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끝나고, 저택에 돌아와서야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침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그저 두려움에 떨면서 바네린느의 행복을 보며 괴로워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그녀의 몰락을 지켜보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사형이 아니라 유배니까 언젠가 풀려날 수도 있겠지. 그렇다 해도 이전처럼 사람을 휘두를 수는 없겠지.’
그녀의 악행을 세상에 까발리고, 더 늘어났을지도 모를 피해자를 막았다는 점에서 충분한 복수를 한 셈이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너무 많이 긴장했는지,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가물 잠이 밀려왔다.
얕은 잠 속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내 주변을 서성거리는 듯하더니,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조심스럽게 내 뺨을 쓸어내렸다.
‘아, 세루리안이구나.’
잠결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고양이처럼 그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그는 화들짝 놀라면서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아, 놀리고 싶은데.’
부끄럽냐고, 왜 도망치냐고.
‘그런데 너무 졸려.’
까무룩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하녀가 침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작은 마님, 식사 시간입니다.”
돌아올 때는 낮이었는데 벌써 밖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하녀의 도움을 받아, 머리와 매무새를 정돈하고 식당으로 향하면서 나는 칼리마를 떠올렸다.
‘보통 이럴 때는 칼리마가 나를 데려갔는데.’
그동안 내 곁에 칼리마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가 늘 이것저것을 알려 주었기 때문에 바네린느가 루크 공작가 안에서는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결혼식 때도 그렇고, 칼리마가 아니었다면 바네린느의 공격을 받아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칼리마에게 감사해야겠어.’
그리고 세루리안에게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에게 진심을 다해 감사를 표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니, 어느새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식당 상석에는 루크 공작이 앉아 있었다.
“왔느냐.”
“네.”
친자 확인 후, 처음 함께하는 식사 자리였다. 나는 어색함을 느끼며 늘 앉던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런데 집사가 루크 공작의 바로 옆자리 의자를 빼내었다. 바로 차석, 세루리안의 자리였다.
그러고 보니 식기도 나와 공작의 것, 두 벌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 세루리안은요?”
오늘 세루리안은 함께 식사하지 않는 건가.
‘아버지와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라고 배려해 주는 거라면 사양하고 싶은데 말이다.’
기껏해야 그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루크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세루리안은 남부로 떠났다.”
“네? 제게 말도 없이요?”
바로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내 곁에 있었는데, 내 손을 잡아 주면서 힘내라고 응원을 해 줬는데 남부로 떠나다니.
‘급한 일이라고는 했는데, 그 정도였나.’
그가 간단히라도 말해 주지 않았다면 서운할 뻔했다. 나는 잠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대답했다.
“빨리 돌아오면 좋겠네요.”
그 목소리에는 애정과 설렘이 담뿍 담겨 있어서 스스로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루크 공작이 또다시 폭탄 발언을 던졌다.
“네 친자 입적 신청 서류를 준비해 두고 갔더구나.”
“네?”
친자 입적.
물론, 이 남자와 혈연관계라는 게 교황 예하의 보증까지 받아서 밝혀졌으니 마땅히 친자로 입적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당장 그렇게 하기에는 지금 관계가 너무 복잡했다.
나는 세루리안과 혼인 상태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 저와 세루리안은 남매가 되는걸요. 그럼 그를 다시 파양해야 하고…… 서류 처리가 복잡해지지 않겠어요?”
어차피 내가 이 사람의 딸이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아는데 굳이 친자 입적이니 파양이니 복잡한 절차를 거칠 필요가 뭐가 있나.
하지만 세루리안의 목적은 그저 내가 친딸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었다.
“혼인을 무효화하겠다는 의도다.”
루크 공작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나는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며 루크 공작은 남 이야기하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는 수도로 돌아오지 않겠다더구나.”
“……네?”
망치로 맞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잠시 그가 했던 행동을 되새겨 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설마 세루리안이 제 친자 확인에 유난히 적극적으로 나섰던 이유가…….”
“그런 것 같다.”
세루리안은 교황이 친자 확인 검사를 할 때 그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굳이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나와 루크 공작의 친자 관계를 알린 것이 말이다.
‘모두 이렇게 떠나기 위해서였나?’
하지만 이유와 행동을 알게 되어도 납득은 되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되물었다.
“어째서요?”
내 물음에 루크 공작의 굵은 눈썹이 휘어졌다. 나는 재차 물었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 거죠?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아요.”
며칠 전만 해도 벗기기 어려운 드레스를 입으라 당부할 정도로 내게 애정을 드러냈던 그였다.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기에는 그간 좋았던 날들이 제법 길었다.
“너를 만나고 두려움이 생겼다더구나. 그건 로어 사냥꾼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지.”
뜻밖의 말이었다. 공작은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너는 짚이는 게 없느냐?”
두려움. 나로 인해서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고?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 단 한 가지 내 머릿속을 메우는 것은…….
‘나는 그가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는데.’
결국 나는 그에게 어떤 존재였던 걸까.
‘대화가 필요한데.’
막상 상대는 멀리 떠났으니 답답함만 더 깊이 쌓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납득할 수 없어요.”
“……뭐?”
“그 사람이 저로 인해 두려움이란 감정만 느끼게 된 건 아닐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나는 그가 있었기 때문에 힘을 낼 수 있었고, 평생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다.
그런 힘을 나도 그에게 전할 수 있지 않을까?
“로어는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물리칠 수 없는 마물이다. ‘왜’라는 의문은 의미가 없다. 두려움을 가진 자는 절대로 이길 수 없으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루크 공작님이 단호한 어조로 내 생각을 부정했다.
“그러니까 그 아이는, 자신이 더는 로어 사냥꾼은 물론이고, 루크 공작가의 후계로서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떠난 것이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 * *
식사를 어떻게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대로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어이없어.’
아무리 다시 생각해 보려 해도 그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몸을 빙글 돌렸다.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이게 뭐야! 무슨 내 손을 아버지에게 쥐여 주고 떠나는 사람처럼! 설마 계속 떠날 생각을 했던 거야? 그래서 내게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준 거냐고.’
씩씩거리던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세루리안이 없는 침대는 너무 넓었고, 그곳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추억이 쌓여 있었다.
이불에 파묻혀 눈을 감으니, 벨벳처럼 부드러웠던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당신에 대한 건 뭐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정하게 말했으면서, 지지 말라는 듯이 내 손을 잡아 줬으면서.
“제대로 말은 해 주고 가야지…….”
어떻게 끝이 이 모양일 수 있단 말인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하녀를 불러 물었다.
“칼리마는 어디 있지?”
역시 이대로는 분을 삭이지 못하겠다. 어딘가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다.
나는 내 말을 제일 잘 들어줄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하녀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포텐샤 영애라면 잠시 본가로 돌아가셨습니다.”
“뭐?”
하긴, 바네린느의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칼리마도 잠시 집에 돌아갔겠지. 아니, 오히려 그동안은 지나치게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왜 하필 오늘일까.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시 침대에 누워서 비슬거리고 있기를 한참.
똑똑, 문이 울렸다. 하녀인 줄 알고 누운 채로 들어오라고 대답했더니, 방을 찾은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잠깐 서재로 오겠느냐?”
바로 루크 공작이었다.
* * *
그는 서재에서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자료들을 꺼냈다.
“이게 네 엄마다.”
나는 조심스레 모퉁이가 해진 초상화를 어루만졌다. 내가 알지 못하는 젊은 날의 엄마가 그 자리에 있었다.
“엄마는, 그때도 똑같았네요. 쇼트커트에, 날씬한 허리까지.”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루크 공작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표정도 없었지만, 어쩐지 그리움을 담고 있는 듯했다.
“엄마와는 어떻게 처음 만났어요?”
귀족인 데다가 사교성도 없는 그와, 가난한 고아였던 엄마가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했다.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루크 공작은 말하기 싫다는 듯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로어를 쫓다가, 그녀가 운영하던 꽃집 화분을 쓰러뜨렸다.”
두 사람의 로맨스는 그야말로 정석적이었다.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하는.
“무거우니까 들어 달라고 하더군.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붙이는 사람을 처음 보아서 깜짝 놀랐었지.”
그렇게나 말하기 싫어하더니, 막상 추억을 털어놓는 루크 공작의 얼굴은 몹시 부드러웠다. 턱을 괴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세루리안 때문에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울적했지만 엄마의 과거를 들으니 마음이 따듯해진 탓이었다.
“엄마는 제게 아빠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았어요. 어쩌다가 할 때면 죄다 욕…….”
“쿨럭! 쿨럭!”
루크 공작은 격하게 기침을 했다.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