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날 위로하려고 일부러 지어내지 않아도 되어요.”
“에이, 속고만 사셨나. 정말이라니까요. 제가 본 단장님 중에 가장 매끈매끈 삐죽삐죽 상태이신데 무슨 소리세요.”
“그 의미불명의 소리는 대체 뭐예요.”
매끈매끈이면 매끈매끈이지, 거기에 삐죽삐죽은 왜 붙어. 애초에 세루리안은 감정 표현이 아주 드문 사람인데 무슨 기준으로 푹 빠졌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세루리안은 누군가에게 푹 빠질 사람 자체가 아니란 말이지!
내 생각은 이렇건만, 칼리마는 주먹을 꽉 쥐고 나를 응원했다.
“단장님은 정말 마님을 좋아해요. 그러니 당당하게 나가세요. 원래 연애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니까요!”
“그건 칼리마가 잘못 알고 있는 거래도요. 오히려…….”
지금 우리 관계에서 지고 있는 사람은.
‘어?’
무심코 이야기하려던 나는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뭔가 열어서는 안 되는 공간의 문을 무심코 잡아당긴 기분이었다.
나는 술렁거리는 마음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그때 칼리마가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상자에요?”
“웨딩드레스라고 하던데.”
“아아, 그 의상실까지 난입해서 억지로 떠넘겼다는 그 드레스요?”
상자를 열기 위해 두 손으로 상자 뚜껑을 붙든 칼리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수상하죠?”
“무척 수상하네요.”
“일단 제가 열어 보겠습니다.”
칼리마가 뚜껑을 들어 올리는데, 나는 무심코 상자가 펑, 터지는 상상을 했다. 그것도 아니면 뚜껑이 열리자 빨간 글러브가 튀어나온다든지.
하지만 상자 안에 든 것은 정말 평범한 드레스였다.
‘오, 정말 고풍스러워 보인다.’
가슴이 넓게 파여서 커다란 꽃장식이 가득 달린 넓게 퍼지는 벨 라인 드레스는 확실히 이전 세대의 유행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놔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다.
‘역시 황실에서 입었던 드레스!’
나를 엿 먹이기 위한 꿍꿍이가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꼼꼼하게 드레스의 여기저기를 살펴본 칼리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겉보기로는 문제없어요. 바늘 같은 게 몰래 감춰져 있지도 않고요.”
“윽.”
바늘이라. 그 생각은 또 못했네.
‘그런 것까지 일일이 걱정하면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칼리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입어 볼까요?”
결혼식장에서 입어야 할 드레스이니 입어 봐야지. 나는 드레스에 팔을 끼웠다.
드레스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분명 아름다웠는데…….
옷을 입고 나온 나를 본 칼리마의 얼굴이 애호박처럼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꼭 이 드레스를 입으셔야 한다고요?”
“네.”
내 대답에 칼리마의 얼굴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이거 진짜 고도의 돌려 까기인데요.”
“내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게 아니라니 다행이군요.”
나도 처음 드레스를 입고 거울을 본 순간 이건 무슨 신종 괴롭힘인가 싶었으니까.
괴롭힘이라고 인지했으면서도 헷갈리기까지 했다. 이런 정성으로 남을 괴롭힐 수가 있나 싶어서.
드레스는 발랄한 꽃의 요정을 연상케했다. 문제는 그것이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슴은 볼품없이 헐렁했고, 양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디자인에 꽃까지 잔뜩 달아 놓으니 어깨가 끝없이 넓어 보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기장이었다.
“이렇게 길이가 애매하니 좀 모자라 보이네요.”
“마님은 키가 크시니까요.”
바네린느는 키가 나보다 10센티 이상 작았던 모양이다. 발을 덮어서 안 보이게 해야 하는 드레스가 내게는 복사뼈를 덮을 듯 말 듯 애매한 기장이었다.
칼리마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어디서 이렇게까지 안 어울리는 드레스를 찾았지? 그 능력이 대단하네요.”
“그러게요.”
나는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 이상 적절한 대꾸가 없었다.
다시 드레스를 내려다보니 한숨이 폭 나왔지만.
나는 씩씩하게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의자 위에 벗어두었던 옷을 입으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뭘 해도 답이 없으니, 맛있는 거나 먹고 쉬죠. 근처 커피 하우스의 크림 티가 몹시 당기네요.”
“좋아요!”
골치 아픈 일에는 역시 당분이지. 칼리마는 냉큼 내 뒤를 따라나섰다.
* * *
늘 가던 단골 커피 하우스는 좁고 낡았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홍차와 따끈따끈한 스콘 한 접시를 해치운 뒤, 우리는 근처 공원에 앉았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게으른 비둘기들이 발치로 날아들었다.
칼리마가 신기하다는 듯이 제 곁을 맴도는 비둘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주변은 아주 평화롭군요.”
“네, 그렇죠?”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곳.
나는 그리운 눈으로 공원과 맞닿은 대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는 이 풍경이 조금 지겹다고 생각했어요. 매주 주말 아침에는 저 커피 하우스에서 브런치를 먹고, 벤치에 앉아서 비둘기들에게 식빵을 뿌려 주었거든요.”
“좋은 어머니셨네요.”
“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성격만 좋은 게 아니라 가녀린 어깨에 예쁜 얼굴을 가져서 구혼자도 끊이지 않았지.
엄마를 떠올리고 있는 내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리마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좋은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는 세루리안 루크의 심장을 사로잡는데…….”
“으악!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잘 나가다가 왜 세루리안 루크로 돌아오냐고!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지르니, 칼리마는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아니, 곧 결혼하시는 신부님이 왜 남편 이야기를 하는데 이렇게 질색팔색하는데요? 이건 부부관계에 대해 적나라한 칼럼을 쓰기도 하셨던 기자 에델 아지안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오, 방금 완전 편집장님 같았어요.”
비겁한 변명이지만, 그 칼럼도 편집장님이 쓰라고, 쓰라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것이다.
칼리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런데 그렇게 질색하시면서 용케 가십 전문 기자가 되었네요. 그것도 아주 유명한 기자님이시잖아요.”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소리세요. 여기 에델 아지안 기자 때문에 <뉴캐슬 타임스> 정기 구독 중인 사람이 있는데.”
“감사합니다, 애독자님.”
나는 일단 칼리마에게 독자가 되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취미와 직업은 다른 거라는 말이 많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나름 영재교육을 받은 셈이죠. 엄마는 아빠 이야기를 아주 많이 하셨거든요.”
“아버지께서 가십난에 어울리는 인품의 소유자셨던 모양이군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나는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한 줄로 요약하면.
“아기가 생겼다고 했더니 헤어지자고 대답한 쓰레기?”
“헉.”
“그래서 정말 안 잡을 거냐고 물었더니 굳이 잡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 쓰레기.”
그게 우리 아빠였다.
칼리마는 진심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와, 진짜 부부 칼럼에 나올 법한 사람이셨네요.”
내 생각도 그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서 엄마는 저런 아빠는 없는 게 낫겠다 싶어서 헤어졌대요.”
“저런.”
내가 가볍게 이야기해서 그렇지, 무거운 이야기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궁금하긴 해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의외로 가까운 곳에 계실지도 모르죠.”
엄마는 아빠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했지만, 그의 이름도, 얼굴도,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어떤 정보도 알려 주지 않았다.
바로 이웃집에 살고 있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잠시 센티멘탈한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다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빠가 있었으면 세루리안과 계약 결혼도 하지 못했겠죠. 그런 의미에서 지금 걱정해야 하는 건 저랑 안 어울리는데 예쁘고 값비싼 드레스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군요.”
“아아, 다시 현실로 돌아왔네요.”
칼리마는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작게 피식 웃었다.
“……저는 사실 반신반의하고 있었어요. 루크 공작 부인이 정말 단장님의 결혼을 방해할 사람인가 하면서요.”
“이해해요.”
바네린느의 대외적인 모습은 완벽하니 말이다. 나도 그 사건으로 얽히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영영 몰랐을 것이다.
칼리마는 턱을 문지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드레스 덕분에 확신했어요. 상대방이 범상치 않은 나쁜 여자라는 걸요.”
칼리마가 저렇게 정색할 정도로 그 드레스는 나에게 안 어울리긴 했다. 공작 부인이 무려 황실에서 가져온 드레스이니 거절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때는 의상실로 찾아온 게 다급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보니 그 또한 계산된 것이었나? 일부러 남들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 절대 무르지 못하도록.’
아찔한 기분이었다. 나는 초조함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애매한 상황이라, 기사에 실을 수도 없고요. 늘 먼저 선방을 당하는 상황의 반복이네요. 결혼식장에서도 바네린느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고요.”
“가장 좋은 건 제가 마님 곁에 24시간 딱 붙어 있는 건데요.”
거기까지 이야기했던 칼리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좀 난처하네요. 루크 공작가에 들어가려면 분장을 해야 하거든요.”
“네? 어째서요? 칼리마, 설마 도망자예요?”
죄짓고 얼굴이 밝혀지면 안 되는 사람인가! 놀라서 물었더니, 칼리마는 뭔 소리냐는 듯이 깔깔 웃었다.
“저는 그냥 용병이라니까요. 하지만 기사 시절에 워낙 유명했거든요. 아마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역시 훌륭한 실력이어서…….”
“아뇨. 꼴통이어서요.”
“…….”
유명한 꼴통이었구나. 스스로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보통이 아니었던 건 분명해 보였다.
칼리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레스도 차라리 길면 자르면 되는데, 저건 짧아서 덧대야 하니. 덧대는 건 아무리 솜씨 좋은 장인이 해도 티가 나거든요. 아주 고약한 심술이네요.”
칼리마의 한숨 섞인 중얼거림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잠깐만요, 칼리마. 뭐라고요?”
“차라리 길면 자르면 되는데…….”
“그거예요.”
“네?”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거라고요. 그 엉망진창인 드레스를 고칠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