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털 뭉치 같은 것이 덤불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꼭 사막의 회전초 같았다.
“글쎄요.”
칼리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겁도 없이 저벅저벅 걸어가서 덥석 녀석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어라?”
“헉!”
그런데 이게 뭐람? 식물이 아닌 갈색 곱슬머리를 가진 어린 꼬맹이였다.
“너, 지난번에 본 그 아이 맞지? 누군데 여길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지?”
칼리마의 물음에 아이는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놔 줘! 놔 달라고!”
마구 휘젓는 팔다리가 칼리마에게 부딪쳤지만, 보기와 달리 힘이 아주 센 칼리마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누군지 알아야 놔 주지. 수상쩍은 사람을 공작저에 풀어놓을 수는 없어.”
“수, 수상쩍은 사람 아니야. 여긴 내 집이란 말이야. 우리 엄마도 여기 살아.”
“너희 엄마?”
“…….”
부모 이야기가 나오니, 아이는 다시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이대로는 원하는 정보를 조금도 얻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빙긋 웃었다. 까만 눈망울에 보송한 머리카락이 꼭 갈색 토끼 같았다.
“안녕, 아기 토끼야. 만나서 반가워. 나는 에델이라고 해.”
“나, 아기 토끼 아니야!”
“하지만 이름을 모르는걸. 네가 알려주지 않으니 내 마음대로 부를 거야. 아기 토끼가 싫다면 파랑해파리라고 부르면 어때?”
“둘 다 싫어! 내 이름은 보니라고!”
“보니.”
칼리마가 파랑해파리로 아이의 본명을 알아낸 나를 신기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나는 칼리마에게 손짓을 했다. 칼리마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고아원에서 하던 것처럼 무릎을 굽히고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보니, 여긴 어린아이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어떻게 들어왔니?”
“펴, 평소에는 밖에 나오지 않는데…… 오늘은 배가 고파서…….”
우물쭈물하는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잘 정돈된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가난한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배가 고파서 나왔다니 상황을 알기 어려웠다.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앉았던 매트를 가리켰다.
“그렇구나. 마침 샌드위치가 많이 남았는데 먹을래?”
“머, 먹을래.”
정말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보니는 햄스터처럼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보니와 함께 피크닉 매트에 앉았다.
보니는 게 눈 감추듯 후다닥 샌드위치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다람쥐처럼 오동통해진 볼살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저택에는 밖에 알려진 것과 달리 귀여운 아이들이 많이 사네요.”
“그러게요.”
칼리마는 팔짱을 끼고 오물거리는 보니를 쳐다보았다. 나는 물끄러미 보니의 얼굴 이모저모를 뜯어보았다. 그런데.
‘바네린느 황녀?’
샌드위치를 먹으며 작게 미소 짓는 얼굴이 바네린느를 떠올리게 했다. 여기저기 눈치 보는 모습에서는 우아한 황녀를 떠올릴 수 없지만, 미묘한 선이 바네린느 황녀와 겹쳐 보였다. 내가 미심쩍은 어조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혹시 네 부모님이…….”
“헙.”
바로 그 순간이었다. 보니가 화들짝 놀라서 먹던 샌드위치도 떨어뜨리고 정신없이 숨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나 여기 있으면 안 돼요. 혼나요. 들키면 혼날 거예요.”
“보니.”
나는 샌드위치 바구니를 덮었던 커다란 천으로 보니의 등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원을 세이지 남작 부인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세이지 남작 부인이 이 아이의 엄마인가.’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정원을 지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천을 걷었다.
“쉿. 갔어.”
“갔어요?”
“응, 눈치채지 못하고.”
“휴, 다행이다.”
가엾은 보니는 손와 얼굴이 창백해지도록 벌벌 떨었다. 아이가 안쓰러워진 나는 손바닥으로 보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너는 몇 살이니?”
“다섯 살이에요.”
“찰스랑 동갑이구나.”
절친한 친구끼리 출산 시기가 맞물렸으니, 더더욱 가까워졌겠지. 바네린느와 세이지 부인의 끈끈한 관계도 대충 이해는 되었다.
‘그런 것치고는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지만.’
세이지 부인은 왜 이 아이를 꽁꽁 감추는 건지, 그리고 바네린느 황녀는 아무리 남작 부인을 아낀다 한들 왜 저택에서 머무르게 하는지. 차라리 그녀에게 작은 별장이라도 내주는 편이 더욱 그녀를 위한 길이 아닐까.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 이 아이를 잡아 두긴 어려워 보였다. 나는 주섬주섬 다시 덤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보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보니. 다음에 또 놀러 오렴. 초콜릿 쿠키 좋아하니?”
“응!”
보니는 남은 샌드위치를 안고 총총 다시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밝게 짓고 있던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나는 한숨을 쉬며 칼리마에게 말했다.
“세이지 부인이 데리고 있는 아이 같군요. 어린아이인 걸 보니 부인의 자식일 수도 있겠어요.”
친자식도 아닌데 루크 공작가까지 데리고 올 리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친자식이라기에는 너무 안 닮았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마 또한 무언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전에 보니 남작 부인은 아이가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던데. 알면 뒤로 넘어가겠어요.”
“종일 방 안에 혼자 있으려면 심심할 테니까요.”
저런 어린아이에게 종일 혼자 있으라고 말하는 어른이 너무한 것이다.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밀어 넣는 걸 보니 배도 꽤 고팠던 모양인데.
‘한번 알아봐야겠어.’
가장 힘든 시기에 고아원에서 위로를 받아서인지, 나는 어린아이들이 불행히 지내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혹시나 정말 식사도 잘 챙겨 주지 않고 홀로 온종일 내버려 두는 거라면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나는 머리 한구석에 조금 전의 일을 꼭 담아 두었다. 그리고 가볍게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배도 부르고 바람도 솔솔 부네요. 이제 뭘 할까요?”
그냥 산책이나 하자고 할 줄 알고 물은 것이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일하셔야죠. 마침 기사 쓰기 아주 좋은, 햇볕을 등지고 있는 자리에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을 두었답니다.”
“윽.”
결혼 첫날부터 일이라니! 심지어 내 기사를 무척 고대하고 있는 표정이라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아, 오늘은…….”
“오늘은 특별히 두 편 쓰실 거라고요? 제가 안 그래도 마님의 미모가 돋보이는 초상화를 골라 두었답니다.”
“윽.”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 아니, 결혼식을 치렀으니 빨리빨리 기사를 넘겨야 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일단 루크 공작가에서 공식 입장을 발표했을 테니, 나는 공식 입장과 다른 내용을 꺼내 들어야겠지.’
하지만 그 기사를 쓰는 게 내 일이다 보니 머리가 팽팽 돌아가질 않았다. 내가 산책을 더 하고 싶은데 집으로 끌려 들어가는 멍멍이처럼 비척비척 일어났을 때였다.
하녀가 다가와서는 칼리마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각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포텐샤 영애.”
“오!”
칼리마는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모습이, 내가 그동안 지켜봐 온 칼리마의 그 어떤 모습보다도 더 소녀다웠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저, 잠깐만 다녀올게요.”
“이야기 많이 나누고 와요.”
동경하는 루크 공작을 가까이 모시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 아닌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칼리마라면 무슨 이야기든 화기애애하게 이끌어 나가겠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배웅했다. 절대로 독촉하는 사람이 없어져서 기뻐진 건 아니다. 절대.
* * *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에델과 달리, 칼리마의 마음은 평온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 만에 부르시다니, 예상보다 빠르네.’
부를 거라고는 생각했다. 결혼식에서 그녀는 황궁 수사 기록을 언급했으니까.
“수사 기록 사본을 내게 건네줄 수 있나.”
안부 인사도 뭣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건네진 요구에, 칼리마는 빙긋 미소 지었다. 용건이 그것일 줄 알았기 때문에 오기 전에 미리 챙겨 왔다.
두툼한 서류 뭉치를 안은 채 칼리마가 말했다.
“여전하시네요.”
루크 공작은 대답 없이 손을 내밀었다. 칼리마는 몸을 살짝 틀어서 서류를 숨기는 듯이 행동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려야죠, 물론. 보여 드릴 거예요. 어차피 제가 가진 것도 사본이니 얼마든지 하인을 시켜 사본을 만들어 드릴 수 있죠.”
“그걸 내게 주는 대가로 무슨 조건이 있나.”
“각하를 상대로 제가 무슨 조건을 내걸겠어요? 저를 아시잖아요.”
살갑게 웃는 칼리마를 차가운 군청색 눈동자가 담았다. 칼리마는 발그레 뺨을 붉히며 손바닥을 들었다.
“검술 대련 5회?”
“…….”
“5, 5회는 너무 많은가요? 그럼 3회? 1회…….”
“정말로 어렸을 때와 변한 게 없구나.”
루크 공작의 한숨 섞인 말에 칼리마는 헤헤,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서류 뭉치를 건네주며 루크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왔다는 건 참 유용한 무기였다. 이 목석처럼 단단한 남자의 맞은편에 허락 없이 앉을 수 있으니 말이다.
루크 공작은 무뚝뚝한 얼굴로 서류를 쓱쓱 넘겼다. 칼리마는 턱을 괴고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수사 기록 자체의 내용은 별거 없어요. 황궁서기관이던 에델 아지안 양이 그날 황궁에서 피투성이가 된 하녀와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어 범인으로 몰렸죠.”
“목격자는?”
“루크 공작 부인이요.”
“…….”
루크 공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바네린느는 에델의 사건을 가장 먼저 공론화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넓은 황녀 궁에서 유일한 목격자가 황녀라는 것도 어색하군. 애초에 그런 사건이 일어날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러나 수사 기록에는 세밀한 내용이 모두 빠져 있었다. 바네린느 황녀라는 사람이 가지는 공신력에, 수사관들이 태만하게 수사한 것이다. 루크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고 범인으로 몰았겠군.”
“네. 심문 내용을 봐도 범인인 걸 자백하라는 식이에요. 다행인 건 하녀의 상처에 대해 한 시간 이상 지속된 폭행의 흔적이라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고, 에델 아지안은 그 부분에 대한 알리바이가 확실해서 풀려났지요.”
“…….”
설령 그로 인해 벌을 받지 않았다고 해도, 심문당하고 추궁당하는 그 과정은 당사자에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준다.
심지어 에델 아지안은 그 직후 어머니를 잃었다.
‘황궁서기관 직에서 쫓겨난 것도 미심쩍어.’
무고한 것이 밝혀졌다면 다시 복직시켜야지, 수상쩍다며 파직시키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 처리 방식이었다. 마치 꺼림칙한 것을 치워 버리듯 말이다.
루크 공작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을 때였다. 칼리마가 턱을 괴고 물었다.
“각하, 저는 각하께서 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지 그쪽이 더 흥미진진하거든요.”
루크 공작의 냉담한 시선이 칼리마를 향했다. 칼리마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에델 아지안과 무슨 관계이시죠?”
루크 공작의 시선이 느릿하게 칼리마의 얼굴을 훑었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지만,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물러나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녀가 고집이 얼마나 센지 이미 알고 있는 루크 공작은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그녀의 어머니를 알고 있다.”
루크 공작의 말에 칼리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크 공작은 눈을 감은 채로 한숨처럼 덧붙였다.
“로어가 된 그녀를 처리한 게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