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긴 왜야.
사실 부끄러운 나머지 나도 막 던진 말이었기 때문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세루리안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한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긴장도 풀 겸, 패티케이크 폴카를 먼저 추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네? 추실 줄 알아요? 아까 이름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셨잖아요.”
“그 댄스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추는 건 몇 번 봤습니다.”
“아.”
역시. 이 나라 국민이면 모를 수가 없다니까.
세루리안은 반주기의 다이얼을 달칵달칵 맞추고 태엽을 감았다. 평소 길가에서 듣던 음악과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박자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럼 해 볼까요?”
나는 아까 왈츠를 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세루리안을 마주 보았다.
두 손을 내미니, 세루리안이 가볍게 내 손을 잡았다. 이미 몇 번이나 에스코트를 위해 얹었던 손이지만, 그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 손이 알맞게 쏙 들어가는 느낌이 이상했다.
“천천히 발끝, 발뒤꿈치, 발끝, 발뒤꿈치.”
여자와 남자의 순서가 반대라서 틀릴까 봐 불러 주었더니, 내 오지랖이 무색하게 세루리안은 가볍게 뛰어서는 네 번 뛰는 박자까지 완벽하게 맞추었다.
‘이렇게 춤을 추는 건 되게 오랜만인데.’
엄마가 돌아가신 뒤, 나는 길거리 축제에 나간 적이 없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보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가 더 외로웠으니까.
하지만 지금, 몇 년 만에 폴짝폴짝 뛰고 있으려니 들뜨는 기분이었다.
‘즐거워.’
이런 기분이 얼마 만인지.
‘생각해보면 세루리안을 만난 뒤로부터는 계속 이렇게 들떠 있구나.’
내 현실과 한 발 떨어져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해 보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만나지 못한 유형의 사람들을 계속 보게 되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저 철없이 꿈에 취해 있는 걸까.’
가지런히 솟은 금빛 속눈썹, 섬세한 푸른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반주기가 멈추고, 나와 세루리안은 손을 놓았다.
“그…….”
손가락 끝이 간질거렸다. 손끝을 문지르던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추시네요?”
“몸으로 하는 건 뭐든지 능숙하게 하는 편입니다.”
어쩐지 그를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이 무척 쑥스럽게 느껴졌다.
세루리안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떻습니까? 이것도 결국 마주 보고 하는 것 아닙니까? 왈츠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네요.”
“그러니 다시 해 봅시다.”
“윽.”
다시 세루리안과 바짝 붙어서려니 긴장부터 되었다. 세루리안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일단 손을 얹으시고.”
“잘하고 있습니다. 먼저 왼발, 그리고 오른발.”
“드레스가 길 테니 지금보다 스텝이 엉망이어도 티가 나지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자신 있게 내딛으십시오.”
그 말 듣고 자신 있게 발을 내디뎠더니, 콱 하고 세루리안의 발이 밟혔다. 그는 아무 티도 내지 않았지만, 내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으윽, 역시 왈츠는 어려워요. 제 착각이 아니에요.”
“조금 더 천천히 연습해 보면…….”
당장 손을 놓고 도망치고 싶은데, 세루리안을 보니 그러기도 미안했다. 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차라리 스텝 외울 때까지 혼자 추겠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딱딱하고 무거운 목소리가 방 안 전체를 울렸다.
“가르치는 선생이 능숙하지 못한 것 같군.”
“……!”
먼 곳에서도 곧장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였다. 나와 세루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루크 공작이, 문틀에 기대 서 있었다.
“고, 공작님을 뵙습니다.”
나는 서둘러 인사를 올리려다가 치맛자락을 밟고 휘청거렸다. 그런 내 팔을 붙들어 주면서도, 세루리안은 무척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와아, 진짜 감정 절제를 잘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점은 루크 공작도 비슷했다. 꼭 화를 내는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지?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나?’
그가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은 불안하게 콩닥거렸다.
‘내가 공작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서툴렀지요.”
루크 공작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할 것 없다.”
“예?”
뜬금없이 나타나서 그리 말한 공작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또 휙 돌아섰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속삭였다.
“어휴,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러자 세루리안이 흘긋 내 등 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안 가셨습니다.”
“히익!”
놀란 고양이가 털을 팟 세우듯이 화들짝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공작님이 서 있었다.
공작이 여전히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계속하지.”
“네? 네?!”
얼떨결에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네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도 아니고 되묻는 것에 가까웠는데, 공작님은 나가기는커녕 반주기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 아닌가.
‘뭐야. 갑자기 왜 저러셔?’
나는 세루리안의 손을 어색하게 붙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를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걸까요?”
“아닐 겁니다.”
세루리안은 바로 대답했지만, 아무리 봐도 내게는 트집을 잡으려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랑 세루리안이 댄스 연습하는 걸 볼 이유가 뭐가 있어?’
누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어깨는 딱딱하게 굳어지고 다리는 무거워졌다. 나는 기름칠하지 않은 자전거처럼 끼기긱거리며 세루리안이 리드하는 대로 어색하게 따라갔다. 당연히 발도 숱하게 밟았다.
“미안해요!”
“일일이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대로라면서 발을 밟을 기회조차 없어야 하는 사람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마주하게 되어서 사정없이 내게 발이 밟히고 있나.
‘이제 바랄 건 하나뿐이다. 저 노래가 한시라도 빨리 끝나는 것뿐.’
하지만 태엽을 너무 많이 감은 건지, 노래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고, 나는 빙글빙글 도는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더 엉망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때마침 뚝, 노래가 끊겼다.
나와 세루리안은 손을 놓고 각자 예를 취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 생각에 왈츠 중에서 조금 전 마지막 정리 인사를 제일 잘한 것 같았다.
‘공작님도 같은 의견이신가.’
하고 돌아보았는데!
“안 계시네요?”
공작이 자리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세루리안을 돌아보았더니, 세루리안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까 가셨습니다.”
“아니, 그럼 애초에 왜 오신 거래요?”
“음악 소리가 들려서 오신 거 아닐까요.”
“무슨 소리인지 알았으니 다시 돌아가고?”
“그런 분이십니다.”
“아오.”
긴장했던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럼 처음부터 그냥 가면 되잖아. 왜 갑자기 와서 괜히 긴장시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사라지는 건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바로 그때였다. 내 귓가로 아주 작지만 묘한 소리가 울렸다.
마치 생쥐가 과자를 갉작거리는 것 같은, 아주 작고, 부스럭거리는 소리.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 웃었죠?”
내 물음에 세루리안은 표정 없는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아닙니다.”
“웃었잖아요.”
“그럴 리 없습니다.”
분명히 귀에 들렸는데, 웃음소리가 분명한데!
하지만 무표정한 세루리안의 얼굴을 보니, 내가 헛것을 들었나 싶어졌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계속 이상한 일만 있네.”
“피곤해서 그러신 모양입니다. 일단 차를 한잔 마시고 다시 춤을 추는 건 어떨까요?”
기다렸다는 듯이 티 타임을 권하는 것이 영 수상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세루리안을 돌아보았더니, 세루리안이 차분한 어조로 덧붙였다.
“당신이 좋아하는 자몽 시폰케이크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좋아요.”
자몽 시폰은 참을 수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세루리안의 뒤를 참새처럼 총총걸음으로 따라나서니, 미리 이야기를 해 둔 건지 정원에 커다란 테이블과 다과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우와, 맛있겠다.’
자몽 시폰케이크, 레몬 케이크, 사과 타르트 등등 주로 과일을 사용한 디저트들이 먹기 좋게 조각조각 예쁘게 놓여 있었다.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와, 어쩜.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있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조금만 주의 깊게 지켜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
나는 세루리안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겠는데.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얼굴을 붉히며 눈을 돌렸을 때였다. 내 눈에 보송보송한 금빛 실뭉치 같은 것이 들어왔다.
“어?”
의아한 소리를 내자, 세루리안의 시선도 내가 바라보는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름 아닌 바네린느의 아들, 찰스가 서 있었다.
“혀, 형님을 뵙습니다. 그, 그리고…….”
희고 통통한 얼굴이 금방 붉게 달아오르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찰스가 유리구슬처럼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세루리안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형수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형수님.”
공손하게 인사하는 목소리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세상에, 너무너무 귀엽다!’
저 동글동글한 얼굴, 푸른 눈동자, 작고 통통한 손바닥에 귀여운 목소리까지.
‘다시 봐도 곰 인형 같아!’
정말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가 전부 집약되어 있었다. 낼 수 있는 최대의 상냥한 목소리로 찰스에게 말했다.
“지금 무슨 시간이에요? 공부하러 가나요?”
“그, 그건 아니고…….”
찰스는 쭈뼛거리면서도 내 다정한 목소리에 긴장이 풀렸는지, 한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시간 있으면 여기 앉아요. 제가 먹기에는 너무나 많은 케이크가 준비되었거든요.”
“케이크…….”
마침 테이블에는 의자가 세 개 있었고, 우리는 세 사람이었다.
내가 손바닥으로 의자를 두드리니, 찰스의 눈동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와 세루리안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움직였다.
“…….”
마지막으로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던 찰스는 결국 쪼르르 빈 의자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