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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59)화 (59/138)

“……네?”

갑자기 확연히 바뀐 분위기에, 그녀가 본래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아는데도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나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오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런 속이 빤한 거짓말을 할 정도로 마음이 급했던 거 아니니. 내가 자비로울 때 거짓임을 고하고 용서를 구하렴.”

나를 향한 하대에 내 기분도 엉망이 되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봐요, 공작 부인. 당신이 황궁에 있던 시절과 혼동하나 본데, 내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녀가 내게 함부로 하대할 수 있었던 건 그 시절뿐이었다. 이제 나는 평민 황궁서기관 에델 아지안이 아니라 에델 루크 부인이었다.

내 대꾸에, 바네린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혼동? 내가 뭘 혼동하고 있다는 거지? 격에 맞추어 대접하고 있는데?”

“날 함부로 대하는 것이 격에 맞는 거라고요? 당신의 인품이 그 정도인가 보군요.”

지지 않고 또박또박 대꾸하는 나를 보며 바네린느가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잘도 빈정거리네. 그동안 그 입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참았나 모르겠어.”

“예의를 차린 거죠. 누구처럼 안하무인이 아니니까요.”

목격자가 없으니 나도 마음껏 그녀에게 퍼부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마디 말이 사납게 오갔을 때였다.

그녀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보여 줘, 서재 열쇠를. 나도 가지고 있으니 내 것과 비교하면 확실하겠구나.”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가 왜 어울리지 않게 저열히 나를 도발했는지 깨달았다.

‘공작님의 서재 열쇠가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었던 거야.’

그걸 훔치든 무얼 하든 생김새를 알아야 뭐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녀의 주장대로 루크 공작이 그녀에게 서재 열쇠를 주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굳이 시종들을 다 내보내고 단둘이 있을 때 그 열쇠를 보여 달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쉽게 넘어갈 줄 알고?’

물론, 열쇠는 내 품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대며 시치미를 떼었다.

“열쇠는 지금 없어요.”

“뭐?”

“저는 조금 전까지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식사 자리에 귀한 것을 들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내 말에 바네린느는 보란 듯이 비웃음을 지었다.

“역시 허락받았다는 것은 거짓말이구나? 불안해서 방에 두지 않았을 텐데.”

“저택에서 불안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

본의 아니게 이 말을 정말 많이 하게 되는구나. 사실은 불안해서 편지 한 통도 시종에게 맡기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몸을 돌려서 바네린느가 닫았던 문고리를 잡았다.

“저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싶은가 본데,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당신에게 거짓말쟁이로 몰린들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으니까요.”

“에델 아지안.”

바네린느가 경고하듯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피식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는 이제 에델 루크랍니다, 공작 부인.”

내 빈정거림에 바네린느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려보았다. 으스스한 목소리는 몇 해 전 그녀가 나에게 처음으로 본색을 드러냈던 때와 닮아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내가 여기서 칼로 널 찔러 죽인들 폴 루크, 그 남자가 눈 깜짝이나 할 줄 알아?”

본색을 드러내기 무섭게 폭력에 의지해 협박을 일삼는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빈정거렸다.

“협박하시는 건 여전하네요. 하긴, 그러니까 그때도 성질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렇게 날뛰셨겠지요.”

“좋게 말할 때 네 발로 이 집을 떠나. 마지막 경고야. 멍청해서 경고를 못 알아들었으면 관에 못이 박힌 다음에나 깨닫게 되겠지.”

내게 멍청함을 논하다니,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악마처럼 영리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말씀하시는 걸 보니 답답하네요.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또 하게 만드시고.”

“감히 내게…… 뭐라고?”

“저는 에델 아지안이 아니라 에델 루크에요. 그때 저는 갓 성인이 된 상태였고, 지금은 잔뼈가 굵어진 공작가의 작은 마님이지요.”

나는 똑바로 그녀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때의 저와는 다르다고요. 당신이 더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지 못하는 것처럼.”

“…….”

바네린느는 입을 다물긴 했지만 불타오르는 푸른 눈동자가 절대로 반성하지 않고 있음을 선명히 보여 주었다.

이 여자와 더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문고리를 돌렸다.

“선물이라더니 정말 볼품없군요.”

문이 조금 열렸을 때였다. 내 등 뒤에서 바네린느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이렇게 말하고도 무사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바네린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늘린 채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입을 놀린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갈기갈기 찢어서 후회의 말도 못 내뱉도록 만들어 줄 거니까.”

나 또한 그녀를 향해 딱딱한 어조로 경고했다.

“당신이 뱉은 말, 그대로 당신에게 돌아갈 거라는 거 명심해야 할 거예요.”

* * *

신경전을 벌이고 나니 속이 또 뒤집어졌다.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서 끙끙거리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작은 약병을 건네며 내 곁에 앉았다.

“여기 소화제입니다.”

“고마워요.”

지금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이었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서 약병을 받아 들었다. 쓴맛을 참고 홀딱 들이켜니, 세루리안이 잘했다는 듯이 내 입에 작은 캐러멜을 쏙 넣어 주었다. 그것을 오물거리며 나는 피식 웃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군요.”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요.”

첫 가족 식사 때였나. 그때와 비교하면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은 것도 같고.

내가 쓰린 위를 부여잡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살짝 상체를 숙여서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당신이 이렇게 축 늘어져 있습니까?”

“별말 아니었어요. 그냥 그런, 그 사람이 할 법한 말?”

“그냥 그런 말이 아닌 거 같은데요.”

무뚝뚝한 표정인데도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래서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여유를 잃고 퍼붓는다는 건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뜻 아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고무적이네요.”

만약 내가 정말 밟아 죽여도 상관없는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면 굳이 그녀가 나서서 그런 말을 퍼붓지도 않겠지. 결국 그녀 자신의 조급증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가슴을 펴고 으스대며 덧붙였다.

“그리고 저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 않았어요. 아주 당당하게 받아쳐 주었다고요.”

내 말에 세루리안은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고 한 글자만 내뱉었다.

“네.”

“……그렇게 성의 없이 대답하지 말고요. 빨리 용맹스러운 나를 칭찬하란 말이에요.”

내가 바네린느에게 쏘아붙였다니까! 할 말 다 했다니까!

그런 의미로 턱을 치켜들고 으쓱거렸더니, 세루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내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당신처럼 착한 사람이 뭐라고 대답했을지 안 봐도 훤합니다.”

“네? 저 하나도 안 착한데…….”

“원래 착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하긴, 나쁜 사람들은 착하다고 말 안 해도 스스로 착하다고 하지.’

사기꾼이 자기가 사기꾼이라고 하는 거 보았나. 하지만 세루리안의 말대로 착한 사람들은 대체로 칭찬을 들으면 별거 아니라고 손을 내젓기 마련이다.

‘나는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내가 피식피식 웃으니, 세루리안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되니까 공작 부인이 부르면 혼자 가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면 칼리마를 꼭 대동하고요.”

무뚝뚝한 얼굴을 한 주제에 내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은 따뜻했다. 나는 강아지처럼 세루리안의 손길에 머리를 내맡기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제가 죽어도 루크 공작님은 눈 깜짝 안 할 거라고 빈정거리긴 하더라고요.”

“그런 말을.”

세루리안의 목소리에 은은한 분기가 어렸다. 세루리안의 맞장구에 힘입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툴툴거렸다.

“아무리 공작님이 집안일에 무심하다고 해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때려죽여도 아무렇지 않으실까요? 너무 공작님을 냉혈한으로 보는 거 같죠?”

“…….”

그런데 내 말에 대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설마 진짜로 공작님은 관심이 없나요?”

“각하에 관해서는 저는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저런.”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야. 그렇게까지 무심하면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내가 겪어 본 바로는 그렇게까지 무심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았는데.’

아니면 정말 내게만 특별한 걸까? 그렇다고 생각하니 조금 슬퍼졌다. 내가 겪은 조금의 다정함조차 특혜라면, 그조차도 겪어 보지 못한 세루리안은 어떻게 지냈을까 싶어져서.

내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내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의 일이라면 다를 겁니다. 게다가 제가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나 자신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런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걱정은 안 해요. 그저 당신이 정말 외로웠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저 말입니까?”

“네.”

세루리안이 루크 공작이 무심한 분이라고 딱 잘라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경험한 공작이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 아니겠나.

‘하지만 세루리안에게는 유일한 가족이잖아.’

나는 엄마가 다정한 사람이라 외로울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세루리안은?

‘혹시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조차 모른 채 지금이 되어 버린 거 아닐까.’

나는 세루리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곁에 있을게요.”

당신이 외롭지 않도록, 당신의 곁에 오래오래 있겠어요.

내 고백에, 세루리안은 기쁘다기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내 곁에 있는 것이 힘들면 언제든지 떠나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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