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루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럴 생각입니다.”
“예식장은…….”
공작이 그리 말하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크게 바라지 않습니다. 성당에서 맹세만 해도 충분합니다!”
나는 까다로운 며느리 아니다. 뭐든지 사정에 맞추는 착한 며느리다!
온몸으로 그런 의견 피력을 하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공작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휙 다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식이 단출해선 안 되고.”
“네.”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진짜 사랑해서 하는 결혼도 아닌데.’
내 마음은 그랬지만, 이미 공작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해서 그에 관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공작과 세루리안의 뒤를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공작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문이 열리자, 넓은 홀에 줄지어 서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일국의 왕녀가 된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사뿐사뿐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사용인들의 끝에는…….
‘와, 귀여워!’
내 시선을 빼앗은 건 화려한 문양의 베스트를 갖춰 입은 곰 인형 같은 어린아이였다.
‘뭐 저리 귀엽게 생긴 애가 다 있어?!’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고 싶은 토실토실한 볼살, 동그란 구슬 같은 푸른 눈, 그리고 털실처럼 곱실곱실하게 얹어진 금빛 머리카락, 희고 오동통한 몸까지.
꼭 걸어 다니는 곰 인형 같았다.
‘세상에. 한번 꼭 끌어안아 보고 싶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나의 시선을 확 사로잡기 충분한 얼굴이었다.
‘도대체 저 아이는 누구일까?’
아이는 긴장했는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통통한 볼살이 부각되어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나와 눈을 마주친 아이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먼저 그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할 때였다.
복도 끝에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우아하게 금빛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여인이 걸어 나왔다.
바로 바네린느 황녀였다.
‘그런데 표정이 왜 저래?’
내가 아는 바네린느의 표정은 두 가지이다.
천사처럼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 또는 눈을 내리깔고 처연하게 눈물짓는 얼굴.
분명 걸어 나올 때 그녀의 얼굴은 후자였는데.
‘갑자기 엄청 당황했네.’
그녀가 완벽한 표정을 무너뜨리고 잠시 주춤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루크 공작이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각하께서 먼저 나와 계셨군요.”
“그렇소.”
“…….”
공작의 무뚝뚝한 대답에, 늘 현란하게 움직이던 바네린느의 혀도 힘을 잃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뭔가 그녀의 계산과 맞지 않는 상황이 생긴 게 분명했다. 기자의 촉이 깜빡거렸다. 나는 숨을 죽이고 열심히 바네린느의 얼굴을 두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먼저 입을 연 건 공작이었다. 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와는 별 상관없는 자리라고 말했는데.”
그 말에 바네린느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안주인인 제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굳이 다 챙길 필요가 있나 싶군.”
바네린느의 온화한 미소를 앞에 두고도 제 할 말만 하는 공작을 보며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그 대화로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공작 부인에게는 식사 자리에 나올 필요 없다고 했나 보다!’
그래서 바네린느는 공작이 나오기 전에 마중을 나와서 자신이 배제된 자리여도 최선을 다한 가련한 공작 부인을 연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공작이 먼저 나와 있는 걸 보고 당황한 거지.’
이거, 예기치 않게 한 방 먹였네.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의도치 않게 나를 도와준 공작을 돌아보았다. 누구의 편도 아니라던 세루리안의 말대로, 공작은 이번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내 쪽을 응시했다.
“얼굴은 다 보았으니 되었군. 이만 들어가겠소.”
뭐? 식사에 초대해 놓고, 식사도 안 했는데 그냥 가겠다고?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었어요?’
어이가 없어서 세루리안을 돌아보니, 세루리안은 원래 그런 분이라는 뜻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럼 알아서 식사하고 돌아가도록.”
그리 말하고 공작이 휙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그런 루크 공작을 붙든 건 다름 아닌 바네린느였다.
“각하께서 바쁘신 줄은 알지만, 함께 식사하고 가시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또 무슨 함정인 걸까.’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노란 털 테디베어 같은 남자아이가 바네린느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헉! 저 곰 인형 같은 애가 바네린느 황녀의 아들이라고?’
그렇다면 세루리안과 작위를 다투고 있다는 그 아이?
‘저 아이는 누구를 닮은 거야? 공작님도, 공작 부인도 닮지 않았잖아?’
진정한 유전의 신비였다. 내가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바네린느가 슬쩍 아이가 내미는 손을 피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부드럽지만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미가 없는 동안 손님 접대는 잘하고 있었나요, 찰스?”
“그, 그게…….”
아이의 얼굴이 이번에는 창백하게 질렸다. 그 모습에 바네린느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설마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있었던 건 아니죠?”
“그…….”
그러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잖아. 저렇게 어린데 어떻게 손님을 접대할 수 있겠어? 딴짓을 하지 않고 의젓하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딱히 저 아이가 모자라거나 낯가림이 심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바네린느의 엄격한 자녀 교육에, 나도 모르게 모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바네린느를 살피는 찰스의 표정이 너무도 안쓰러웠던 탓이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바네린느의 서슬 퍼런 시선이 나를 물끄러미 향했다. 딱히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바네린느를 마주하고 있으니 긴장되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바네린느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인사는 나누었나요?”
그러자 그 어린아이가 군인처럼 온몸에 힘을 주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저, 저는 찰스 루크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에델 아지안이에요. 잘 부탁해요, 공자.”
인사하는 모습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내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니, 찰스가 움찔해서는 얼굴을 붉혔다.
‘쑥스러운가 봐. 너무 귀여워.’
발그레한 찰스의 뺨을 보며 내가 헤실거리니, 세루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왜 갑자기 그런 얼굴입니까?”
“원래 어린아이들을 좋아해요.”
“어린아이요?”
“공자가 귀엽지 않나요? 당신 동생이잖아요.”
“그렇습니까.”
무심한 세루리안의 목소리가 마치 귀여움이라는 단어 자체를 생소하게 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하긴, 세루리안의 입장에서 찰스는 그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 수도 있는 경쟁자이니까.’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어린이라는 존재 자체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애정이나 관심을 사그라뜨릴 수는 없지 않나?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더니, 루크 공작이 건조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량한 겨울을 연상시키는 군청색 눈동자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차가운 건 집안 내력이구나.’
저런 남자가 내가 방문한다고 마중을 나왔다니 그것이 도리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세루리안이 나를 대할 때의 행동과 아주 비슷했다.
차갑게 대하지만, 예의를 지킨다.
다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건네는 제안을 거절하지도 않는다.
흘긋 내 곁에 선 공작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공작의 가슴팍에서 반짝이는 배지를 말이다.
저것은 로어 사냥꾼의 상징.
‘저 두 사람이 저렇게까지 비슷한 성품인 것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로어 사냥꾼들은 모두 비슷할까.’
그건 아직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지만 충분히 생각해 볼 법한 주제였다.
그때 공작이 입을 열었다.
“흠…… 그럼 응접실로 가지. 내가 별로 시간이 없으니.”
* * *
응접실 안의 식당에서부터 공작가의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길게 늘어선 식탁은 스무 명이 앉아도 너끈할 정도로 넓었다.
모든 것이 다 완벽했다. 식당은 깨끗했고, 이미 접시와 식기도 모두 세팅되어 있었다.
그런데 딱 하나 어색한 부분이 있었으니 식사 준비를 하는 시중인이 눈에 보일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
의아해서 눈을 깜빡거리니, 세루리안이 내 귀에 소곤거렸다.
“그동안 각하께서는 한 번도 식사에 함께하신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요? 정말 한 번도?”
“예.”
이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저벅저벅 걸어가는 공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작이 얼마나 담담한 얼굴인지, 그가 상석에 가까워질수록 흠칫 놀라는 시중인이 아니었으면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하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바네린느에게 말을 붙였다.
“마님, 자리를 어디로 할까요?”
“……그야 나는 각하의 옆자리 아니겠느냐.”
“그것이.”
하녀의 눈이 부산스럽게 바네린느와 세루리안을 오갔다. 나는 바로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세루리안도 그동안 여기서 식사를 하지 않았구나!’
공작이 식사를 하지 않으니 상석은 자연히 공작 부인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공작이 자리를 함께하니, 그다음 자리가 헷갈리게 된 거야.’
바네린느가 자기 아들과 한쪽에, 그리고 세루리안이 나와 함께 그 맞은편에 앉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럼 차석에는 바네린느가 앉냐, 세루리안이 앉냐는 문제가 남는 거지.’
마주 본다고 해서 그 자리들이 다 같은 위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상석의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로 차석과 차차석이 나뉘는 것.
‘이것이 바로 귀족들의 기 싸움이구나!’
턱을 꼿꼿하게 들고 세루리안을 내려다보는 바네린에게서도, 무표정하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는 세루리안에게서도 자리를 양보할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무관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늘 인터뷰로 받아 적기만 하던 상황을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흥미가 솟아났다.
‘그러니까 그냥 원탁을 두란 말이지.’
괜히 직사각형 테이블 같은 걸 두니 상석과 차석이 생기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 갈등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공작이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네가 차석에 앉거라, 세루리안.”
모두 흠칫 놀라는 것 같더니, 아무도 토 달지 않고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이 집안의 권력 구도가 어떠한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 이 집은 완전히 공작이 실권을 쥐고 있구나.’
세루리안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앉으세요, 에델.”
“아, 네.”
결국 세루리안이 바네린느를 마주 보고, 내가 찰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흰 접시를 내려보고 있으니, 심장이 불길하게 둥둥 울렸다.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차석을 양보할 사람이 아니지 않나?’
내가 아는 바네린느 황녀는 권력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를 앉자마자, 바네린느가 입을 열었다.
“각하, 비록 세루리안 경을 제가 낳진 않았으나, 저는 진실로 친아들처럼 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