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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77)화 (77/138)

바네린느는 그동안 누군가에게 화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바네린느를 상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도 그것이었다. 바네린느의 본성을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으니.

하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친자 확인 검사를 해야 하는 이 상황만큼은 그녀도 웃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고고하게 고개를 들고 낮은 온도에서 끓어오르는 물처럼 지독히도 수치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바네린느는 말했다.

“어찌 제게 이런 불명예를 씌우십니까?”

단숨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꽂혔다. 고고하고 딱딱해 보이던 얼굴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금세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가녀린 얼굴을 하고 덧붙였다.

“오라버니께서도, 각하께서도 저의 부정을 의심하실 수는 있습니다. 악한 자가 쉴 새 없이 저를 비방하며 지저귀는데, 의구심을 품으실 수 있지요. 하지만 이리도 많은 사람 앞에서 검증하라는 건 제게 너무도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모욕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 싶으셨던 거라면 일을 조용히 치르셨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논리의 곡예였다. 애초에 이 자리가 마련된 건 그녀가 부정을 인정하지 않아서 아닌가.

하지만 악한 자, 비방 같은 단어로 그녀는 의혹 자체를 무의미한 것처럼 표현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더 소름 끼치는 것은 그 모습조차도 고고한 황녀다워서, 그녀에게 안쓰러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증인으로 참관하게 된 부인 중 하나는 옆에 선 부인에게 소곤거렸다.

“그러게요. 부인들만 있는 자리에서도 충분히 검증되었을 텐데요.”

“공개적으로 친자 여부를 검증하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긴 하죠. 그리고 황녀님은 자존심이 강한 분이시잖아요.”

순식간에 황녀가 안쓰럽다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네린느의 힘이었다. 다소 무리한 일이라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믿게 만드는 힘.

그나마 다행인 건, 황제 폐하께서 바네린느의 그런 눈물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서 의식을 거행하지.”

“알겠사옵니다, 폐하.”

황제가 단호히 턱짓하자, 교황과 함께 온 대신관이 흰 천에 싸인 단검과 작은 유리그릇을 내밀었다. 바네린느가 교황을 향해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교황 예하께서도 정말 너무하시군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듣고도 거부하지 않으시다니요.”

“저는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신의 뜻이라고요? 한낱 여인인 나를,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짓밟는 것이 신의 뜻이란 말입니까?”

“…….”

교황은 잠시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며 공손히 대답했다.

“공작 부인과 공자의 혈연관계를 입증하기 위한 절차일 뿐입니다. 어서 손을 주십시오.”

“도대체 뭘 더 입증해야 하죠? 저 금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바네린느의 손가락이 찰스를 가리켰다. 그것은 이 상황 자체를 환기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사실 친자 확인에 바네린느의 피는 필요 없다. 그러니까 통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는 어째서 바네린느의 피를 원하시는 거지? 설마 찰스가 바네린느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계시는 걸가?’

그 이야기까지는 내가 전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건네지 못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찰스와 보니의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세루리안이 폐하께 그 사실까지 알린 걸까?’

그럼 보니 또한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혼란스러워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을 때였다. 바네린느가 애처로이 황제에게 애원했다.

“오라버니,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어찌 피를 나눈 여동생에게 이런 지독한 누명을 씌운단 말입니까.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구나, 동생아. 아무리 이 오라버니가 미워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니?”

“제가 무엇을 했는데요?”

바네린느의 반문에 테오도르 황제는 경멸로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바네린느는 티끌 한 점 없는 눈을 아름답게 반짝거리며 말했다.

“저는 오라버니를 진심으로 존경해요.”

지상에 강림한 천사와 같았다. 흰 얼굴을 간질이는 하늘하늘한 금빛 머리카락, 서글서글한 눈동자, 장밋빛 입술이 담는 자애롭고 사랑스러운 말들.

이대로 모든 흐름이 바네린느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바로 몇 년 전의 그때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뒤집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당당하시다면 그냥 검사를 받으시는 게 어떻겠어요? 당신의 원한 관계에는 관심 없어요. 궁금한 건 당신이 우리를 속였는지 그뿐이니까요.”

찰스가 듣고 상처받지 않도록 귀를 막은 채로 바네린느에게 똑똑히 경고했다.

“에델 아지안.”

내 목소리를 들은 바네린느의 눈썹이 쓰윽 올라갔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 못된 꾀를 낸 것이 당신인가요?”

“꾀라고 말씀하시는 건 어폐가 있네요. 제가 폐하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공작가에서도 제게서 다른 가족들을 멀어지게 만들더니 이제는 저와 제 오라버니까지 이간질하고 있지 않습니까?”

황제를 무지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냐고 비꼬았더니, 그녀는 내가 가족들과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다고 받아쳤다. 대화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때였다.

결국 우리의 대화를 종결시킨 것은 황제 폐하였다.

“혀가 길구나.”

그가 손을 들자 대신관이 바네린느에게 다가섰다. 그뿐만 아니라, 바네린느를 억지로 붙들려는지 기사까지 대동한 상태였다. 바네린느는 자신의 손을 꼭 붙들고 소리쳤다.

“저는 못 믿겠어요! 저 검에 독이라도 발려 있으면 어떻게 하나요?”

바네린느의 말에 교황의 인자했던 얼굴에도 미미한 노기가 올라왔다.

“지금 신의 대리인을 의심하는 겁니까.”

“제 상황을 생각해 보시면 아실 거예요. 하나뿐인 오라버니도 제 편이 아니죠. 제가 누구를 믿을 수 있다는 거죠?”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교황은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네린느에게 더 화를 내진 못했다.

‘저런 식으로 시간을 끌겠다는 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한 걸음 나선 것은 루크 공작님이었다.

“독 걱정은 할 필요 없소. 내가 먼저 할 것이니.”

그는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가락 끝을 그었다. 그리고 내 등 뒤에 숨어 있던 찰스에게 손짓했다.

“찰스.”

찰스는 창백한 얼굴로 주춤 걸어 나왔다. 오기 전에 충분히 설명은 해 주었지만, 나이가 어린지라, 무슨 검사를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한 것 같았다. 불안해하면서도 비척비척 나서는 그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따끔할 거다.”

하지만 루크 공작은 망설임이라곤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선뜻 찰스의 조막만 한 손을 붙들고 얕게 베었다. 검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피를 낸 뒤, 그는 능숙하게 찰스의 손가락을 붕대로 감았다.

친자 확인 검사는 간단했다. 파릇한 성수가 담긴 수반에 두 사람의 피를 섞자 푸른빛이 뭉게구름처럼 솟구쳤다.

신비로운 광경이었지만,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교황은 엄숙한 어조로 선포했다.

“친자가 아닙니다.”

그 말에 잠시나마 바네린느 쪽으로 기울었던 여론이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세상에, 이리 명백한 상황에도 저렇게 뻔뻔하게 계속 우기다니.”

바네린느가 그간 찰스를 루크 공작가의 적자로 소개하고 다녔던지라, 결과를 들은 이들의 얼굴이 모두 일그러졌다. 특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혈통에 민감한 7대 귀족 아닌가.

소란을 잠재운 것은 황제 폐하였다.

“그대들은 그저 증인일 뿐이니, 발언할 필요 없네.”

그는 이 상황에 조금의 사심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듯 차분한 목소리로 좌중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바네린느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네 차례다, 바네린느.”

이미 절반 정도 궁지에 몰린 상황이건만, 바네린느는 고개를 흔들었다.

“적어도 제 품위는 지켜 주세요! 이렇게 저를 강압하는 분위기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요.”

“충분히 지켜 주고 있지 않으냐. 너를 배려하지 않았다면 너는 수도 광장에서 억지로 손가락을 베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바네린느를 상당히 궁지에 몰아넣은 모양이었다. 바네린느는 평소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아시면 쓰러지실지도 몰라요. 평소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어찌 이런 소식을 전하려 하시나요.”

“이제 와 보니 우리 가족을 이간질하는 건 너로구나. 걱정하지 말아라. 아바마마께서는 불의를 눈감느니, 차라리 눈이 머는 쪽을 택하실 분이시니.”

바네린느가 저항을 멈추지 않으니, 테오도르 황제가 몸소 바네린느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사리문 채 그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그녀의 손에 직접 칼을 대었다.

“후회하실 거예요.”

바네린느의 한마디가 몹시 섬뜩했다. 하지만 테오도르 황제는 그 섬뜩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피를 내었다.

그리고 찰스와 바네린느의 피를 수반에 섞었다. 이번에도 아까와 같은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교황은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며 공표했다.

“치, 친자가 아닙니다.”

설마 아이를 바꿔치기했을 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한 귀족들은 웅성거렸다.

“이, 이게 무슨?”

“그럼 낳지도 않은 아기를 낳았다고 한 건가요?”

“친자식도 아닌데 굳이 공작가에 보냈단 말이오?”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갔다.

“잠시 제게 집중해 주세요.”

기회를 잡았다는 듯 바네린느가 다급한 얼굴로 발을 구르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굳이 어려운 가정을 할 필요가 있나요? 이 상황 자체를 명확히 설명하는 단 한 가지 결론이 있습니다.”

특유의 또랑또랑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바네린느는 말했다.

“애초에 검사 자체가 조작된 겁니다.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무조건 친자가 아닌 걸로 나오도록 조작되어 있었다고요.”

그녀의 말에 교황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을 삼가십시오, 공작 부인! 지금 교황청을 능멸하는 것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제가 제 혈연도 아닌 아이를 굳이 공작가에 들여서 얻는 이득이 무엇이지요? 심지어 공작 각하께는 세루리안 루크라는 장성한 아들도 있는데요.”

바네린느의 말은 정말 뱀처럼 간교했다. 보니를 보지 못했다면 나도 그녀의 함정에 빠져들었을 정도였다. 바네린느는 마지막으로 꼿꼿이 턱을 들고 도발했다.

“아니면 제대로 된 검사라는 걸 증명해 보시던가요.”

이 자리에는 부모 자식 간의 혈연관계가 아무도 없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자리에 어린 자식을 데려올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니 당장 증명할 방법이 요원한 상황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의 다 잡혔는데 이렇게 빠져나가다니.’

자리를 옮기면 분명 검사 도구가 바뀌었다고 주장할 사람이었다. 이 상황이 답답해져서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세루리안이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있습니다. 제대로 된 검사라는 걸 증명할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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