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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75)화 (75/138)

그다음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피가 튀었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눈앞이 아찔해 나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루리안이 나를 내려놓았던가? 아니면 나를 뿌리치고 그 사람에게 달려들었던가? 솔직히 말하면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황을 인지하고 맨 처음 내 귀에 들려온 것은, 세루리안보다 한 발자국 늦게 도착한 칼리마가 혀를 차는 소리였다.

“큰일 났다.”

그 한마디에, 나는 그제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위험했던 거야.’

그래서 세루리안은 나를 지키려다가 팔을 다쳤고.

잠깐만, 팔? 그러면 이 피는 세루리안의 피란 말인가?

“세루리안!”

그제야 나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내 몸 여기저기에도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때 나를 해치려고 했던 남자를 세루리안이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그런 세루리안을 칼리마가 붙들었다.

“정신 차려요, 단장님! 그러다가 죽어요! 증인이 사라진다고요!”

칼리마가 다급하게 외치는데도 세루리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최면에 걸린 것처럼 상대방을 또다시 후려쳤다 칼리마가 다급한 어조로 나를 불렀다.

“마님! 단장님 좀 말려 주세요!”

마치 움직이는 동상을 보는 것처럼 표정 없는 세루리안에게서는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세루리안에 대한 걱정이 앞섰기 때문에, 나는 두려운 마음을 누르고 세루리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세루리안, 그만둬요! 그러다가 팔을 못 쓰게 될지도 몰라요!”

다행히도 칼리마의 외침에는 아랑곳하지 않던 세루리안의 움직임이 서서히 멈췄다. 무채색이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가 느릿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에델?”

그래도 나는 알아보는구나.

그를 잡아당겨서 상대방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상처를 보고 희게 질렸다.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흰 뼈가 드러나 보이고 잘린 단면으로 근육이 훤히 보였다.

“도대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의원을, 아니, 일단 피를…….”

패닉에 빠져서 횡설수설하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이렇게 말했다.

“드레스가 더러워집니다.”

지금 드레스가 문제란 말인가.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벙긋거리니, 그는 혼자만 동떨어진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태연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에델?”

그 말에 나는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건 제가 할 소리예요! 팔이 이 지경인데 함부로 움직이면 어떻게 해요!”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위험했다는 기억만 남아서…….”

“일단 진료소로 가야겠어요! 한시가 급해요!”

때마침 분란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챈 근위병이 달려왔다. 나는 손수건으로 세루리안의 상처를 덮었다. 칼리마가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증언과 뒷수습은 제가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필요한 증언은 나중에 들으러 갈게요.”

“고마워요, 칼리마.”

바로 수배된 마차를 타고 황궁 한쪽에 있는 진료소로 향했다. 진료의는 화들짝 놀라 온갖 약품을 주렁주렁 들고 왔다.

“마취약을 쓰겠지만 급하게 봉합하는 터라 잘 듣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환자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아편이라도 피워야…….”

“잘 참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의사는 희게 질렸는데, 세루리안은 그 와중에도 태연자약했다. 도대체 누가 환자이고 의사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수술실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칼리마가 수사관과 함께 찾아왔다. 성의 있게 조서를 쓰고 나니, 어느새 세루리안의 수술도 끝이 나 있었다.

“마취 때문에 구역질이 날 겁니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 저택에서 일주일 이상 요양하셔야 합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는데, 세루리안의 표정이 워낙 평소처럼 무덤덤해서 기묘한 괴리감이 들었다. 조사관은 세루리안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 했지만, 칼리마가 떠밀었다.

“단장님이 멀쩡해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저 얼굴에 속으면 안 돼요. 어차피 범인은 도망가지 않으니 나중에 따로 출석해서 조서를 받아도 충분하잖아요?”

덕분에 나와 세루리안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바로 오를 수 있었다.

나는 태연을 가장하며 세루리안의 몸에 담요를 거듭 덮어 주었다. 세루리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입술이 희다 못해 파랗게 질렸거든요? 가만히 계세요.”

“그건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러니까 얌전히 계시라고요.”

그렇게 세루리안의 입을 다물리고 나니, 뒤늦게 손이 덜덜 떨리고 심장은 망치로 두드리는 것처럼 쿵쾅거렸다. 미처 진정되지 못한 감정이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밀려온 것이다.

“윽.”

순간 눈물이 울컥 밀려왔다. 나는 손바닥에 두 눈을 묻었다. 마차 의자에 기대앉아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세루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델? 지금 우는 겁니까?”

내 목숨이 위험했다고 하지만, 막상 그건 체감하지 못했고 내 눈으로 본 것은 세루리안의 팔에서 뿜어져 나오던 피뿐이었다. 심지어 나를 지키려다가 생긴 상처.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다시는 이러지 말아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요.”

“…….”

대답이든 말대꾸든 해야 하는 세루리안이 입술을 꾹 다물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훌쩍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세루리안?”

그가 몸을 일으켰다. 기껏 덮어 두었던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고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를 두 팔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이러다가 당신 다쳐요.”

바르작거리다가 실수로 세루리안의 다친 팔을 건드릴까 봐 걱정되었다. 몸을 돌리는 나를 더 깊이 끌어안으며 세루리안은 내 귓불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리니,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오늘은 같이 자도 됩니까?”

이런 종류의 유혹은 항상 나의 몫이었는데! 세상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하루 사이 까슬해진 세루리안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작게 웃었다.

“뭐에요, 당신답지 않게.”

“에델.”

세루리안은 딴소리하지 말라는 듯이 내 품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 소리를 들으려는 행동처럼 보여서, 내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아까 많이 불안했었나 봐요.”

“이런 느낌은 처음입니다. 심장에 얼음덩어리를 가져다 댄 것 같습니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닌데.”

머쓱해진 내가 너스레를 떨며 웃었을 때였다. 세루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내 시선을 빼앗았다.

“그렇게 웃지 마. 당신, 죽을 뻔했어.”

처음 듣는 그의 반말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얼마나 놀랐는지 딸꾹질이 나오려고 했다. 눈을 부산스럽게 깜빡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 그렇게 말해도 실감도 안 나고…….”

세루리안의 푸른 눈이 나를 곧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의 눈꺼풀 안쪽으로 사라졌다. 대신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꾹 내리눌러 왔다.

아까 정원에서 나눴던 것과는 결이 다른, 꼭 내 숨결을 확인하는 것 같은 키스였다. 그가 입을 맞출 때면 늘 가슴이 떨려 왔는데, 오늘만큼은 조금 슬퍼졌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의 상처를 보고 놀랐던 것처럼, 그는 내 목 뒤로 번뜩이는 가위 날을 본 것이다.

‘전지가위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도 몰랐어. 손목도 자를 수 있겠던데.’

세루리안이 빗겨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정면으로 들어왔다면 어떤 참사가 났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을 마주한 세루리안의 정신이 나가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미안해요. 당신이 놀란 걸 배려하지 못했어요.”

나는 세루리안을 마주 끌어안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정말 위험했던 건 당신인걸요. 당신은 기사인데, 팔을 심하게 다치면 어쩌려고 했어요.”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당신 자신을 소중히 여기세요. 당신이 아프면 제 마음도 아프니까요.”

“에델.”

그때 타이밍 좋게 마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먼저 내린 나를 세루리안은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잠깐만요! 당신 팔을 다쳤다니까요! 상처가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거나 말거나 세루리안은 나를 안고 우리의 부부 침실로 말없이 직행했다. 피투성이인 우리 부부를 보고 놀라 멈추는 사용인 여럿을 뒤로 한 채, 침실에 들어와서는 문을 걸어 잠갔다.

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세루리안이 두 팔 안에 나를 가두고 내려다보았다.

“에델.”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콩닥콩닥 뛰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손가락에 의해 치맛자락 여기저기에 피가 튄 드레스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얇은 캐미솔이 침대 어딘가로 밀려갔다.

“아아!”

평소 같지 않은 거친 움직임에, 정신없이 흔들리는 나를, 세루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에델.”

분명 평소와 다른, 깊은 감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 * *

세루리안은 시트에 흐트러지는 붉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꽃잎 같았다. 그녀를 마주할 때면 유독 선명하게 색을 더 하던 그것.

발긋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는 그의 머릿속에는 언젠가 루크 공작이 건넸던 말이 어지러이 섞여 들었다.

“지극히 인간다운 것으로 일컬어지는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반증이다. 인간다운 감정에 취하다 보면 결국 사람은 짐승이 되지.”

감정과 감각이 없는 사람만이 루크 공작 위를 이을 수 있었던 이유.

“부정적인 감정의 결정체, 그것이 로어다.”

두려움과 분노를 알게 된 이상, 그는 그 마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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