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가 인형처럼 앉아 있는 모습을 본 다음부터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정상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다들 어째서 이렇게 담담한 거지?’
그런 끔찍한 약을, 그저 공작가의 실권을 쥐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이에게 먹인 바네린느도, 그리고 그 사실을 듣고도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루크 공작도.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너무 당황한 탓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고요……. 아니, 그보다 왜 놀라지 않으세요? 바네린느 황녀가 저 방을 뒤졌다고요!”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지?”
내 말에 공작님은 그저 반듯한 눈썹만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깍지를 끼며 대답했다.
“내게 그런 사사로운 감정까지 묻지 마라. 하물며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기로 약조한 사이지.”
“그녀는 제 열쇠를 훔쳐서 금지된 방에 들어갔어요! 그녀에게는 열쇠를 주지 않으셨잖아요.”
허락하지 않은 사적 공간을 침범했으니, 적어도 그것에는 분노해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지적하는 부분은 그것이었는데, 공작님의 대답은 다소 어긋나 있었다.
“그랬지. 어리석은 짓을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나. 내 허락과 상관없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왜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고 묻는 건, 묻는 사람 또한 어리석은 것.”
빈정거리는 말들이 너무나 태연스러워서 도리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하는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그녀가 제 열쇠를 훔칠 거라고 예상하셨어요?”
가문의 비밀이 새어 나갔는데도, 공작님의 표정은 지나칠 정도로 태연스러웠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한 사람처럼 말이다.
내 물음에, 공작님은 상체를 일으켜 의자에 깊이 등을 파묻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예상은 했지만, 확신하진 않았지. 난 타인에게 그 정도의 흥미는 없다.”
여상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오로지 피로만이 가득했다.
“스스로 죽겠다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사람을 말릴 정도의 열정도 없고.”
“공작님!”
그의 대답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공작 부인에게는 그러실 수 있어요. 하지만 찰스에게는 그러시면 안 돼요!”
“어째서?”
“어째서라뇨. 찰스는…….”
찰스는 루크 공작가의 친자잖아?
그 말을 하려던 나는 목구멍이 턱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나와 칼리마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찰스는 그의 아들이 아니었다. 심지어 바네린느의 아들조차도 아니었지.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해.’
너무나 많은 정보가 몰아쳐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떨리는 눈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공작님은 너무나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고민할 필요 없다. 나는 그 아이에게 관심이 없으니.”
“……어떻게 그렇게 딱 잘라서 말씀하실 수 있죠?”
“그럼 어째서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하지? 그 아이가 나와 무슨 관련이 있어서?”
되묻는 공작님의 태도에서,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공작님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계셨군요.”
그 사실을 알지 않고서야, 이렇게 태연자약한 반응이 설명되지 않았다.
뻐꾸기가 다른 둥지에 알을 낳은 것과 다름없는 일이 일어났음에도, 공작님은 시종일관 남의 일을 말하듯 피곤해하기만 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내가 혼인이란 성가신 걸 하게 된 거다. 황궁에서는 적당한 곳에 떠넘기고 싶었을 뿐이고, 그 적당한 곳이 이 루크 공작가였던 거지. 나 또한 상황제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도 부부답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깍듯하게 각하라고 부르던 바네린느의 모습도, 바네린느에게도 차갑기 그지없던 공작님의 태도도 말이다.
공작님은 도리어 지금 자신을 찾아온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바네린느 황녀와 해묵은 감정이 있지 않았나? 얼마 안 가 그녀는 자멸할 거다. 가만히 구경이나 해.”
“……그러니까 공작님께서는 구경만 하고 계시겠다는 건가요?”
아무리 내가 그녀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죄 없는 아이 하나가 불행해지는 모습까지 팔짱을 끼고 구경할 수는 없었다.
더는 공작님과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나는 서재 밖으로 세루리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전 그렇게 못 하겠어요. 어차피 저는 처음부터 시부모님의 말씀을 안 듣는 나쁜 며느리가 되겠다고 결심했으니까, 이번에도 듣지 않겠어요.”
이렇게 말해도, 공작님의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세루리안.”
“예, 각하.”
세루리안은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은 끝까지 자기 이야기만 했다.
“수사관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나?”
“…….”
“공작님, 대체……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인가요?!”
지금 한 아이는 감정을 잃은 채 인형이 되어 버렸는데 말이다. 길가에 버려진 동물에게도 그렇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소 무례한 행동임에도 공작님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못할 이유가 있나?”
공작님이 너무도 차분하니, 오히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긴 나는 고개를 숙였다.
“……실례를 용서해 주세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랑은 정말 대화 자체가 되질 않는구나. 그리 생각하며 입술을 비틀었을 때였다.
돌아선 내 등 뒤로 공작님이 무심한 어조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추가로 먹이지만 않으면 된다.”
무슨 말인가 되묻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더니, 공작님은 아예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들은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듯이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연히 약효가 떨어져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올 터.”
바로 찰스가 복용한 약에 대한 대답이었다.
완전히 흘려듣는 줄 알았더니.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어조로 대답했다.
“……그건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공작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세루리안과 함께 서재 밖으로 나섰다.
* * *
나오자마자 나는 세루리안에게 큰 소리로 푸념을 터뜨렸다.
“저는 정말 공작님을 모르겠어요!”
마지막 첨언 덕분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을 뿐이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겠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투덜거렸다.
“바네린느는 온 세상에 거짓말을 한 셈이잖아요. 그리고 아끼는 서재의 열쇠를 도둑질해서 공작가의 비밀을 훔치기도 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남 일처럼 말씀하시죠?”
“남 일처럼 말씀하시진 않았습니다.”
“네?”
그런데 당연히 맞장구를 쳐 줄 줄 알았던 세루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황당해서 눈을 깜빡거리니 세루리안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평소엔 저런 대꾸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세루리안, 저 슬퍼지려고 해요.”
그저 대꾸를 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한다니.
‘그래. 생각해 보면 세루리안은 늘 그렇게 대답했었지.’
내가 지금 특별 취급을 받는 거라고 말이다.
‘여기서 더 반응해 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일지도 몰라. 그러니 그 부분은 포기하자.’
딱히 사랑받는 며느리를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공작의 태도가 아니었다. 서재로 향하는 복도를 지나, 두 갈래로 갈라진 분기점에 선 나는 공작 부인의 방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장 세이지 부인을 만나서 찰스에게 더 이상 약을 먹이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말해야겠어요.”
인형처럼 무감각해진 찰스를 떠올리며 성급히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곧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 말을 한다 해도 한때에 불과하지 않을까.
바네린느와 찰스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는 한은 바네린느가 찰스에게 약을 먹이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이 사실을 바네린느가 알게 되면 세이지 부인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할지도 몰라.’
무작정 들이닥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찰스와 세이지 부인의 안전도 확보해야 하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내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가장 좋은 건 공작가의 핏줄을 조작한 혐의로 공작 부인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까지 수작을 부리기는 어렵겠지요.”
“증인이 있다고 해서 구속할 수 있을까요?”
“그 부분이 문제입니다. 명확한 증인이 있어도 황실에서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죠…….”
애초에 찰스가 공작가의 적자로 둔갑한 상황 자체를 묵과한 것이 황실이니, 증인이 있어도 그 사실을 덮으려고 할 것이다.
나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증인과 증거가 있어도 구속할 수 없는 상대를 어떻게 이기냐고.’
그때 내가 그녀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처럼, 바네린느가 복도 끝에서 나타났다. 늘 데리고 다니던 세이지 부인 대신 하녀장을 대동한 채였다.
나와 마주한 그녀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찰스가 공작 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커져서인지 바네린느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햇볕이 따사로운 오후군요. 그런데 왜 그리 울상인가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 아이를 자기 욕심 때문에 불행하게 만들고서 본인은 더러운 일 따위는 하나도 모른다는 듯 고고하게 구는 것이 역겨웠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안절부절못하고 눈치를 살피던 하녀장이 나와 시선을 마주하자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와 다른 반응, 바네린느와 부쩍 가까운 모습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세이지 부인이 열쇠를 복제한 건 하녀장이라고 했었지.’
그녀의 말대로 하녀장이 범인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쉽게 범죄를 저지를 만큼, 공작가에서 헌신한 세월이 짧지 않을 텐데.’
당신은 어떤 대가를 받고 서재의 열쇠를 훔쳤나요?
그 질문이 목 끝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커다란 소음이 온 집 안을 울렸다.
“안 됩니다!”
“정당한 영장을 보여 주십시오.”
“지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갑옷이 철컹거리는 소음, 저택을 울리는 발소리, 말리는 고성과 또 뿌리치는 목소리.
그 소음의 주인들은 금방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이 곧장 우리를 향해 다가왔으니 말이다.
바로 황실 근위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