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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60)화 (60/138)

세루리안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것 같으면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서 다행이야.’

그가 단단히 쌓은 벽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내 마음을 단단히 붙들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왜 제가 힘들 거라고 단정하세요?”

오히려 내가 그를 곧게 직시하니, 세루리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전, 제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먼저 감정이 몹시 둔한 편이죠.”

그런 특징까지 포함하여 모두 그 자신 아니던가. 그것은 충분한 대답이 아니었다.

내가 가만히 그를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조금 더 말을 고르다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런 점이 언젠가 당신을 지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치고 힘들 때는 언제든지 당신 곁을 떠나라고요?”

세루리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에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 정말.”

결국 돌고 돌아서 나를 배려해서 그런 것이었다.

만약 저 말만 듣고 화를 내거나, 저 남자의 마음이 내 마음보다 더 크지 않다며 실망하고 물러섰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엄마, 정말 고마워요.’

엄마가 했던 말 중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들은 지나치게 말을 생략해. 화내기 전에 꼭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따져 물어보렴. 엄마처럼 먼저 화내지 말고.”

이게 다 아빠에게 시달려서 얻은 경험이겠지? 나는 속으로 엄마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내가 그러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화났습니까?”

“내가 왜 화를 내겠어요. 답답해서 그래요.”

답답하다는 내 말에 세루리안이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저 무표정한 얼굴이 어쩐지 시무룩해 보인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자신의 장점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예?”

세루리안은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와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답답하다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는 손을 놓고 세루리안의 팔에 팔을 끼웠다. 갑자기 내가 팔짱을 낄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자, 세루리안은 조금 흠칫거렸지만 물러나진 않았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나는 조곤조곤 말했다.

“난 당신이 좋아요. 처음에는 당신이 헤어져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이혼 도장을 찍어 줄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에델.”

내 이름을 부르는 세루리안의 목소리가 좋았다. 특유의 억양도,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도.

“당신은 어때요? 여전히 공작이 되면 나와 헤어지고 싶나요?”

“그건 아닙니다.”

세루리안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리고 조금 신중한 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제가 어떤 감정인지, 표현하긴 어렵습니다.”

세루리안의 연한 푸른 눈동자에 내가 떠올랐다. 마치 작은 수조 안에 선 느낌이었다. 나를 곧게 바라보며, 세루리안이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내뱉었다.

“당신에게 닿으면, 표정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온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도 같고, 또 한없이 부드러운 쿠션을 안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이었다. 그는 언제쯤 깨달을까. 그가 이렇게 담백하게 내뱉는 단어와 문장들이 내게 얼마나 낯간지럽게 들리는지를.

“그런 감각을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는지 아나요?”

세루리안은 또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사랑이요. 당신은 날 사랑하고 있어요, 세루리안.”

내 말에 세루리안의 눈동자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에델, 저는…….”

“쉿.”

그가 무슨 혼란을 느끼는지 나는 모른다. 감정이란 그 사람 고유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손을 마주 잡은들, 같은 깊이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신은 나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다고 했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 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전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세루리안의 손바닥을 천천히 내 가슴 위에 올렸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내 귓속까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잠시 지금 순간의 모든 것을 뇌리에 새기듯 가만히 있던 세루리안은 은은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그러하다면…… 저도 사랑합니다, 에델.”

이 순간 내가 가장 듣고 싶던 한마디였다.

* * *

에델과 말다툼을 벌인 뒤, 방으로 돌아온 바네린느는 곧장 하녀장을 불렀다. 하녀장은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바네린느에게 인사를 올렸다.

“다녀오셨습니까, 마님.”

“그래. 내가 없는 동안 집안에는 별일 없었는가?”

“예.”

하녀장은 월급 외에도 바네린느에게 꾸준히 남편의 병원비를 후원받고 있어, 바네린느가 천사가 분명하다고 칭송하는 열렬한 추종자 중 한 명이었다.

“자네에게 무어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서운한 이야기를 들었다네.”

내리깔고 있는 눈가는 이미 눈물로 촉촉했다. 그녀는 밝은 척 미소를 지으며 하녀장에게 물었다.

“각하께서 에델에게 각하의 서재 열쇠를 주었다면서?”

“그건…….”

제가 늘 예찬하는 바네린느의 서글픈 모습에 하녀장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움과 안타까움이 어지러이 섞여 들었다. 바네린느는 힘없이 미소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내 눈치를 볼 필요 없네. 에델이 아까 응접실에서 내게 보란 듯이 자랑을 하더군.”

“세상에. 그렇게 무례한 짓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바네린느가 모든 사용인을 물리고 에델을 응접실에서 독대한 것은 마음껏 경고하고 서재의 열쇠를 살펴보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만약 에델이 자신의 유도신문에 걸려들지 않았을 때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녀장의 대답에 바네린느는 답을 얻었다.

‘서재 열쇠를 받았다는 것이 정말이구나. 세이지 부인이 말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아는 폴 루크는 본인의 영역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공간을 내줄 사람이 아니었다.

이건 곧 에델이 폴 루크에게 특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바네린느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아무 근거 없이 건방지게 행동한 것이 아니군.’

폴 루크가 그동안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이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일단 에델 아지안을 직접 건드리는 건 자제해야겠어.’

에델에게는 여차하면 네게 폭력적인 수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랬다가는 루크 공작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서재 열쇠에 집중할 때였다. 루크 공작이 그렇게까지 타인의 출입을 허하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비밀이 있는 게 확실했다.

‘그리고 열쇠가 각하의 품에서 나온 지금이 바로 기회지.’

바네린느는 눈물을 찍어 내며 울먹거렸다.

“전부 내가 부족한 탓이네.”

“그럴 리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님.”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는 목소리에, 하녀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바네린느를 달랬다.

잠시 눈물을 흘리던 바네린느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하녀장에게 하려던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좀 의아한 게 있네, 하녀장. 누구에게 털어놓기 무엇한 이야기지만 그대는 내가 특별히 신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제 입이 무거운 걸 아시지 않습니까.”

추종자로서 특별하다는 말을 들은 하녀장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반짝였다.

잠시 말을 고르듯 머뭇거리던 바네린느가 작은 목소리로 하녀장에게 속삭였다.

“자네는 각하께서 정말로 그녀에게 서재 열쇠를 주었다고 생각하나?”

“예?”

뜻밖의 말에 하녀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델이 서재에서 나오는 장면은 이미 여러 사람이 목격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지?’

하녀장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바네린느가 정확한 어조로 속삭였다.

“사실 나도 서재 열쇠를 가지고 있네. 방해하지 말라고 하셔서 들어가지는 않지만 말이야. 안주인으로서 관리 차원이지.”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그럴듯해서 술술 귀에 녹아드는 말이었다. 바네린느는 교묘하게 거짓을 섞었다.

“공교롭게도 내 열쇠가 사라진 지금, 에델이 열쇠를 받았다고 해서 말이야.”

“……네?”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녀장은 창백하게 질렸다.

‘설마 마님의 열쇠를 훔치고 그렇게 보란 듯이 잘난 척을 했단 말인가.’

별생각 없이 마주했던 에델의 얼굴이 사악한 뱀처럼 느껴졌다. 바네린느가 절대로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믿기에 그녀는 손쉽게 함정에 걸려들었다.

심지어 상황조차 바네린느의 거짓말에 척척 잘 끼워 맞춰졌다.

“아마 내가 황궁에 입궁한 틈을 타 일을 저지른 모양이야. 아까 잠시만 보여 달라고 부탁했는데 나에게 화만 내었다네.”

“어떻게 마님께 화를 낼 수가 있지요! 교만이 머리끝까지 올랐군요!”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보통 지적을 받으면 당황해 화를 낸다지. 당혹스러운 건 나도 이해한다네.”

응접실에서 큰 소리가 난 것을 들은 증인 또한 여럿이었다. 하녀장은 그 소란을 에델이 열쇠를 훔친 뒤, 돌려 달라는 말에 발끈해서 되레 화를 냈다는 걸로 인식했다.

바네린느는 씩씩거리는 하녀장에게 은근한 어조로 부탁했다.

“그러니 하녀장, 그대가 어떻게 생긴 열쇠인지 봐 주면 안 될까? 정말 내 열쇠인가 궁금해서 그러네. 청소하다가 슬쩍 보아도 좋고. 그대에게는 나보다 기회가 많지 않겠나.”

“그럼요. 그 일은 제게 맡겨 주세요.”

하녀장은 바네린느에 대한 충심과 거짓말쟁이의 가면을 벗겨 버리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제가 의도한 바를 모두 이룬 바네린느는 진이 다 빠진 사람처럼 몸을 소파에 묻으며 말했다.

“그리고 안정제 좀 가져다주게. 험한 소리를 들었더니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는군.”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녀장은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그녀의 등 뒤에서 바네린느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손바닥에 올려 두고 조종하는 건 그녀에게 너무도 간단했다. 예전에도,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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