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공작님이 선물한 산뜻한 노란색 스커트를 꺼내 입고 문밖에서 날 기다리던 세루리안의 손을 잡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공작저에서 결혼식 예행연습을 하기로 한 것이다.
‘바네린느도 오늘은 입궁했다고 하고.’
솔직히 바네린느가 황궁에 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은 아닌지 찝찝하기도 했지만…… 바네린느는 황녀였고, 지금 황제는 바네린느의 오라버니였다. 입궁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일을 꾸민들, 황궁은 내 권한 밖이니까. 신경 쓸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자.’
그리고 또 그녀가 없을 때 공작가에 방문하는 편이 편안한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나는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발을 디뎠다.
세루리안의 시선이 가볍게 내 옷자락을 스쳤다. 나는 일부러 그의 손을 꽉 붙들어 내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방글방글 웃으며 물었다.
“이 옷 어때요?”
세루리안은 곧바로 대답했다.
“잘 어울립니다.”
“그렇게 무심하게 대답하지 말고요.”
“저는 빈말은 안 합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답은 정해졌네요. 루크 공작님께서는 노란색을 싫어하시나 봐요.”
“……예?”
갑자기 루크 공작이 언급되니, 세루리안의 태연스럽던 얼굴에도 금이 갔다. 나는 빙그르르 자리에서 돌았다. 폭이 넓은 스커트가 살짝 떠올랐다가 다리를 휘감으며 내려앉았다.
“이거 공작님께서 사 주신 옷이거든요. 근데 입고 나오니까 바로 시시하다고 하시고 혼자 가 버리셨어요.”
“공작 각하 말씀이십니까?”
“네, 지난주 가십지에 보도된 내용이잖아요. 설마 안 읽었어요?”
내가 눈에 힘을 주고 세루리안을 바라보았더니, 세루리안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당신이 소설가를 해도 대성하겠다고 생각을…….”
“진짜 너무하시네. 소설을 쓰는 기자가 어디 있어요! 그건 기자라고 할 수 없어요. 어디까지나 사실이어야 한다고요.”
“미안합니다. 당신을 모욕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울컥해서 따지고 드니, 세루리안은 깔끔하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 바람에 멋쩍어진 나는 괜히 치맛자락을 붙들고 펄럭거렸다.
내 손짓을 따라서 노란색 치마를 내려다본 세루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한데, 각하께서 싫어하시는 옷을 왜 입고 가십니까?”
얼마 전까지 공작에게 잘 보이려고 편지도 쓰고 했던 내가 굳이 시시하다고 표현한 옷을 입은 것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턱을 치켜들었다.
“반항하는 거죠! 나쁜 며느리 되기 제1조, 시부모님이 싫어하시는 일만 골라서 한다!”
의상실에 묻지도 않고 데리고 가더니, 시시하다며 두고 가? 정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시아버지가 선물한 옷을 열심히 입고 다니는 며느리일 테니, 손해 볼 것도 없잖아요?”
오히려 이득이지. 나는 이걸로 또 기사를 내면 수익이 들어오니까.
“이참에 공작님한테도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 보고 싶네요.”
“불가능한 꿈을 꾸시는군요.”
“우리 엄마가 원래 꿈은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꾸는 거랬어요.”
물론 우리 엄마의 원대한 꿈은 아가베꽃 피우기, 이런 거였지만.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제 엄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시나요?”
“공식적인 기록만큼만 아십니다.”
“공식적인 기록이라는 건…….”
“로어에 휘말려서 돌아가셨다는 것 정도 말입니다.”
“아.”
지극히 담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바네린느가 내게 씌운 누명 같은 건 전혀 공식적이지 않으니까. 그럼 바네린느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도 모르겠네.’
바네린느가 내게 그런 짓을 하는 바람에 밤늦게 외출한 엄마가 변을 당했다는 건 결국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두고 봐. 당신이 약자를 서슴없이 짓밟는 나쁜 사람이라는 걸 꼭 세상에 알리고 말 테니까.’
내가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 있던 세루리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소문의 며느리라는 내용은 언제 공개할 생각입니까.”
“아, 그게…….”
여러 편의 기사를 <뉴캐슬 타임스>에 실었지만, 나는 아직 공작가의 예비 신부가 기자 에델 아지안이라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세루리안은 나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해 주며 말했다.
“호기심은 충분히 자극한 것 같습니다. 다른 신문에서까지 당신이 누구인가 궁금해하고 있고요.”
실제로 다른 신문에 내 실루엣을 그린 삽화가 실리기도 했다. 이제 슬슬 신문에 짠, 하고 등장해야 할 때이기는 한데.
나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쳤다.
“이제는 너무 부담스러워요!”
펜을 너무나 잘 놀린 탓일까. 세루리안의 약혼녀는 늘씬한 키에 유쾌한 성품을 지닌 미인으로 알려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발간되는 가십 기사가 너무 부풀려 놓은 탓에 소문이 더 과장되는 것 같고.’
세루리안과 여러 곳을 다녀서 알음알음 얼굴을 목격한 이들이 많아졌지만, 정말 평범한 여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워낙 이전 기사들이 미인이라고 호기심을 부추긴 탓에, 평범하다는 목격담은 아예 무시당한 것이다.
‘하지만 초상화 공개는 빼도 박도 못할 일이잖아?’
그렇다고 언제까지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내가 초상화를 공개하지 않아도 결혼식에서는 공개될 수밖에 없으니까! 삽화가가 어마어마하게 몰릴 것이다.
“보나 마나 기대한 것 이하라는 말이 나올 텐데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요.”
내 고충을 들은 세루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과 별로 다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영광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별로’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건지.
‘거참, 애매한 위로네.’
하지만 이 남자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일 테다. 나는 마차에 앉아,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당신이랑 헤어진 뒤에는 수도에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
“세루리안?”
그런데 맞장구를 칠 줄 알았던 세루리안의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마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는 끊어졌다.
* * *
작년은 뉴캐슬의 역사적인 해였다. 나이 든 황제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유일한 황자였던 테오도르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황제는 이마를 덮는 금빛 머리카락이 빛나는 잘생긴 미남이었다. 정중한 태도, 아름다운 얼굴과 새로운 관료를 파격적으로 등용하는 정책으로, 새 황제에 대한 젊은 층의 지지가 높았다.
하지만 파격적인 정책을 펼친다는 건 나이가 많은 기존의 관료층과 많은 조율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새 황제는 즉위 후 1년이 지난 지금도 샌드위치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며 집무실에 박혀 있을 정도로 바빴다.
서류에 서명하며 테오도르가 물었다.
“친애하는 내 동생 바네린느. 오늘은 무슨 일인가?”
테오도르의 심드렁한 인사에도, 바네린느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바마마와 오라버니가 계신 곳인데 어디 일이 있어야만 입궁할 수 있나요. 한데 아바마마는 어디 계신가요?”
“최근 어마마마와 함께 별궁으로 가셨단다. 날씨가 추워지니 부쩍 몸이 불편하다고 하시더구나.”
“저런. 걱정이네요. 좋은 약재를 찾아서 올려야겠어요.”
부모를 걱정하며 찌푸려진 아름다운 얼굴만 보면 소풍 삼아 지상에 내려온 천사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 악마가 있다는 걸 테오도르는 알고 있었다. 그는 턱을 괴고 피식 웃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떼를 쓰려고 황궁까지 행차하셨을까?”
그의 말에 바네린느의 인형 같은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떼라니요. 모처럼 오라버니의 얼굴도 뵙고…….”
테오도르는 바로 그 말을 잘랐다.
“식상한 핑계구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 속내를 뻔히 알고 있는 내게? 보나 마나 나를 거치지 않고 아바마마께 바로 갈 생각이었던 것 아니냐.”
“그럴 리가요. 저는 항상 오라버니를 존경하고 있는걸요.”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빛내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떤 자그마한 균열도 찾을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는 우습다는 듯이 비소를 지으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가증스러운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진짜로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얼마 전 특수부에서 요구한 황녀궁 수사 기록 때문일까?”
“……!”
항상 완벽한 표정 관리를 자랑하는 바네린느도 이번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특수부, 다름 아닌 로어를 주력으로 하는 마물 전담 기사단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오라버니가 이미 알고 계시지?’
폴 루크. 늘 느릿하고 무심한 그 남자가 벌써 그때의 수사 기록을 요청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순간의 틈을, 테오도르는 날쌘 매처럼 낚아챘다.
“뭐 때문이니?”
“……이야기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이 와중에도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구는 여동생이 역겨웠다.
테오도르는 곧장 손을 흔들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공작가로 돌아가렴.”
“오라버니!”
테오도르는 빙긋 웃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수년 전 황녀궁에서 이루어진 살인미수, 범인 비슷한 인물은 특정되었지만 결국 진범은 잡히지 않았던 사건.
“네가 찾아온 걸 보니 오히려 답이 되는구나. 그 사건의 진범이 누구였는지.”
제가 떳떳하다면 새삼 그 기록을 찾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루크 공작보다 앞서서 낚아채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