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의 말에 나는 잠시 서글퍼졌지만 이내 활짝 웃었다.
“엄마에게는 비밀로 하면 되지. 사실 나는 친구가 없어서 외롭거든. 착한 보니가 나와 함께 먹어 줘.”
착한 일이라는 말에 보니는 잠시 망설였다. 나는 다시금 보니를 부드러운 어조로 꼬셨다.
“그리고 내가 친구가 없다는 건 비밀이다.”
전부 비밀이라는데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으랴. 보니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응!”
혹시나 그들이 돌아왔을 때, 보니가 나와 만난 것을 들켜 혼이 날까 봐 나는 아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로브를 씌워서 정원 구석으로 데리고 나왔다.
식사로 준비한 음식들을 모두 깨끗하게 비우고, 다람쥐처럼 볼이 터지도록 열심히 쿠키까지 먹는 보니를 보며 나는 턱을 괴었다.
‘보면 볼수록 바네린느와 닮았네.’
가만히 있을 때보다 움직이니 더더욱 바네린느와 닮은 부분이 보였다. 음식을 먹을 때 움직이는 입매라든가, 기다란 목 같은 부분 말이다. 자세히 관찰하고 있으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서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구나.’
누군가 보니를 자세히 관찰한다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나라면 차라리 저택에서 먼 곳으로 보낼 텐데.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닐 거 아니야.’
황궁에서 출산을 도울 정도라면 아이를 아예 숨겨 준다고도 했을 거 같았다. 이 저택 밖에 두었다면 들킬 일도 전혀 없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그것이 오히려 더 불안했을지도 몰라. 사람을 믿지 못하니까.’
밖에서 아이를 키우던 사람이 이 아이를 데리고 협박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나. 바네린느 입장에서는 최대한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 아이를 두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 아이가 감옥살이나 다름없이 지내야 한다니.’
이 아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나 싶었다. 내가 보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얼굴에 비스킷 가루를 잔뜩 묻힌 아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니, 맛있게 먹는 모습이 예뻐서.”
나는 빙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제 배가 차니 여유가 생겼는지 보니는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언니는 누구예요?”
“나? 나도 여기 사는 사람이지.”
“여기 살아요?”
“응. 얼마 전에 이사 왔어.”
“이사?”
계속 여기에서만 지냈던 아이는 이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나는 조곤조곤 아이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사는 집을 옮기는 걸 말하는 거야. 원래는 우리 집이 아닌데, 이번에 여기로 집을 옮겨 왔어.”
“그렇구나. 그럼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살 수도 있어요?”
“그럼. 그리고 작은 집도 있고 큰 집도 있지.”
원래 내가 살던 집은 이곳에 있는 별채보다도 작았다.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보니가 양 뺨을 발그레 붉히며 말했다.
“나, 한 번도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어요. 나가서 보고 싶어요. 다른 집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이거보다 큰 집은 거의 없어.”
당연히 공작저 같은 큰 저택이 많을 거라 생각할 것 같아서 그렇게 대답했더니, 보니의 대답이 내 눈시울을 붉어지게 했다.
“나는 작은 집이 좋아요. 그러면 엄마가 바로 내 옆에 있을 거 아니에요.”
“…….”
바라는 것이 엄마가 항상 곁에 있는 거라니.
이 아이가 말하는 엄마가 바네린느가 아니라 세이지 부인일 것 같아서 더더욱 안쓰러웠다.
내가 붉어진 눈을 손등으로 찍었을 때였다.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보니가 귀를 쫑긋 세우는 작은 짐승처럼 몸을 일으켰다.
“어?”
“어?”
그런데 비슷한 소리가 반대편에서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수풀 사이에서 나온 것은 찰스였다.
찰스는 쭈뼛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혀, 형수님.”
“찰스.”
왜 이 아이는 덤불을 헤치고 튀어나오는 걸까. 웃어야 하는 건지, 난감해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찰스는 내 옆에 앉아 있는 보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쟤는…….”
보니는 여전히 후드를 쓰고 있어서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생김새가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도 찰스는 계속 그쪽을 흘긋거렸다. 마치 보니를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한두 번 마주치기는 했겠지. 아무리 꼭꼭 숨기려고 해도 말이야.’
보니라고 이름을 알려주기도 뭐해서 나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제 친구예요.”
내 대답에 보니의 작은 어깨가 들썩거렸고, 찰스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아이들을 같이 두어도 되나.’
계속 보니를 곁눈질하면서 주변을 왔다 갔다 하기에 결국 나는 찰스에게 권했다.
“여기 앉아서 함께 차를 마시겠어요?”
“좋아요.”
찰스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꾸 보니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또래를 만나 놀고 싶어서 안달 난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혹시 오늘도 수업을 빼먹고 도망친 건가요?”
“……공부하기 싫어요.”
내 질문에 조금 놀란 듯 어깨에 힘을 준 찰스는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열심히 해야 해요. 근데 하기 싫어요.”
하기 싫은 게 당연하지. 내가 찰스 나이였을 때는 만날 진흙탕에서 옷을 다 버리도록 놀았던 거 같은데.
“찰스 나이에는 당연한 거 아닐까요? 그래도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게 의젓하네요.”
내 말에 보니도 찰스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얘는 몇 살인데요?”
“어…….”
얘라니. 이렇게 막 불러도 되는 걸까.
내가 뭐라고 이 아이들을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찰스가 말을 더듬으며 얼른 손을 들었다.
“나, 나는 다섯 살인데?”
“나도 다섯 살인데!”
“우와.”
나이를 트고 나더니 둘은 순식간에 저들끼리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친해지네요.”
내게 말을 건 것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칼리마였다. 칼리마는 이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친해지지 못하게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그러게요…….”
하지만 저렇게 둘이 잘 어울리는데. 바로 가까운 곳에 친구를 두고도 놀 수 없는 아이들이 가여웠다.
잠시 두 아이를 바라보던 나는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난 잘 모르겠어요, 칼리마. 두 부인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착잡해하는 나와 달리 칼리마의 대답은 명쾌했다.
“둘은 가진 것이 많고, 그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그랬겠지요.”
“그래도요.”
바네린느가 갈색 머리 아이를 낳아서 얻게 될 오명, 추락할 그녀의 명예를 떠올리면 아득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 아이들이 거짓된 삶을 살아야 할 정도로 그것들이 무거운 것인가 하면.
‘난 귀족이 아니라서 그럴까. 역시 잘 모르겠어.’
그저 아이들이 가엾을 뿐이었다.
* * *
해가 뉘엿뉘엿해질 무렵, 세루리안이 부부 침실에 찾아왔다. 내가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재잘재잘 떠들었더니, 세루리안은 턱을 괴고 대답했다.
“하루를 즐겁게 보내신 것 같군요.”
“아무래도 공작 부인이 안 계시니까요.”
바네린느와 세이지 부인이 저택에 있었다면 이렇게 느긋하게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 대답에 세루리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정말 잘생겼다.’
옆얼굴을 봐도 완벽하고, 정면을 봐도 완벽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서 정신없이 세루리안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오늘 만났던 아이들과 오버랩되면서 어린 세루리안은 어땠을지 궁금증이 피어났다.
‘그런데 어렸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워.’
무뚝뚝한 지금 모습이 머릿속에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된 탓인가, 상상이 잘 되질 않았다. 나는 덩달아 턱을 괴며 물었다.
“당신은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요?”
“저 말입니까?”
“네. 사소한 추억이라도 좋아요. 뭐라도 알려 주세요.”
“글쎄요.”
세루리안의 이마에 주름이 지어졌다. 어쩐지 귀여워 보여서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눌렀다가는 다시는 팔이 닿는 거리에 앉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면 너무 서운할 것 같았기에.
‘연습은 손바닥과 손가락 끝을 잡는 것까지 했으니까 그 이상 넘어가지 말아야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진지하게 고민에 빠져 있던 세루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주 어릴 때는 잘 웃는 아이였을 겁니다. 즐거워했던 기억은 있거든요.”
그의 말투가 조금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본래도 자신을 소개하는 것에 서툰 사람이니 말이다.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와, 몹시 귀여웠겠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즐거웠던 기억은 있지만 웃는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
하지만 당신, 나랑 있을 때 몇 번 웃었는데.
‘혹시 본인도 모르나. 자신이 지금 웃고 있다는 걸.’
내가 조금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세루리안이 내게 물었다.
“에델은 어떤 아이였습니까?”
“저요? 저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였죠.”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기억이 나는 최초의 순간부터 엄마와 나는 서로 끈끈하게 의지해 왔다. 내겐 엄마가 전부였다.
“아빠는 없었지만 외로운 줄도 모르고 자랐어요. 엄마가 워낙 재미있는 분이셨거든요.”
내 말에 세루리안이 조금 가벼운 어조로 덧붙였다.
“봉사활동도 많이 하시고요.”
“네! 맞아요.”
짝, 박수 치며 맞장구를 치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런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지난번에 이야기해서 기억하는 건가요?”
“글쎄요.”
세루리안은 드물게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얼른 말해 달라고 하려고 할 때였다.
“실례합니다.”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처음 보는 낯선 하인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각하께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십니다.”
루크 공작의 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