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뒤, 하녀장은 파리한 얼굴을 한 채 밀랍으로 본뜬 열쇠를 가지고 바네린느를 찾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마님.”
“이게 뭔가?”
“…….”
다 알고 있으면서도 바네린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인 듯 하녀장이 내미는 열쇠 본을 받아들었다.
“고맙네, 하녀장! 내 부탁을 들어준 거군. 역시 믿을 사람은 그대밖에 없어.”
“……아닙니다.”
바네린느의 태도에 하녀장 불안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물러났다. 모시던 주인을 배신했다는 생각 때문에, 돌아가는 발걸음은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달리는 것처럼 빨라졌다.
하녀장이 떠난 뒤, 바네린느는 피식 웃으며 옆에 서 있던 세이지 부인을 칭찬했다.
“잘했어, 로라.”
세이지 부인에게 무슨 권한이 있어서 상황제까지 은근히 들먹이며 거금의 돈주머니를 턱턱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 모두 바네린느가 뒤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돈을 쓴 건 아닐까요?”
사실 바네린느는 완전히 루크 공작의 신임을 받지 못했고, 하녀장에게 건넨 막대한 자금은 상황제 부부의 내탕금을 몰래 당겨 쓴 것이었다. 세이지 부인은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최근 상황제 부부의 별궁행이 길어지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녀가 꾸준히 타 오던 돈 또한 점점 메마르고 있었다. 바네린느는 싱긋 웃었다.
“괜찮아. 그 정도는. 안 그래도 미리 매수해 두고 싶었어.”
그리고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저 여자는 이제 내 명령을 거절하지 못하겠지.”
막대한 돈을 받았으니, 이제 하녀장에게 빚을 지워 둔 셈이다. 그것이 상황제 운운에 두려움을 느껴서 넘어간 것이든, 그렇지 않든.
이 세상에는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로만 심판받는 일들이 여럿 있다.
‘차라리 공작에게 찾아가서 상담했더라면 어떻게든 일이 해결되었을 텐데.’
세이지 부인은 저와 같은 처지인 하녀장에게 연민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함께 악마에게 사로잡힌 처지에 연민을 보낸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졌기 때문이다.
하녀장이 밀랍으로 본을 떠 준 덕분에 복제 열쇠를 만드는 것은 정말 쉬웠다. 복제 열쇠를 손에 넣은 바네린느는 바로 그날 세이지 부인과 함께 서재를 향했다.
철컥.
하녀장이 약속을 충실히 지켰는지, 복제 열쇠를 끼우자 문은 우습도록 쉽게 열렸다.
마지막까지 제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서인지, 바네린느는 열쇠를 돌리는 것부터 문을 여는 것까지 모두 세이지 부인에게 시켰다. 세이지 부인은 몹시 불안해하며 물었다.
“황녀님, 이게 정말 옳은 선택일까요? 루크 공작님께서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 설령 황궁과 척을 지더라도.
하지만 바네린느는 달리 생각했다. 그건 안 들키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흔적이 남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에델 아지안이 어질렀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 지금이 적기야.”
바네린느의 뱀 같은 시선이 서재를 훑었다.
“그는 유난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서재에 누군가 들어오는 걸 싫어했어. 보통 그런 경우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지.”
루크 공작이 이토록 비협조적이라면, 그녀는 그의 비밀을 캐내어 흔들 것이다.
* * *
오늘은 세루리안이 이른 아침부터 황궁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아내 된 도리로, 아침 배웅은 나가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자꾸 감기는 눈을 비비며 세루리안의 뒤를 따라나섰다. 현관에서 인사를 하기 위해 마주 서 있으니, 세루리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더 주무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그래도 출근하시는 모습은 보고 자야지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직 사위는 어두웠고, 내 입에서는 뻐끔뻐끔 하품이 나왔다. 세루리안은 그런 내 어깨의 숄을 더 당겨서 꼼꼼하게 둘러 주었다. 그리고 잠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인사를 건네고 돌아설 줄 알았던 그가 계속 가만히 서 있으니,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그가 가볍게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이게 아쉽다는 감정이군요.”
“네? 아…….”
잠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리고 있던 내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나랑 헤어지는 게 아쉽다는 건가……?’
그 말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하다니.
어떤 애정 표현보다도 더 자극적이었다.
‘아아, 진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세루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헤어지는 게 아쉬운데, 에델은 너무나 즐거워 보입니다.”
“그, 그럴 리가요.”
즐거워서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니에요. 너무 창피해서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거라고요.
‘또 이런 오해를.’
상대는 내 얼굴을 보고 감정을 읽는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뜻으로 눈에 힘을 주고 세루리안을 마주 보았다. 세루리안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에델의 휴가는 언제까지지요?”
“정확한 기한은 정해 두지 않은 상태예요.”
“그럼 저도 조만간 다시 휴가계를 제출하겠습니다.”
세루리안의 말에 나는 물론이고, 우리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시중인들도 깜짝 놀랐다. 나는 세루리안의 등을 떠밀었다.
“아이참, 그런 농담 하면 다들 진짜인 줄 알아요.”
“저는 농담을 못…….”
“얼른 다녀오세요. 늦겠어요. 어서요!”
나는 과장되게 웃었다. 그러자 부드럽게 몸을 돌린 세루리안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그럼 조금만 더 데려다주십시오.”
아니, 저렇게 무뚝뚝한 얼굴로 이렇게 귀여울 수 있나.
저리 말하는 세루리안에게 고개를 흔들 수가 없어서, 그에게 소매가 붙들린 채로 함께 현관을 나섰다.
등 뒤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아생전에 도련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는 건 처음 봐요.”
“어릴 때도 그리 무뚝뚝하시던 분인데.”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사람이 변하게 되는 걸까요?”
‘아이고.’
칼리마가 만인의 앞에서 닭살 커플임을 알리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시선을 모으게 될 줄은 몰랐다.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파닥파닥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따라나서니, 세루리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아니, 부끄러워서요.”
내 대답에 세루리안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싫다는 의미입니까? 당신이 껄끄럽다면 앞으로 배웅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전 당신이 한 마디 한 마디 말할 때마다 너무 좋아요.”
나는 서둘러서 진심을 와르르 쏟아 냈다.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가 앞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세루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마주하고 있으니 다시 창피함이 밀려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윽……. 저 들어갈래요.”
그리고 도망치듯 물러나려는데, 세루리안이 팔을 붙들었다.
“잠시만요, 에델.”
그의 얼굴이 점점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니 눈이 빙빙 돌았다.
‘역시 이건 그거겠지?’
이렇게 서로 마주 보고 얼굴을 가까이 댈 때는 이유가 그것뿐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입맞춤?’
잔뜩 심장이 조여든 내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입술 대신, 장갑에 감싸인 세루리안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눈썹 윗부분을 톡, 건드렸다. 당황한 내가 눈을 깜빡거리니, 세루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 꽃잎이 붙었습니다.”
“네? 꽃잎?”
멍하니 반문했던 나는 뒤늦게 혼자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화르르 붉혔다.
“아, 꽃잎. 아. 아하하하. 아하하하.”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데도, 세루리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나는 큰 소리로 인사했다. 세루리안이 무뚝뚝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능글맞게 비슬비슬 웃으면서 나를 놀렸다면 정말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루리안을 배웅한 뒤, 주먹으로 머리를 콩콩 때리며 탄식했다.
‘주책이구나. 내가 주책이야!’
어쩌자고 눈을 감았단 말인가. 그 딱딱한 남자가 보는 눈이 많은 야외에서 입을 맞출 리가 없는데 말이다.
민망하고 당황한 마음 때문에 잠은 저 멀리 달아난 뒤였다. 그렇게 한숨을 폭폭 내쉬면서 시간을 보냈더란다.
시간이 흐른 뒤, 날이 밝아서 날 찾아온 칼리마는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 같았다.
“소문은 다 들었어요, 마님. 오늘 현관에서 세상 달달하게 배웅하셨다면서요? 온 저택이 그 이야기로 시끄럽더라고요!”
“……그 얘긴 안 하면 안 될까요, 칼리마?”
“네? 단장님이 자기도 휴가계 내고 쉬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그거 가지고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세요?”
그것만이면 부끄러울 이유가 없지, 암.
‘내가 입 맞추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전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
차마 말 못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눈치가 빠른 칼리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더 음란한 이야기가 있나 보군요.”
“으, 음란이라뇨! 절대 아니거든요!”
“빨리 말해 보세요. 뭡니까.”
“아니라니까요!”
이러다가 나 혼자 민망한 일이, 우리 둘이 민망한 일로 둔갑하게 생겼다. 나는 도망치듯 방에서 나왔다.
“저, 저는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무슨 짓을 했길래 그렇게 빨개졌어요? 알려 주고 바람 쐬세요!”
“몰라요!”
하여간 칼리마는 너무 짓궂다니까.
홧홧하기만 한 얼굴에 손부채질하면서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세루리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걸을 생각이었는데.
“얘들아, 너희 뭐 하는 거니?”
수풀 속에서 찰스와 보니를 만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