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네린느가 칼리마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는 동안, 칼리마 또한 바네린느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냥 가식적이고 얄미운 계집애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에델의 사건을 보니, 그냥 가식적인 게 아니고 상대방을 교묘하게 괴롭히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 포도 주스를 쏟은 것도 고의일 수도 있겠어.’
대충 울며 얼버무리면 다들 착한 얼굴에 속아 넘어가니까. 그렇게 짚이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에델도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칼리마가 에델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집사가 칼리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포텐샤 영애.”
그것은 칼리마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후문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칼리마의 손님, 바로 바네린느에 대한 정보였다!
칼리마는 가벼운 걸음으로 공작저 후문으로 나섰다. 후문에는 두꺼운 후드를 쓰고 있는 큰 키의 남자가 있었다.
칼리마를 본 그는 조심스레 후드를 내렸다. 칼리마와 판에 찍은 듯이 똑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칼리마.”
바로 칼리마의 막내 오라버니, 세인이었다.
칼리마의 세 오라버니 중 둘은 기사가 되어서 특수부에 배속되었고, 셋째는 평범한 문관의 길을 걸었다. 포텐샤 가문에서는 드문 문관인지라, 그는 날개 돋친 것처럼 승진해서 지금은 황제의 보좌관 중 하나였다.
칼리마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와아, 만나서 반가워요, 오라버니.”
“뻔뻔한 건 여전하구나.”
세인은 입술을 비틀었다. 갑자기 폭탄 같은 편지를 보내서, 황제의 보좌관인 본인을 움직이도록 만들었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해맑게 웃는단 말인가. 칼리마와 따로 만난 것을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후드도 쓴 참이었다.
세인은 골치 아픈 여동생을 마주하고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언제까지 밖에서 겉돌 생각이냐?”
“겉돌다니요! 저는 하루하루 아주아주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걸요. 매일매일이 재미있어요.”
환하게 웃는 얼굴에 한 점 구김도 없는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는 했다. 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식장에서 플로린 영애를 밟아서 가루로 만든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어째서 동생이 건강하게 잘 지낸다는 소식을 이렇게 전해 들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세인의 말에 칼리마는 검지와 엄지로 브이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제가 우리 가문을 대표해서 참석했답니다. 잘했지요?”
“칼리마, 이게 칭찬으로 들리니!”
세상 어느 가문의 대표가 남의 경사에서 큰 소리로 말다툼을 벌인단 말인가. 게다가 이 결혼식에, 포텐샤 공작은 불참을 선언했다. 칼리마는 정확하게 제 아버지의 명령과 반대로 행동한 것이다.
‘물론, 가문의 입지나 소문을 생각하면 참석해 주어서 다행이지.’
이 나라의 양대 무인 가문인 포텐샤와 루크가 반목한다는 이미지를 남겨서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뭣보다 포텐사 경이 참석하지 않는 이유가 오로지 루크 공작이 싫어서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로 인해 플로린 가문과 풀어야 하는 숙제는 어떻게 할 것인데.’
동생이 세루리안 경의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그 부인의 시녀를 자청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포텐샤 공작은 머리를 싸매고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아버지를 떠올리던 세인은 헛기침을 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네 부탁대로 자료를 찾아보았다.”
“헤에.”
정보를 알아보았다는 데도 칼리마의 반응은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다. 동생에게 잔소리하는 것도 지친 세인은 한숨을 입안으로 삼키고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관련 자료는 누구도 열람할 수 없도록 금지하셨더구나.”
“이런.”
그건 칼리마가 원하지 않던 대답이었다. 칼리마는 혀를 끌끌 찼다.
“흠, 아이가 바뀌었대도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황궁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니까요.”
“함부로 발설하지 말거라.”
위험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재잘거리는 동생을 보고, 세인은 화들짝 놀랐다.
칼리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루크 공작 각하께서는 늘 시큰둥해하시니, 저라도 알아봐야지요.”
“도대체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루크 공작님께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가 없구나.”
딱히 다른 사람의 이해가 필요하지 않기에 칼리마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칼리마는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
“하여간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알아들은 거 맞니?”
칼리마는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었다. 세인은 가슴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으으, 도대체 언제까지 너 때문에 위가 아파야 하는 건지.”
칼리마는 오라버니의 신음을 흘려들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스스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가족들이 괜한 걱정으로 문제 삼고 있을 뿐.
오라버니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던 칼리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참. 한 가지 더 알아다 주셨으면 좋겠어요.”
세인은 지레 펄쩍 뛰어서 말했다.
“황실에 관한 건 안 된다고 했지?”
“황실이 아니에요. 에델 아지안 양의 신상 정보가 필요해요. 황궁서기관이었다고 하니 인사처에 인사 기록이 남아 있을 거예요.”
“흐음. 일단 알았다.”
상대가 에델 아지안이라고 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인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칼리마의 시선이 서늘했다. 칼리마가 세인에게 물은 건 특별한 게 아니었다.
‘황녀의 출산 때 곁에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데 뒤를 캐지 말라는 답이 왔다면 결론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이가 바뀌었군.’
세이지 남작 부인이 감추어 키우는 그 아이가 실제 공작 부인의 아이일 가능성이 커졌다.
* * *
루크 공작은 창틀에 앉아 있었다. 넓디넓은 창은 창틀 또한 작은 아이가 누워도 될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책을 보관하는 곳의 특성상 직사광선은 쥐약이었기 때문에,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곳에 앉으니 다람쥐처럼 쪼르르 돌아다니는 에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로 땋아 내린 긴 붉은 머리카락이 꼬리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워 죽겠다는 것이 얼굴에 묻어났다. 그녀가 입고 있는 진한 노란색 원피스 때문에 더더욱 발랄한 느낌이 나는 걸지도 모른다.
함께 의상실을 다녀온 이후, 에델은 곧잘 노란색 옷을 입었다. 그것은 루크 공작이 싫어하는 색상의 옷을 입어 거슬리게 하겠다는 에델 특유의 짓궂은 복수였으나, 타인에게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는 루크 공작이 그 의미를 알아차릴 리 만무했다.
오히려 그에게 그 노란 옷들은 다른 단상을 안겨 주었다.
“전, 노란색이 제일 좋아요.”
아주 머나먼 기억 속, 넘기면 먼지가 풀풀 피어오를 것 같은 추억의 한 장면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노란색 장미를 안고 있었지. 작전 때문에 우연히 지나던 거리에서 만나게 된 여자는 노란색을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하면 옷도 노란색으로 지어 입으라고 말했더니, 깔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머리카락까지 노란빛이라, 노란 옷을 입으면 어색해 보일걸요.”
어떤 옷을 입든, 어떤 색을 걸치든 당신은 최고로 아름다운데.
헤어질 때까지 그 말 한마디를 해 주지 못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다고.
‘지긋지긋한 미련이군.’
루크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울렁거렸다.
닮은 점이 보이면 설레었다가, 또 다른 점이 보이면 실망했다가.
여자가 조촐하게 지낸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약간의 금액만 보내 주었을 뿐 일부러 간섭하지 않았다. 자신과 연관되는 것보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돌고 돌아서 다시 마주하게 되는 우연이란 또 무엇인가.
‘답답하군.’
루크 공작이 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언제 다가온 건지, 연한 녹색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반짝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흠칫 놀라서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그에게, 에델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저 방은 뭔가요?”
서가 사이에 작은 문이 있었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비밀의 문처럼 생긴 곳이었다. 루크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저긴 들어갈 수 없다.”
루크 공작의 말에 에델은 금붕어처럼 볼을 퉁퉁 부풀렸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어차피 못 들어가요. 자물쇠가 잠겨 있는걸요.”
“루크 공작가의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대답하고 나서 루크 공작은 슬쩍 비소했다. 가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아주 거창한 비밀이 있을 것 같지만, 저기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나쁜 것들뿐이었다.
‘저 끔찍한 것을 왜 나는 태워 버리질 못하는지.’
그것들을 떠올리면 감정 표현이 드문 그인데도 속이 꼬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에델은 해사하게 웃었다.
“와아, 모험소설 속 장면 같아요. 정말 그런 곳이 있군요.”
활짝 웃는 얼굴이 마치 해바라기 같았다. 루크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감정 표현이 풍부하군.”
“공작님하고 세루리안이 너무나 적은 거예요. 저는 보통이라고요.”
그 말에 에델이 다시 볼을 퉁퉁 부풀렸다. 카드를 뒤집는 것처럼 휙휙 바뀌는 표정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에델이 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하는 말에 루크 공작은 멈칫하고 말았다.
“세루리안은 감각이 둔한 건지 예민한 건지 모르겠어요. 가끔 냄새가 너무 짙다고 비틀거릴 때도 있거든요.”
“세루리안이?”
세루리안은 무감정을 동반한 무감각증이었다. 냄새는 물론이고, 맛도 잘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감각을 찾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에델이 생각하는 것보다 무거웠다. 루크 공작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에델이 화제를 돌렸다.
“읽고 싶은 책은 다 골랐어요. 다 읽은 다음에는 어떻게 하죠? 집사에게 건네면 되나요?”
루크 공작은 말없이 작은 물체를 에델에게 휙 던졌다.
“어?”
에델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날쌔게 그것을 잡았다. 그건 구리로 만들어진 둔탁한 모양의 열쇠였다. 루크 공작은 고개를 창밖으로 휙 돌리며 대답했다.
“이곳 열쇠다. 잘 잠그고 다니도록.”
“감사합니다!”
에델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휴가 동안 무얼 할까 고민이었거든요. 여기 있는 책을 몽땅 다 읽어 버려야겠어요.”
“…….”
그가 서재 열쇠를 주는 의미를 과연 에델이 알까.
‘그리고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건가.’
이건 죄책감인가, 그리움인가, 의미가 없는 행동인가.
루크 공작은 답을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