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날이 찾아왔다. 현관에 서서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드디어 오늘이군요.”
내 말에 세루리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만 하지 않을 뿐,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상황 폐하께서 움직이지 않으셔서 의외였어요. 바네린느 황녀에 대한 수사를 당장 중지하라고 압력을 가하실 줄 알았는데.”
바네린느가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는 건 모두 그녀의 등 뒤에 상황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날 소환해서 없던 일로 만들라고 할 줄 알았는데.’
루크 공작가, 특히 세루리안의 앞날을 인질로 그리 협박했다면 나도 거부하기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다행히 그런 부름은 오지 않았다.
‘상황제가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얼굴도 성격도 모르는 상황 폐하를 멋대로 상상하고 있을 때였다. 세루리안이 도저히 흘려듣기 힘든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아마 외압이 있었을 겁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루리안, 혹시 저 모르게 뵙고 왔어요?”
“아닙니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세루리안은 더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하지 않을 때는 보통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경우.
‘정리되면 내게 다시 말해 주겠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호기심을 억눌렀다. 대신 흰 붕대로 감긴 그의 손끝을 톡 건드렸다.
‘어쩌면 이 팔도 상황제가 사주한 걸지도.’
내가 죽으면 바네린느의 재판이 동력을 잃을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고민하는 얼굴로 붕대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세루리안이 내 손을 마주 잡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 합니까?”
“……이걸 사주한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범인은 죽었다고 했지요?”
“네. 아쉽게도 혀를 깨물었습니다.”
아쉽다는 단어가 어쩐지 섬뜩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누가 사주한 것인지 그 배후를 찾을 수 있었을 터라 답답한 건 사실이었다.
‘증인이 사라진 순간, 모든 건 다 의혹일 뿐이야.’
나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흰 붕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팔은 이제 괜찮은가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세루리안은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루크 공작가의 주치의가 내게 신신당부한 말이 있다.
“공자께서는 목숨이 위태로운 치명상에도 별 감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아예 감각 자체가 없는 것처럼 구시니 절대로 속지 말고 곁에서 상처를 면밀히 살펴 주셔야 합니다.”
세루리안의 무감각은 역사가 깊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의 손을 붙들고,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당신이 통증에 둔감한 거 같아 걱정이 되어요. 상처가 곪아도 모르고 넘어갈 것 같아서요.”
“제가 통증에 둔감합니까?”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난리가 났을 거예요. 죽겠다고 울고불고, 어리광 부리고.”
“흐음.”
세루리안은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빙긋 웃으며 세루리안을 마주 보았다.
“당신은 잘 모르는 거 같으니까 제가 두 배로 걱정해 드릴게요.”
마침 타이밍 좋게 마차가 도착했다. 세루리안의 손을 붙들고 계단에 오르려고 했더니, 세루리안이 번쩍 내 허리를 안아 들고는 마차 위에 올려 주는 게 아닌가. 나는 세루리안의 어깨를 콩콩, 가볍게 때렸다.
“아이참, 팔도 아픈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요.”
“괜찮습니다.”
세루리안의 ‘괜찮습니다’는 신뢰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그의 친절함을 어떻게 피하냐는 것이지!
‘마음을 놓으면 안 되겠어.’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데. 말을 해도 듣지 않으니 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피하는 수밖에.
마차에 앉아서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물었다.
“오늘도 많이 긴장됩니까?”
“조금요? 그래도 지난번만큼은 아니에요.”
사실 오늘은 그렇게 긴장할 일도 아니었다. 찰스와 루크 공작, 그리고 바네린느 황녀의 혈연관계를 검증하는 날이었으니까.
‘이건 분명히 바네린느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거야.’
귀족 사회는 폐쇄적이기 때문에, 사생아나 입양아에 엄격하다. 세루리안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루크 공작가가 이례적인 경우였다.
오죽하면 사생활에 있어 저리 깔끔한 세루리안이, 오로지 입양아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가십지를 장식하겠나.
‘바네린느 부인이 그렇게 사라지면 세루리안의 공작 위 승계에도 더는 걸림돌이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마차의 그늘에 앉은 세루리안이, 묘하게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네? 그게 무슨…….”
아니,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난 상황도 아닌데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걸까?
‘내가 모르는 일이 있는 걸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입술을 우물거렸을 때였다. 그가 갑자기 자리를 옮겨서 내 옆에 가까이 당겨 앉았다. 그리고는 한쪽 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는 것 아닌가.
얼떨결에 그의 품에 안기듯 끌어당겨진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가늘게 뜨며 흘겼다.
“당신, 조금 변한 거 알아요?”
“싫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표현하는데 싫을 리가 있나.
나는 미소를 띤 채로 순순히 눈을 감았다. 쪼듯 짧은 키스가 이어졌다.
* * *
황궁에 있는 내내 바네린느는 자신의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황녀궁 안에서도 황제의 명이 철저하게 지켜진 것이다.
‘식사 때 쪽지라도 전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첫 시도로 베로니카 부인에게 쪽지를 남기기 위해, 식사를 마친 그릇 아래 시답잖은 이야기를 써서 내려놓았다.
하지만 첫날 이후 베로니카 부인 자체를 만날 수 없었다. 낌새로 보아하니 아예 황녀궁에 출입도 하지 못하게 막는 것 같았다.
‘역시 테오도르 오라버니는 성가셔.’
하필 형제들 중에서 가장 성가신 테오도르가 황제가 될 건 뭐란 말인가. 물론, 그런 성가신 인물이니까 황제까지 된 거지만 말이다.
갇혀 있는 게 답답할 뿐이지, 바네린느의 하루하루는 나쁘지 않았다. 그냥 쉰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느긋하게 지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낸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황녀궁으로 궁인들이 찾아와 그녀의 소세를 도왔다. 아마 알현을 준비하는 듯했다.
“드디어 오라버니의 분노가 풀리신 거니?”
“…….”
궁인들에게 눈물을 보이며 정보를 캐내려고 했지만, 사전에 단단히 교육을 받고 온 것인지, 감정의 편린조차 흘리지 않았다. 결국 무슨 상황인지 사전에 어떤 언질도 받지 못한 채 황제궁으로 끌려왔다.
그녀를 이끌어 간 곳은 황제궁에서 가장 커다란 홀이었다. 보통 기사 서임식 때 사용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이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네린느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이는 다름 아닌 에델이었다.
반듯하게 선 에델은 마치 제가 공작 부인이 된 것처럼 우아하고 값비싼 물건들로 치장한 차림이었다. 챙이 넓은 캐플린을 비스듬히 걸친 모습이 아니꼬왔다. 바네린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떻게 저리 멀쩡하게 서 있지?’
그녀는 베로니카 부인에게 에델이 ‘숨도 못 쉬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에델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베로니카 부인이 내 명을 듣지 않은 걸까? 아니면 저 여자가 잘 피한 걸까.’
어느 쪽이든 탐탁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네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리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참았다. 지금 이 자리에는 루크 공작가의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나라의 7대 공후작 가문의 수장과 부인들이 모두 와 있었다. 테오도르가 황태자로 책봉될 때 참석했던 이들과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바네린느는 순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갔다.
“제 혐의에 비해 와 계신 분들이 지나치게 화려해 보이네요.”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황녀 지위를 박탈하기라도 하겠냐는 의미였다.
당연히 그럴 리가 있나요, 하는 만류를 기대하고 던진 말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바네린느는 희미한 불안을 느꼈다.
‘왜 저런 반응이지?’
마치 암묵적으로, 바네린느의 범죄 사실을 긍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설마 세이지 부인이 비밀을 토설하고, 하녀장도 이미 벌을 받았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한 바네린느에게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게다가 아바마마께서도 이제 돌아오실 때가 되었고.’
더는 환궁이 늦을 리가 없었다.
바네린느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가 된 기분을 느꼈을 때였다.
그동안 에델의 치맛자락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작은 그림자가 바네린느의 눈에 띄었다. 금빛 고수머리에 통통하고 흰 뺨을 가진 소년, 찰스였다.
찰스를 보자마자 바네린느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입은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와 강제로 떨어진 어머니가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지어낸 표정이었다.
“찰스, 드디어 얼굴을 보는군요! 이 어미 없이도 잘 지냈나요?”
약도 잘 챙겨 먹이라고 전했으니, 찰스는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처럼 감정 없이 차분한 상태이리라.
하지만 뜻밖에 찰스는 에델의 치마 뒤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예상치 못한 태도에 바네린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찰스?”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시종장의 알림과 함께 문이 열리고, 황제가 들어섰다. 평소 소박하게 끼니를 때우며 정무를 보던 평소 모습과 달리, 제대로 황제의 제복을 갖춰 입어 묘한 위압감이 들었다.
그리고 황제의 뒤를 이어 교황과 대사제 두 명이 들어왔다. 대사제가 밀고 들어오는 카트에는 수반이 놓여 있었고 파릇한 빛이 나는 성수가 찰랑대고 있었다.
교황을 본 순간부터 바네린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테오도르는 굳어진 제 동생을 보며 찡긋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니, 바네린느? 대답하지 않아도 좋단다. 네가 잘 지낸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었으니 말이다.”
“……저를 조롱하려고 부르신 건가요, 오라버니.”
“그럴 리가. 내가 그렇게 한가하진 않단다. 그럼에도 특별히 행차한 것은 네 새로운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이지.”
그제야 바네린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던 귀족들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깨달았다.
새로운 혐의.
그들에게 이미 정보가 공유된 것이다.
그녀가 루크 공작의 소생이 아닌 아이를, 적자로 속였다는 걸.
바네린느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이미 뻔한 상황임에도 바네린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듣기 괴로울 정도로 몹시 가여웠다.
“새로운 혐의라뇨? 오라버니께선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는 오라버니께 죄를 지은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도 네게 말했지. 나는 직접 눈으로 본 것 외에는 믿지 않는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눈물 연기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턱을 들고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일단 피를 내놓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