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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20)화 (20/138)

‘공작 위 계승권의 조건은 혼인 그 자체이니까.’

혼인 후에 추문이 터져서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그건 이혼이지, 혼인 무효가 아니다.

그러니 더 완벽하게 혼인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공작이 있는 자리에서 터트린 것이다.

‘기왕이면 공작이 나서서 혼인 자체를 무효화해 주길 바랐겠지. 사기 결혼이라고 펄펄 뛰며 화를 내면 더 좋았을 거고.’

이미 모든 도장이 찍혀서 효력을 가지게 된 혼약서를 백지화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마차 사고든 뭐든 저를 죽이려고 했을 테죠.”

바네린느는 그런 여자였다. 충분히 그럴 힘을 가지고 있고, 악의 또한 충만한.

“일단 이걸 드시죠.”

그가 내민 건 다름 아닌 약병이었다.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고마워요.”

정말 속이 안 좋았기 때문에 나는 냉큼 그것을 받았다. 적갈색 병을 꿀꺽 들이켜니,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혀끝을 알싸하게 감쌌다.

평소에는 강한 쓴맛 때문에 마시고 나면 역할 정도였는데, 배가 아파서인지 지금은 그저 개운하기만 했다.

내가 병을 다 비우자, 세루리안이 입가심거리를 야무지게 내밀었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음식이 다 맛있긴 했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입으로 넘어가는 건지 코로 넘어가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사실 그 상황에서 꾸역꾸역 식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오기가 대단하다 싶지만.

‘절대로 맛이 없어서 제가 체한 것이 아닙니다.’

어쩐지 해명해야 할 것 같아서 변명을 늘어놓으니, 세루리안이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무척 잘해 주었습니다.”

그답지 않은 격려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루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가, 멋쩍은 표정으로 주먹을 말아쥐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칼리마는 유능한 용병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지킬 테니까요.”

그건 내가 아까 말한 마차 사고 등을 겨냥해서 하는 말이었다.

성실하게 일일이 대답해 주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제 곁에 붙여 준 건가요?”

“복합적인 이유입니다.”

보, 복합적이라니. 나도 모르는 사이 목숨의 위기가 여러 번 오가기라도 한 걸까.

괜스레 섬뜩한 느낌에 손바닥으로 목을 감쌌다. 그리고 이런 감각이 낯설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도 그랬다. 수년 전, 갑자기 살인미수로 몰려서 끌려갔을 때도.

모두 내 목에 칼끝을 겨누고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며 노려보는 듯한 느낌.

‘아무도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

오히려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나를 귀찮아했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나만 고개를 끄덕이면 모든 일이 끝나는데, 끝까지 버티는 내가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지쳐서 고개를 끄덕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 사건 이전까지 나는 세상에 대한 묘한 믿음이 있었다. 착한 사람은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행복해지고, 악인은 어떻게든 벌을 받고 불행해진다는 믿음.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를 심문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진짜 죄를 지었는지 짓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들이 내게 요구하는 건 단 하나.

그들은 죄를 물을 사람이 필요했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때를 떠올리니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얕게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 일, 제가 한 게 아니에요.”

말하고 나니 후련해야 할 가슴이 도리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다시 목을 가다듬어, 의연한 어조로 반복했다.

“저는 하지 않았어요.”

세루리안의 밝은 푸른색 눈동자가 구슬처럼 반짝였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믿습니다.”

“저는…….”

“힘들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에델.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울컥했다. 지금의 내게 가장 큰 위로였다. 세루리안은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저는 허언을 하지 않습니다. 내일 황궁에 재수사를 요청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실은 밝혀질 겁니다.”

“세루리안.”

그래. 적어도 지금 나는 과거와 다르게 혼자가 아니었다.

우울한 기분을 휘휘 떨쳐 버리고 다시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세루리안. 덕분에 다시 기운이 났어요.”

빈말이 아니라, 세루리안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 손의 떨림은 잦아들고, 마음은 한층 가벼워졌다. 현실은 바뀐 게 하나도 없지만 말이다.

세루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별말 안 했습니다.”

“내가 덕분이라고 하잖아요. 당신은 천만에라고 해야지요.”

“저는…….”

무뚝뚝한 세루리안의 얼굴에 뭐라고 대답할지 훤히 보였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세루리안을 마주 보았다.

“빈말은 못 합니다, 맞죠?”

“예, 맞습니다.”

세루리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생기니, 들끓었던 감정은 가라앉고 이성이 차올랐다.

“일단, 재수사 요청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기다리라고요?”

“네. 오히려 추문을 우리 쪽에서 부추기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요.”

바네린느가 꾸몄을 여러 시나리오 중, 그녀가 여론전을 펼칠 거라 예상하고 움직이다가 내 손으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되는 게 제일 최악이었다.

오히려 재수사 요청으로 인해 내 과거의 오명이 날개를 달게 될 수도 있었다.

나는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공작 부인이 말은 꺼냈지만 섣불리 여론전을 펼치지는 못할 거예요. 저는 정말 범인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재조명되면 난처한 건 그녀 쪽이죠.”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의 대답에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분 좋네요.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믿고 지지해 준다는 사실이요. 그동안 누구도 믿지 않아서 말하지 못했거든요.”

그 정도로 바네린느의 이미지는 완벽했다. 살아 있는 천사,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도 상냥했으며, 거짓이 무엇인지 모르는 순수한 여인으로 비쳐졌다. 내가 아무리 그녀가 범인이라고 외친들, 귀 기울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 내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정말 고맙긴 하지만, 당신도 어쩜 제 말을 그렇게 덮어놓고 믿어요? 제가 정말 악랄한 범죄자면 어쩌려고요.”

내가 눈을 찡그리며 한 말에, 세루리안은 뜻밖에 진지한 대답을 내놓았다.

“당신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녀와 악연이 있으니 당신을 믿어도 좋다고요. 저는 그때부터 당신의 말을 신뢰했습니다. 공작 부인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요.”

의외로 첫 만남에서부터 나를 신뢰하고 있었구나. 나는 키득 웃으며 그의 팔을 살짝 붙들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주 잘 만난 거네요?”

세루리안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의 표현대로라면 천생연분이군요.”

“오, 응용력이 아주 좋아요. 훌륭한 학생이군요.”

내 농담에 세루리안은 입술을 살짝 구깃거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정원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가볍게 그의 머리카락을 들추고 잘생긴 이마를 드러냈다가, 수줍은 듯 멀리 도망쳐 버렸다. 저택의 불빛이 오뚝한 코와 그윽한 눈가를 따라 빛나는 윤곽선을 그렸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내가 멍하니 물었다.

“지금 웃고 있는 거 맞죠?”

“……예?”

내 말에 세루리안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꼭 창피해하는 어린애 같은 표정에,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당신 표정. 지금 즐거워하고 있잖아요.”

“그런가요?”

세루리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숱 많은 머리카락이 우수수 흘러내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그런 걸로 합시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세루리안의 표정에 또다시 작은 미소가 배어 있어, 나도 따라서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약을 먹어서인지, 이 남자가 차분해서인지, 불쾌한 기분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마를 간질이는 바람은 시원하기만 했다.

* * *

찰스를 잡아끄는 바네린느의 걸음은 자신의 방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빨라졌다.

제 방에 도착할 즈음에는 찰스가 질질 끌려갈 지경이었다. 심상찮음을 느낀 세이지 남작 부인은 바네린느의 방 근처에서 하녀들을 모두 물렸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바네린느는 방에 있는 집기부터 모두 집어 던졌다.

“으아아아악!”

값비싼 테이블이 쓰러지고 위에 놓여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개중에는 보석도 있었고, 잉크도 있었다. 새로 깐 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펫에 검은 얼룩이 지고 유리 조각이 흩어졌다.

‘또 시작이구나.’

로라, 세이지 남작 부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젊고 아름다운 바네린느 황녀는 그녀에게 폭군이나 다름없었다.

황궁에서 시녀로서 그녀를 모실 때부터, 약점이 잡혀서 그녀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지금까지.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야? 이제 와 혼인이라니! 그동안은 그런 거 관심 없었잖아! 철저하게 없는 사람처럼 살았잖아!”

꽉 닫힌 방에서 공작이 들어서는 안 될 날 선 언사가 마구 쏟아졌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분명히 변덕일 거예요.”

로라는 벌벌 떨면서도 애써 바네린느에게 말을 건넸다. 이때 구경만 하다가는 나중에 더 심한 꼴을 당하니 말이다.

“오히려 찰스 도련님을 심중에 두셔서 그럴 수도 있지요! 공작가의 입양아에게 평민 부인을 붙여 준다고요? 누가 봐도 훼방이잖아요.”

평소라면 더없이 안심되었을 말이지만, 지금 바네린느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너 폴 루크를 몰라? 그 남자랑 변덕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로라를 돌아보는 바네린느의 시선이 서슬 퍼렜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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