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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52)화 (52/138)

“비밀이요?”

“…….”

노엘은 한동안 대답 없이 눈물만 흘렸다. 잠시 입술을 깨물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에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비밀인지 말해 주실 수 있나요?”

“안 돼요. 말하면 정말 죽일 거예요. 저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도요.”

도대체 무슨 비밀이길래.

에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칼리마가 싱긋 웃으며 나섰다.

“잠깐만요. 저랑 노엘 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까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그리 말한 칼리마는 레오프리드 신부에게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레오프리드 신부님은 이 집에 안 오시는 게 좋겠어요. 분명 신부님의 뒤를 밟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미행은 확인하고 왔습니다.”

“그렇다고 해도요.”

“……알겠습니다.”

칼리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레오프리드 신부는 밤이 늦었다며 고아원으로 돌아갔다.

“전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

칼리마를 신뢰하는 에델은 순순히 집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여전히 칼리마가 지내던 텐트가 쳐져 있었기 때문에 간단히 물을 끓여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칼리마는 찻주전자를 올리는 에델을 창문 너머로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노엘에게 물었다.

“당신은 알고 있는 거죠? 바네린느 황녀가 낳은 아이의 친부를. 그래서 뒤늦게 당신의 입을 막으려고 한 거예요. 그렇죠?”

“그건…….”

노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에서 이 사실을 긍정해야 할지, 혹은 부정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칼리마는 자신의 추리가 모두 맞아떨어지자 희열을 느끼며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그 친부는 파르메 대공. 맞습니까?”

“어, 어떻게…….”

계속 핵심을 찌르자, 노엘은 결국 부정하지 못하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칼리마는 쯧, 혀를 찼다.

파르메 대공은 다름 아닌 선선대 황제의 아들이었다. 선선대 황제가 서거할 당시 대공의 나이가 너무 어려, 먼 친척이었던 지금의 상황제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니 혈통적으로 파르메 대공은 테오도르 황태자보다 황위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런 남자와 유독 친근하게 지내는 것도 모자라, 그 아이까지 가졌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천사 같은 얼굴로 생각보다 더 욕심을 부리셨네.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했을까.”

칼리마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노엘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황녀는 당신을 죽이려고 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녀의 비밀을 전부 알고 있으니 말이에요.”

마치 너도 공범자다,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에 노엘은 울며 그 자리에서 엎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비통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살려 주세요. 저는 맹세하건대 아무것도 몰랐어요!”

노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시간을 돌릴 수 있으면 좋겠노라고,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 모른다. 기왕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바로 그때.

“노엘, 날 좀 도와주지 않을래? 내가 사모하는 분이 있는데, 아바마마께서는 내게 정략결혼만 권하셔.”

하늘처럼 고고하던 황녀가 또래 소녀처럼 뺨을 붉히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던 때 말이다.

황녀궁에서 존재감 없는 하녀였던 노엘은 황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 왔을 때,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다. 그래서 기꺼이 두 사람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파르메 대공을 몰래 만날 수 있도록 도운 것도, 황녀가 자리를 비웠을 때 자리를 지킨 것도, 피임차를 구해 준 것도.

“불쌍한 황녀님을 돕는다고 생각했을 뿐이란 말이에요!”

노엘이 도울 때마다, 바네린느 황녀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이 눈물을 글썽였다. 때때로 한숨을 내쉬며 하소연할 때도 있었다.

“한 나라의 황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있지만, 그분의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어.”

노엘로서는 감히 알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이 신하로서 얼마나 큰 죄였는지.

피임차에 이상이 있었는지, 복용법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황녀가 임신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바네린느의 진실된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모시던 분을 도왔을 뿐인데 이렇게 목숨의 위협까지 당해야 한다니…….”

악마처럼 변한 여자는 거침없이 그녀를 폭행했다. 고무나무로 만든 매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에델이 지나가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를 떠올리며 노엘은 두 손을 벌벌 떨었다. 그런 노엘을 쳐다보며, 칼리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도 좋아하지 않던 사촌이었지만, 이렇게 민낯을 확인하게 되니 숨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여자는 교묘하게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요.”

하지만 마냥 피해자라고 하기엔 노엘이 저지른 일도 그냥 흘릴 수는 없었다. 칼리마는 그 부분을 날카로운 어조로 짚었다.

“당신은 모시던 분을 도왔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귀족이 아닌 무려 이 나라의 황녀지요. 당신은 그녀의 수족이었고요. 공작가의 후계 문제에서 혼자 자유로울 순 없을 거예요.”

“…….”

칼리마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노엘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거죠? 계속 이렇게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과거의 일은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칼리마의 물음에, 노엘은 퀭한 눈으로 입을 벌렸다.

* * *

칼리마와 노엘의 이야기는 내 예상보다 짧게 끝났다. 잘 우러난 히비스커스차를 후후 불면서 마시고 있으니, 칼리마가 걸어 나왔다.

“이야기는 잘 되었나요?”

칼리마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굳어 있었기에,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칼리마는 내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먼저 마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마님이 아니었다면 저도 이 사건을 그냥 별거 아닌 해프닝으로 여겼을 거예요.”

“아, 아니에요. 저야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움직인 일인데요.”

내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을 때였다. 칼리마가 굳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염치없지만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될까요?”

“뭔데요?”

“……황실의 내막을 좀 더 살펴본 뒤 이야기를 해 드려도 될까요?”

황실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커다란 문제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

그 뒤로 칼리마는 입궁하고, 나 홀로 루크 공작가로 돌아왔다. 공작저의 정원을 걸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칼리마가 저렇게까지 정색하는 걸까. 아니, 공작가의 후계자가 바꿔치기 되었다는 것도 상당히 큰 문제이지만 말이야.’

신문사에서 세이지 남작의 얼굴을 본 뒤, 나는 보니가 바네린느의 소생이라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어째서 아이를 바꿔치기했는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라서? 하지만 여자가 가문을 잇는 일은 드물지만 존재하는걸.’

루크 공작가의 기반이 무에 있는 만큼, 여자 가주가 힘들긴 하겠지만, 찰스라고 별다른 재능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찰스는 다른 사람의 아이잖아. 그렇게라도 공작가를 손에 넣으면 무슨 이득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이유는 결국 하나뿐이었다.

두 아이 모두 다 공작님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

‘그렇게 말하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 갈색 머리 아이가 세상에 드러나면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이야기가 나올 것이 뻔하니까.’

터벅터벅 걷고 있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문득 내 앞에 있는 커다란 저택이, 감옥처럼 보였다. 나는 이 저택에 살고 있는 삭막한 표정의 남자를 떠올렸다.

‘공작님께서는 이 일을 전부 아시나? 알고 있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공작님의 마음이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나를 화나게 했다. 바로 세루리안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공작 위를 낚아채 가면 세루리안은…….’

입양아라고 손가락질당하면서도 공작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세루리안은 뭐가 되는 거란 말인가.

‘어쩐지 세루리안도 별 상관없다는 투로 행동할 것 같아.’

무표정한 얼굴로, 루크 공작 부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을 세루리안을 떠올리니, 괜스레 내 마음이 아팠다.

나는 현관에 들어서는 대신, 그 근처의 분수대에 앉았다. 그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돌아올 때만 해도 어둑어둑했던 하늘이 순식간에 남색으로 물들고, 별이 떠올랐다.

꽤 시간이 흘러서 손끝이 으슬으슬해질 무렵, 내가 기다리던 사람의 목소리가 울렸다.

“왜 여기 이렇게 앉아 있습니까?”

“세루리안.”

나는 활짝 웃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를 말입니까?”

“네.”

설레는 마음으로 여기 앉아 있는 내내 떠올렸던 그의 얼굴이건만, 막상 마주하자 마음이 아리듯 아파 왔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살짝 비틀거리니 세루리안이 내 팔을 꽉 붙들었다.

연한 푸른색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을 담아 나를 응시했다. 나는 빙긋 웃었다.

“요즘 얼굴 보기 어려웠잖아요.”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 건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잠시 그리 있던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약속을 어겼군요. 15분씩 계산해서 시간을…….”

“추궁하려는 게 아니에요.”

이 사람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내가 아무렴 바쁜 사람에게 15분 룰을 지키지 않았다고 화를 내려고 여기 앉아 있었을까.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예?”

처음에는 그의 노력을, 이 커다란 저택에서 홀로 외로웠을 그를 떠올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다고, 당신을 돕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초야가…….”

“예?”

하지만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것은 터무니없이 상관없는 말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초야 이후 부부 침실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잖아요!”

“……?!”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온 사람에게 이건 무슨 투정이야.

하지만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를 좋아하게 된 만큼, 그가 나를 홀로 내버려 둔 날만큼, 나는 외로웠던 것이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띄엄띄엄 말했다.

“다, 당신이…… 역시 내키지 않았던 건가 싶어져서…….”

“도대체 당신은.”

내 말에 세루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발끈해서 내가 뾰족한 눈으로 세루리안을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어?”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색으로 반짝였다.

“세, 세루리안?”

“꺼렸던 것이 아닙니다. 꾹 참고 있었던 거지.”

어둠 속에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그의 얼굴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저는 아직도 감정 조절에 미숙해서.”

한숨처럼 그리 중얼거린 남자는, 내가 대꾸하기도 전에 내 입술을 틀어막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이, 자신도 나만큼이나 몸이 달았다는 듯이.

탐욕스러운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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