이 묻혀 있었지만, 광산 개발은 황제의 엄격한 통제하에 이루어졌고 자칫하면 반역죄로도 몰릴 수 있는 부분이라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 채굴권만 있으면 영지민들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추운 겨울에 더 이상 배를 곯지 않아도 되고.’

그에게는 영지민의 안위 또한 중요한 문제였다. 그가 그것들을 저울질하며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상황제가 웃으면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수년간 복용해도 아무 이상 없었던 자네가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그것이 바로 비극의 시작이었다.

* * *

나는 마차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며칠을 달렸지만, 보이는 풍경은 변화가 없었다. 풀, 돌, 나무, 나무, 나무.

내가 밖을 내다보는 사이, 칼리마는 옷을 짧은 소매로 갈아입었다. 탄력적이고도 볼륨 있는 몸에 가벼운 옷을 착용하니 무척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부가 그렇게 더운가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겨울 대신 서늘한 가을이 긴 정도? 여름은 수도랑 비슷하겠네요.”

“그럼 벌레가 많겠네요.”

“아주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날씨가 계속 온화하면 아무래도 벌레들이 빨리 자라고 죽지도 않으니 말이다. 내 말에 칼리마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그래서 남부를 싫어해요! 해마다 가는 원정도 정말 싫었어요. 마물을 사냥하러 가는 거니 아무래도 숲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 많은데, 자고 일어나면 모포에 벌레들이 우글우글…….”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칼리마의 설명이 더 구체적으로 바뀌기 전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내 인사에 칼리마는 깔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휴, 우리 단장님이 이혼당하게 생겼는데 아무리 싫어도 와야지요.”

그 말에는 나도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도망친 건 세루리안이고, 뒤쫓고 있는 건 나란 말이지.

“이혼당하는 건가요? 느낌상 제가 매달리는 거 같은데.”

“단장님은 정말 마님을 엄청 좋아하고 있다니까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다 제 말대로 되었지요?”

“그, 그거야.”

나도 세루리안의 마음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이나, 그의 눈빛을 보면 모를 수가 없는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칼리마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마님은 단장님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그…….”

세루리안의 어떤 점이 좋았냐고? 세루리안은 언제 어느 때나 멋있지만 역시 그가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는.

“딱딱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야한 말을 하는 거요.”

“오…….”

수치심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 세루리안은 최고로 섹시했다.

내가 그때를 떠올리며 뺨을 붉히고 있으니, 칼리마가 슬쩍 반대편 옆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 아닌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툴툴거렸다.

“저기요? 물어봐 놓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지 말아 주실래요?”

“그저 마님과 거리를 두고 싶은 기분이랄까요.”

“그러지 말아 달라고요!”

솔직하게 대답했더니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구나!

나랑 칼리마가 마차 안에서 까르르거리며 동성 친구들과 그러듯 장난을 치고 있을 때였다. 호위를 위해 따라온 기사가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물었다.

“잠시 쉬었다가 갈까요?”

“좋아요!”

마차도 지겹던 차였다. 나와 칼리마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많은 인원이 이동하기는 무리가 있어서, 우리는 식사를 하러 단출하게 출발했다. 마차를 모는 마부, 우리 식사를 챙길 시종, 그리고 호위 기사 둘이었다. 호위를 더 데려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칼리마가 씩씩하게 거절했다.

“제가 40 대 1로 싸워서 이긴 전설의 주인공이랍니다. 저만 믿으세요.”

“와아.”

칼리마가 싸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저토록 자신만만한 걸 보면 뛰어난 실력을 지닌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왜 포텐샤 공작은 덮어두고 칼리마가 기사가 되는 걸 반대만 하셨을까. 굳이 로어 사냥꾼이 아니더라도 잘해 나갔을 것 같은데.’

그리고 기사로서의 실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칼리마에게는 뛰어난 사교성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집단에서는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식사는 간단한 채소 수프였다. 이렇게 마차를 타고 이동할 때에는 식자재를 다양하게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잘 말린 육포를 씹고 있으니, 나보다 먼저 그릇을 비운 칼리마가 신신당부를 했다.

“여기서부터는 남부 지역이고, 마물이 곧잘 출몰하니까 마님께서도 늘 조심하셔야 해요. 갑자기 튀어나오면 대응하기 어렵거든요.”

“절대로 혼자 움직이지 않을게요.”

“마님은 똑똑해서 좋아요. 맞아요. 바로 그것이 핵심입니다.”

내가 싸워서 이길 수는 없어도, 늘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일행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겠지. 나는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마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마을이 나와요. 오늘은 거기 머무를 거에요. 그러니 조금만 더 마차를 탑시다.”

“에잉…….”

그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슬퍼졌다. 마차 싫어!

‘그래도 마차보단 마을에서 자는 게 낫겠지.’

꾹 참고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금방 식사를 마쳐서인지 나른해지면서 잠이 몰려왔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은 자면서 보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어째 마차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마차가 멈춰 있었고, 칼리마는 창밖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뻑뻑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면서 물었다.

“칼리마, 왜 그래요? 도착했어요?”

“쉿. 잠시만요.”

기사 몇이 정찰을 떠났는지, 병사들이 대열이 흐트러진 채로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우리가 묵기로 한 마을이 보였다. 칼리마가 내게 속삭였다.

“마을엔 도착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해요.”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서 하늘이 엷은 주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을은 조용했고, 불이 켜진 곳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으니 불을 켜지 않는 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저녁인데 연기가 하나도 피어오르지 않네요?”

내 지적에 칼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시간에 뛰어놀아야 하는 동네 아이들도, 그 아이들을 찾아다니는 가족들도 보이지 않아요. 지금 10분 넘게 대기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말은…….”

겉으로 보기에 마을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부서진 집도 없었고, 무너진 담도 없었다. 그저 사람만 조용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말이다.

‘도대체 어딜 간 거지?’

이런 일이 발생할 만한 원인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물.’

사실 수도에서 생활하면서 두려운 마물은 로어뿐이었다. 그 외의 마물들은 수도의 성벽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마을을 보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마물이 언제 어디서든 덮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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