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다 신혼여행을 다녀오지 않으셔서 그래요! 지금도 늦지 않으셨어요. 화끈하게 신혼여행을 다녀오죠!”
신혼여행이라니. 나는 턱을 괴고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결혼한 지가 언제인데 신혼여행 타령이에요?”
그리고 세루리안이 집을 떠났다고 해서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띠는 모습 또한 상상이 되질 않았다. 여행지에서도 들떠 있기보다는 중간중간 공작가의 정무를 확인할 것 같달까.
‘게다가 우리 부부는 신혼여행 따위 가지 않아도 충분히 달달하단 말이지!’
어제 세루리안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내가 뺨을 은은하게 붉혔을 때였다. 칼리마가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서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후후, 원래 아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신혼 아닌가요. 제가 그때를 대비해서 예쁜 슬립도 사 두었다고요.”
반짝거리는 재질의 검은색 레이스 슬립이었다. 척 보기에도 면적이 심히 적어, 가려 주는 부분보다 드러내는 부분이 훨씬 많을 것 같은 옷 말이다!
나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비명을 질렀다.
“아니, 그 대비를 왜 칼리마가 해요?! 으아아악! 그런 건 어디서 사 오는 거예요!”
“어디서 사 오기는요! 제가 모시는 마님 내외의 금슬을 위해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지요.”
“당연하지 않거든요!”
“그렇게 말하지 말고 한번 걸쳐 보세요. 단장님이 엄청 좋아하실지 누가 아나요.”
“…….”
나는 칼리마를 흘겨보면서도 얌전히 슬립을 받아서 챙겼다. 칼리마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얼굴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내 곁에 앉아서 턱을 괴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휴가 중이시죠? 복직은 언제 하실 예정이세요? 신문사에서 빨리 복직하라고 독촉하진 않나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예요.”
내가 넘긴 특집 기사들의 반응이 얼마나 좋았는지, <뉴캐슬 타임스>의 판매량은 연일 고공 행진이었다. 얼마 전에 이런 내용의 편지가 날아올 정도였다.
<휴가 중이어도 월급 줄 테니 매주 연재 부탁할게.>
‘매주 연재라니. 우리 부부 관계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무, 물론, 처음에는 계약이었지만! 지금은 참사랑 중이라고.’
얼마 전에 사랑 고백도 했으니 쌍방통행 중인 것 맞겠지? 그때를 떠올리며 내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을 때였다.
똑똑.
“어?”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사람이 드나드는 문 쪽에서 들린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작은 주먹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문 밖에 겉옷도 입지 않은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있었다.
비명이 터질 것 같은 입을 막은 채 서둘러 창문을 열고 보니를 안아 들었다. 보니는 나무를 타고 창문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세상에, 보니.”
“어, 언니.”
얼마나 울었는지, 아이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내가 보니의 차가운 손을 주물러 주려고 하자, 보니가 다급하게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쥐고 소리쳤다.
“언니, 도와주세요! 찰스가 이상해요.”
“찰스가 이상하다니?”
“갑자기 인형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뭐?”
기껏해야 배가 너무 고프거나 몸이 아파서 여기까지 온 줄 알았더니, 찰스가 이상하단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어서, 설명을 더 듣고 싶었지만 보니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흐아앙!”
“보니, 눈물 그치렴. 내가 살펴보고 올게. 걱정하지 말고 안에 들어가 있어.”
나는 칼리마에게 챙겨 주라는 눈짓을 보냈다. 내가 직접 간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는지, 끅끅거리는 숨소리가 조금씩 진정되었다.
‘저렇게 우는 걸 보니, 정말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본데.’
자주 본 건 아니어도, 보니가 참을성이 많은 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서글피 울다니.
나는 서둘러서 복도를 가로질렀다. 당장 찰스의 상태를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걸어 다니는 하녀에게 물었다.
“찰스 도련님은 어디 있지?”
“찰스 도련님께서는 피아노 레슨 중이십니다.”
“피아노?”
그 어린아이가 검술, 예법도 모자라 피아노까지 배우고 있었다니.
‘나라도 도망치고 싶겠다.’
어디서 배우는지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세루리안과 왈츠를 연습하던 곳 구석에는 커다란 피아노가 있었다. 천이 덮여 있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인 줄 알았을 뿐.
그쪽에 가까워질수록 복도에 피아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렸다.
‘찰스인가 보다.’
열린 유리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자, 커다란 피아노 곁에 서 있던 콧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가 팔짱을 끼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루크 부인이시군요. 반갑습니다. 한데 무슨 일이시죠?”
“아, 안녕하세요. 연주 소리가 좋아서 이끌려 오다 보니 여기였네요.”
“흠흠.”
내 대답에 남자는 뿌듯한 듯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찰스도 별 이상 없는 거 같은데.’
오히려 수업에 비협조적이지도 않고 더 열중한 듯 보였다. 나는 피아노 옆으로 다가가 찰스에게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피아노를 잘 치는구나, 찰스. 지금은 어떤 곡을 연주하고 있는 거니?”
“네.”
그런데 찰스가 정말 이상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악보만을 보면서 손가락은 쉼 없이 움직였다. 내가 말을 하는데도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저기, 찰스?”
“왜요?”
재차 부르고 나서야 찰스는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짙은 푸른색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흥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너…… 왜 웃지 않니?”
찰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웃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리 말하고 잠시 고민하듯 이마를 찌푸렸던 찰스는 느릿한 어조로 덧붙였다.
“전에는 형수님을 보면 웃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기억이 나질 않아요.”
* * *
보니의 말대로였다. 찰스가 이상했다.
‘웃을 이유가 없다니? 예전에는 눈만 마주치면 웃었잖아.’
함께 화관과 꽃반지를 만들었던 기억은 까맣게 잊은 걸까? 아니면 그날 다시는 나와 어울리지 말라고 바네린느에게 혼이 나기라도 한 걸까?
‘아냐.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았어.’
아무리 조숙하다고 해도, 찰스는 다섯 살 어린이였다. 자신의 표정을 그렇게까지 잘 감출 수 없는 어린이.
부모에게 혼났다고 이렇게 순종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수업을 몰래 빠지고 정원에서 발견되지도 않았으리라.
선생에게 대충 인사를 건네고 나와, 나는 생각에 잠긴 채로 저벅저벅 걸었다. 그러다가 콩, 내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와 부딪쳤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더니, 다름 아닌 세루리안이었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에델.”
“세루리안.”
세루리안을 보니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나는 세루리안의 옷자락을 잡았다.
“찰스가 이상해요.”
인지하지 못한 사이, 내 입에서 아까 전 보니와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마치, 감정이 사라진 인형이 된 것 같아요.”
내 말에 세루리안은 눈을 찌푸렸다.
“일단 심각한 일인 거 같으니, 침실로 가서 이야기하지요. 당신에게도 진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네.”
세루리안의 말대로였다. 기묘한 불안감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세루리안과 방에 돌아와 보니, 칼리마가 보니를 데리고 어디론가 간 것인지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보니와 잠시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겠다는 짧은 쪽지만이 탁자 위에 남아 있었다.
하녀에게 따뜻한 물을 부탁한 뒤, 나는 세루리안과 마주 보고 앉았다.
세루리안은 내가 진정하길 기다리는 듯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물 한 잔을 다 비운 뒤에야 입을 열었다.
“짚이는 바가 있습니다.”
“네? 짚이는 것이 있다니요?”
“저도 비슷한 증상을 겪었으니까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세루리안도 같은 증상을 겪었다고? 혹시 감정을 잃어버리는 병이라도 존재하는 걸까? 그동안 유독 무뚝뚝해 보였던 것도 그래서라면…….’
놀랍기는 했지만,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고요한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그의 감정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내심 여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병인가요? 당신은 어쩌다 그 병에 걸렸는데요?”
“병은 아닙니다만…….”
잠시 망설이던 세루리안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에델. 그 원인에 대해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로어를 제외하고 그가 대답을 피하는 건 처음 보았다. 조금 의아했지만, 그가 말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다 싶었다.
나는 재차 묻는 대신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그 상태는 어떻게 해야 호전되는데요?”
“그것도 대답하기 어렵군요. 증상을 겪은 이후, 단 한 번도 호전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지요. 처음에는 감정만 사라질 뿐이었지만 나중에는 감각까지 흐려졌거든요.”
세루리안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안타까움과 실망이 혼재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세루리안이 턱을 쥐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단 하나, 당신과 마주하고 있을 때를 제외하면.”
“저요?”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니, 세루리안이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떼고 곧게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네. 당신과 함께 있을 때는 사라졌던 감각이 하나둘 돌아옵니다. 당신 곁에서는 감각이 예민해져서 어지럽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던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그랬군요. 그때 저한테서 대단한 악취가 나는 줄 알았다고요.”
“악취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을 텐데요. 오히려 그 반대였죠. 당신은 특별하다고 말입니다.”
“그, 그건.”
특별하다니. 그 말을 듣고 나니, 그가 담담한 어조로 내뱉었던 여러 가지 말이 떠올랐다. 향긋하다든지, 감각적이라든지.
‘그게 다 내가 특별해서 그랬던 거라고?!’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더한 고백처럼 들렸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심장이 다른 의미로 쿵쾅쿵쾅 뛰었다.
이렇게 부끄러워하면 모른 척해 줄 것이지, 세루리안은 도리어 고개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추며 갸웃거렸다.
“어째서 지금 얼굴이 빨개지신 겁니까?”
“그, 그야.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요.”
“저 때문입니까?”
“그…….”
그걸 말이라고 하나!
너무 부담스러우니 좀 떨어져 달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방문이 활짝 열렸다.
“에델, 에델 아지안!”
“세이지 부인?”
뜻밖의 인물이 내 방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던 보니처럼, 그녀도 늘 단정했던 모습과 달리 이리저리 흐트러져 산만한 차림새였다.
그녀는 내 앞에 앉은 세루리안이 보이지도 않는지, 들어와서 내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도와주세요! 당신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어요.”
“저기요, 잠깐만요. 갑자기 이게 무슨…….”
도대체 나와 언제 이런 유대를 형성했다고 달려드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 아들을 구해 주세요.”
우리 아들.
처음으로 찰스를 아들로 칭하는 말이 나와, 나는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세이지 부인의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당신은 공작 부인에게 대항할 수 있잖아요. 제가 도울게요. 제발 우리 아들을…….”
공작 부인의 가장 충실한 부하가, 내게 배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