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 공작의 딸이라는 게 밝혀졌는데도 어찌 저리 시종일관 무심할 수 있는지.
‘진짜 친아빠 맞아?’
불퉁거리는 입을 톡 때려 주고 싶었다. 나대로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대치 아닌 대치를 하고 있으니 문득 유독 루크 공작답지 않게 어색했던 순간의 기억이 하나둘 솟아났다.
“아니, 그럼 갑자기 옷을 사 준다고 끌고 갔던 건…….”
뜬금없이 의상실에 데려가서 옷을 입히더니 시시하다며 두고 떠나 버렸던 날이 떠올랐다.
그 부분을 지적하자, 루크 공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엄마가 노란색을 좋아한다.”
그 말이 사실이긴 했다. 엄마는 정말 노란색을 좋아해서 집안 여기저기를 노란 꽃과 장식으로 꾸미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나를 낳기도 전에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럼, 공원에 함께 앉았던 것도요?”
“네 엄마와 그곳에서 자주 데이트를 했지.”
그렇게 대답한 남자의 나무토막 같은 입술에 웃음인지 뭔지 모를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독특한 여자였지.”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니 나는 조금 서글퍼졌다.
세루리안과 혼인을 하기로 한 이래, 나는 단 한 번도 루크 공작의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다른 가십지에도 그에 대한 언급은 모두 같았다.
웃지 않는 사람, 미소를 모르는 사람, 감정이 메마른 사람.
그런 사람이 까마득한 과거를 떠올리며 미소 비스무레한 것을 짓고 있었다.
‘과거 일에 관해서만 웃을 수 있다는 건가.’
그럼 저 사람은 엄마와 헤어진 뒤로도 계속 과거 속에서 살아왔다는 소리 아닌가.
어째서 스스로를 그렇게 괴롭히며 살아야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 왜 한 번도 엄마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내 물음에 루크 공작이 메마른 눈을 들어서 나를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감정의 자취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마치, 짧은 꿈에서 깨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계속 그리워할 거라면 그냥 와서 만나면 되었잖아요. 제가 태어났다는 건 알고 계셨어요?”
“알고 있었다. 네가 생기는 바람에 헤어졌으니.”
“저 때문이라고요?”
“그래.”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듯,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멍해져 있는 내게, 루크 공작이 쓴 소태를 베어 문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 진저리가 나더구나.”
“……!”
내 친아빠가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엄마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날 홀로 키운 엄마가 그만큼의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면전에서 너는 필요 없는 아이였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는 내 탄생을 외면하고 이제는 내 출생을 비난하는 것으로 나를 두 번 죽이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져 있을 때였다.
그때 세루리안이 내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고 루크 공작에게 화를 내듯 소리쳤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마음을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각하. 정말 귀찮고 싫었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나 그답지 않은 말이라, 심장이 서늘한 상황에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루리안은 곧게 루크 공작을 응시했다.
“명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각하의 말씀에 에델은 상처받습니다.”
루크 공작은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도대체 어떻게 말하라는 거지?”
공작은 꼭 반항하는 아이 같았다. 그 태도에 화가 치민 내가 발끈했을 때였다. 세루리안이 사무적인 어조로 핵심을 찔렀다.
“가벼운 만남이었을 뿐인데 갑자기 아이가 생겨서 귀찮아지신 겁니까?”
“입조심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루크 공작은 세루리안의 말에 화를 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무척 이상한 것이었다. 정말 진저리나고 귀찮았다면 화를 낼 이유도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의 대치에 끼어 있던 나는 소리쳤다.
“그러니까 명확히 말씀해 주세요. 뭐가 진저리 난다는 건데요? 그렇게 진저리가 나면서 왜 나와 세루리안의 혼약서에는 서명을 해 줬냐고요?!”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굳어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내리깐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생겼을 때, 나는 스스로 좋은 아버지도, 남편도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헤어지기로 한 것이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게 들리는 이별 사유였다. 이것이 공작의 진심임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놀란 사람처럼 다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덧붙였다.
“하지만 세루리안이 너와의 혼약서를 가져왔을 때는 결국 이것이 운명인가 싶었다. 그래서 마음을 바꾸어서 허락한 거다. 결국 네 것이어야 하는 것들을 네가 가져가는 과정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혼약서에 직인을 찍어 준 줄 몰랐다. 그저 공작님의 변덕이라고 생각했을 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되는 것이 많아.’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대답했는데도 성대하게 치러야 한다고 강권했던 점이나, 혼인도 하기 전부터 아버님이라고 부르라고 하던 부분까지.
그저 불가해하게만 보이던 그 상황들을 저 사람은 혼자서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것을 돌려준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그의 행동을 반추하듯, 그 또한 자신의 행동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공작은 멋쩍은 듯 턱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시시한 이야기지 않느냐. 시시콜콜 설명하기 싫다.”
“하나도 시시하지 않아요. 대화는 중요한 거라고요. 공작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면 전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요.”
이대로 놔두면 다시 도망쳐서 대화를 회피할 것만 같았다. 나는 공작에게 재차 핵심을 물었다.
“그러니까 공작님은 엄마를 무척 사랑했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지금도. 맞지요?”
“…….”
루크 공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 침묵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갑작스러워서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일단 이해해 볼게요. 기회는 또 있으니까요. 우린 집에서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나는 루크 공작의 친딸이자 며느리였다.
아무리 기분이 상하고 떨떠름해도 집에 돌아가서 다시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사이.
‘그러니 괜찮아. 진심으로 우리 엄마를 사랑했다는 것은 알게 되었으니까.’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나는 세루리안과 함께 돌아섰다. 혼란한 마음을 정리하려면 내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막 걸음을 떼려는데 등 뒤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닿았다.
“에델.”
내 것 같기도 하고, 한없이 낯설어서 다른 사람의 것 같기도 한 이름이었다.
저도 모르게 붙들린 것처럼 굳어진 내 등 뒤로 투박한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렸다.
“네가 싫었던 건 아니다.”
그가 내뱉는 모든 말은 진실일 것이기에.
“……네.”
이번엔 내 눈에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 * *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오르니, 그제야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진 것처럼 몸이 늘어졌다.
마차 소파에 기댄 나를 보고 세루리안이 손을 뻗었다. 불편하게 앉은 나를 자신에게 기대게 하려는 손짓이었다.
그 손을 보고 있으니 손을 베일 때가 생각나면서 다시 정신이 번쩍 든 내가 그의 손을 꽉 붙들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알았어요? 아니, 대체 어떻게 안 거예요?”
갑자기 내게 손목이 붙들리게 된 세루리안이 아름다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면서도 얄미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추측은 길었지만 확신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두 분은 닮지 않았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람.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세루리안, 당신만 그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저는 알고 나서도 닮은 구석을 도무지 모르겠는걸요.”
루크 공작은 소금 같은 사람이었다. 씹으면 바삭 소리가 나고, 입은 주체할 수 없이 짭짤해지고 말이다.
‘내가 만날 미간에 주름을 잡고 다닌다는 뜻인가?’
괜스레 신경 쓰여서 손가락으로 애꿎은 이마 사이를 꾹꾹 눌렀다. 하필 단검에 베였던 바로 그 손가락이었다. 그러자 세루리안이 부드럽게 그 손을 붙들어서는 자신의 손바닥 안에 가두듯 쥐었다.
은근한 접촉에 내 심장은 두근거리는데, 정작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세루리안의 목소리는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가정은 했지만, 확신이 늦었던 것은 각하께서 정말 누군가와 사랑을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녀를 가지다니. 확신한 다음에도 여러 번 의심했지요.”
“자식을 가지는 게…… 왜요?”
성인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면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세루리안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루리안은 내 손에 성글게 묶여 있는 붕대를 풀며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는 그걸 무척 혐오하셨습니다. 되도록 루크 공작가가 자신의 대에서 끊어지길 바라셨죠.”
“도대체 왜요?”
오래전부터 마물과 대적해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공작가.
그런데 왜 대를 끊으려고 한단 말인가? 그건 다른 귀족들과는 완전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럼 세루리안은 왜 입양했는데요?”
“제가 필요했고, 그 필요에 딱 맞는 아이였으니까요.”
“이해가 안 가요.”
입술을 삐죽이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건 에델이 물으면 대답해 주시지 않을까요?”
은근히 회피하는 듯한 대답이었다. 나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뭐예요, 대답도 안 해 주고. 그러면 궁금하게 하지 말든가요.”
“제가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라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이 대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은 뭔데요?”
괜히 심술이 나서 샐쭉한 어조로 반문했다. 그러자 세루리안이 가볍게 상체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갑자기 가까워진 시선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때였다.
“아주 잠깐 아플지도 모릅니다, 에델.”
그의 입술이 쪽 하고 내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리고 잘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나는 점점 더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간지러움이 온몸으로 번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