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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78)화 (78/138)

‘어? 도대체 어떻게?’

나는 잠시 멍해졌다. 얼마나 황당한 상황인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설마 세루리안이 루크 공작의 아들이었나? 그래서 지금 검사하겠다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달랐다. 애초에 루크 공작은 붉은 곱슬머리에 어두운 밤하늘 같은 군청색 눈이지만, 세루리안은 레몬색에 가까운 금빛 머리카락에 연한 푸른색 눈동자를 가졌으니 말이다.

‘아주 먼 친척이라고 해도 믿지 않을 외모인걸.’

세루리안에 비하면 루크 공작의 외모는 비교적 평범하니까.

‘그럼 어떤 방법이 있다는 거지?’

이 자리에 혈연은 바네린느와 테오도르 황제뿐이지만, 형제 관계는 판별이 불가해 부모가 죽은 뒤에는 검사가 불가능했다.

설마 보니를 데려온 건가 하는 생각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잠시.”

세루리안이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아해하기도 전에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떠나기 전에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자리가 적절하겠군요.”

“떠나요? 어디로요? 남부 원정을 말하는 건가요?”

“…….”

세루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진 그의 옆얼굴을 보면서 나는 희미한 불안을 느꼈다.

갑자기 그들의 앞에 성큼 다가온 세루리안과 나를 보며 대신관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루리안 경, 어째서…….”

세루리안은 대답 대신 내 손목을 붙들고 손끝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 같은 검날이 생채기를 내면서 순식간에 손가락 끝에서 피가 뚝뚝 베어 나왔다.

푸른 연기가 가시고, 수반에서는 여전히 푸른 성수가 찰랑거리며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위로 핏방울이 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기묘한 느낌이었다.

물감을 탄 듯 혈액이 섞인 수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세루리안이 루크 공작님의 피를 받았던 접시를 기울였다.

물 위로 피가 어지러이 엉겨들었다. 그 바람에 잠시 일렁이는 것 같던 물에서는 붉은 구름이 피어올랐다. 앞선 푸른 구름과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

교황이 얼빠진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치, 친자…… 친자입니다! 하지만 이 피는…….”

나와 루크 공작의 피였다.

너무나 뜻밖의 상대와 반응하는 바람에, 도리어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 아니라, 교황 예하도, 황제 폐하도, 바네린느마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평소와 같았던 세루리안이 침착한 시선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이것이 각하께서 우리의 결혼을 허락하신 이유입니다.”

“예?”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세루리안이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각하께서 당신의 친아버지입니다, 에델.”

“……!”

그의 목소리가 한 박자 느리게 내 귓가를 울렸다.

내 친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루크 공작님이라고?’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루크 공작님의 시리도록 푸르고 어두운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놀라기보다는 조금 난처해하는 것 같았다. 잠시 턱을 문지르며 말을 고르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밝힐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꼬리를 흐렸을 뿐, 명확한 긍정의 말이었다.

‘진짜라고?’

너무도 놀란 나머지 입이 벌어졌을 때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한 세루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사의 타당성을 주장했다.

“예하께서 자주 오실 수 있는 분은 아니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세루리안 경!”

얼떨결에 세루리안에게 이용당한 셈이 된 교황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문을 잇지 못했다. 대답 대신 세루리안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예의 바른 태도에 교황은 연신 허 참, 하고 혀를 차며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를 부쳤다.

그리고 이 자리에 나만큼이나 놀라고 당황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바네린느였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긴. 그녀가 검사의 신뢰성을 운운하니 이 자리에 있던 유일한 친자 관계로 검사의 정확성을 증명한 것이다.

톡 쏘는 어조로 바네린느에게 쏘아붙일 수도 있었지만, 심적으로 매우 당황한 상태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창백해진 채 비틀거리는 나를 세루리안이 두 팔로 꽉 붙들어 주었다. 대답은 루크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본 대로요.”

그의 말에 바네린느는 떨리는 눈을 들어 루크 공작을 마주했다. 아침 메뉴를 말하듯 감흥 없는 어조로, 그는 진실을 읊었다.

“에델이 내 딸이오.”

“이, 이게 무슨.”

마지막 선언에, 바네린느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이내 루크 공작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날 속인 거군요. 그렇지요?”

“내가 그대를? 뭘 속였다는 거지?”

“딸이 있다는 이야기 자체를 하지 않으셨잖아요! 딸을 며느리로 속여 집안에 들이고 아닌 척 입을 다물고 앉아서, 평민 며느리를 감싸느라 진땀을 빼는 저를 비웃고 계셨군요.”

“그다지 진땀을 뺀 것 같지 않은데.”

루크 공작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내가 평민이라고 은근히 비웃던 것이 그녀였지, 언제 감싸 주었다고.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지어내는 건 여전하구나.’

어찌 되었든, 지금 상황은 완전히 루크 공작의 손에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남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나는 에델이 내 딸이라는 걸 밝힐 생각이 없었소. 그대가 아니라면 이 세상 누구도 몰랐을 테지. 그 증거로 에델 또한 모르고 있었지 않은가.”

그 말에는 나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렇게 바보처럼 놀라고만 있지 않았으리라.

바네린느가 여전히 나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을 때였다. 루크 공작이 휘파람이라도 불 듯 가벼운 어조로, 무겁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논점을 어지럽히지 마시오. 지금 중요한 건 에델이 내 딸이라는 것보다, 찰스가 그대의 피도, 내 피도 잇지 않았다는 것이니. 상황 폐하와의 약속은 그대의 아이를 눈감아 주겠다는 거였지, 나를 속여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거든.”

그의 말에는 이미 결혼 단계에서 바네린느가 아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황제에게 그것에 대한 입막음을 당했다는 것도 내포하고 있었다.

아까의 동정심은 간데없이, 모든 귀족이 차가운 시선으로 주저앉은 바네린느를 바라보았다. 루크 공작은 가볍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폐하, 결단을.”

그제야 당혹감에서 벗어난 황제가 음색이 풍성한 어조로 선포했다.

“바네린느 로사 루크 공작 부인의 혐의에 자녀 위장 혐의까지 추가한다.”

* * *

폭풍 같은 친자 확인 검사가 끝나고 나는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중간에 찰스가 증인이므로 황궁에서 보호하겠다는 요구도 있었지만, 그건 칼같이 거절했다.

‘세이지 부인과 약속했으니까.’

바네린느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대신 요구한 것이 바로 찰스와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달라는 거였다.

“찰스, 오늘 정말 씩씩하게 잘했어. 이제 저택에 가서 잠시 쉬고 있어. 알았지?”

“혼자 가야 해요?”

놀란 탓인지, 먼저 돌아가라는 말에 찰스는 미적거렸다. 하지만 나도 확인해야 할 것이 있기에, 마냥 찰스와 계속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세이지 부인과 함께할 것이기에 찰스는 아마 괜찮을 것이다.

찰스를 마차에 태워 보낸 뒤, 나와 세루리안, 그리고 루크 공작은 셋이서 마주 보았다.

꼴깍, 나는 침을 삼켰다. 어린 시절부터 친아빠를 만나는 상상은 수도 없이 했지만, 이런 상황을 그린 적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나는 결국 잔뜩 메인 목을 가다듬고 공작님께 물었다.

“진짜 제 아버지세요?”

내 입술로 내뱉은 말이건만 이상하게만 들렸다. 루크 공작이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무심히 응시하고 있어서 더 실감이 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내 아빠란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다시금 떠올려본 나는 재차 반문했다.

“그러니까, 그 인간쓰레기가 공작님이시라고요?”

그 말에, 루크 공작님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그 말은 언제 들어도 어색하군. 물론,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진짜구나!

‘그러고 보니 내가 우리 아빠는 쓰레기였다고 말했더니 비틀거렸던 적도 있었지.’

지금 생각하니 나름대로 루크 공작이 답지 않은 행동을 한 적이 있긴 했다. 문제는 그것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소소해서 그렇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내 곁에 선 세루리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당신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평소와 같이 표정 변화가 없던 세루리안이 아주 뜻밖의 대답을 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각하께서 승인해 주시지 않았던 결혼을 번복하고 허락하실 때부터요.”

그럼 사실을 알게 된 지 꽤 된 것이 아닌가.

‘그런 기색을 눈치챘으면 말을 해 줬어야지!’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세루리안을 쳐다보니, 세루리안은 도리어 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우리 두 사람을 가리켰다.

“뭣보다 두 사람은 닮지 않았습니까. 구불구불한 붉은 머리카락이나, 둥근 귓바퀴 등등. 각하께서 표정이 없어서 그렇지, 표정이 선명하면 이목구비가 닮아 보일 겁니다.”

“저랑 닮았다고요……?”

뜻밖의 말에 공작님을 돌아보니, 공작님은 고개를 휙 돌리며 투덜거렸다.

“괜히 살펴보지 마라. 불쾌하니.”

“…….”

누군 좋은 줄 아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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