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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14)화 (14/138)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로어가 특정인의 곁을 맴도는 건 처음 보는데.’

에델이 로어에 관심이 있다는 건 금방 알았다. 그녀가 그에게 계약 결혼을 청한 이유도 조금만 생각하면 뻔한 것이다. 적당한 때에 이혼해 주겠다는 여자가 진정 원하는 게 공작가에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녀의 마음을 뻔히 알기 때문에, 세루리안은 공작가에서 가장 값진 보석과 그 외에도 그의 사재로 배정된 수많은 보석을 보낼 예정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영영 들어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로어가 그녀의 곁을 맴돌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혹시나 집 안에 숨어 있을까 해서 세루리안은 잠시 머물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그런데 이게 무슨.’

갑자기 에델의 권유에 따라 소파에 눕게 된 세루리안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소파는 그에게 너무나 비좁았지만 에델의 말대로, 마음 한구석이 풀어지도록 포근했다.

사각사각.

에델이 앉아서 글을 쓰는 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울렸다. 그는 물끄러미 에델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살짝 눈을 찌푸린 채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릴 때랑 똑같군.’

세루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여덟 살에 루크 공작에게 입양되기 전에.

그는 고아원에서 지내던 아이였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그녀는 오지랖을 부렸지.’

세루리안은 고아원에서도 항상 구석에 박혀 있는 아이였다.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않고 가만히 있는 아이가 걱정되어 봉사를 나온 의원에게 보인 수녀님은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병명을 듣게 된다.

그는 무감각을 동반한 무감정 증후군이었다.

아지안 모녀가 고아원에 찾아온 건, 이걸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건지 알아보고 있을 때쯤이었다.

“왜 여기 혼자 있어?”

에델 아지안의 어머니는 꽃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고아원 아이들과 꽃다발 만들기 봉사를 했는데, 세루리안은 한 번도 그 활동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꽃을 만지러 떠나고, 혼자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세루리안에게 제 머리만큼이나 빨간 꽃을 든 에델이 찾아왔다.

“이렇게 가까이 대고, 꽃을 바라봐. 생생한 꽃의 빛깔을 보고 있으면 달콤한 향기가 한가득 밀려들어.”

그것은 정말 기묘한 감각이었다. 수년에 걸쳐 천천히 무뎌지고 있던 감각이 폭발하듯 살아났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선명한 장미꽃 향기와 활짝 웃는 에델의 얼굴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예쁘다, 고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꽤 오랫동안 잊고 지냈지만.’

이후, 고아원에는 돌처럼 딱딱한 표정을 가진 사내가 찾아왔다.

그가 바로 루크 공작이었다.

“여기 무감각증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무뚝뚝하게 세루리안을 지목했다.

“이 아이를 내 양자로 삼고 싶소.”

세루리안은 그렇게 루크 공자가 되었다.

그가 입양되었을 때, 사정을 모르는 많은 사람은 세루리안이 거저 얻게 될 작위와 많은 재산을 부러워했다. 고아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좋겠다. 부모님이 생겨서.”

부모. 그가 태어나서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것.

운이 없어 가지지 못했지만, 운이 좋아 다시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좋은 일인가?’

어린 세루리안의 눈에도 루크 공작은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 그는 부모로서 해야 하는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일을 묵묵히 수행했지만 딱 하나, 살가운 정서적 교류가 없었다.

루크 공작은 살아 움직이는 얼음 같은 남자였다. 무엇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저 자신만의 성안에서 감정 없이 살아가는 얼음 같은 사람.

세루리안도 그와 동류였기에, 두 사람의 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뒤늦게 루크 공작이 황명으로 바네린느 황녀와 혼인하게 되고, 바네린느 황녀가 세루리안의 작위 승계를 막기 위해 활짝 웃으며 비수를 꽂을 때도, 세루리안은 별반 아무 느낌이 없었다.

“혼사를 치르지 못한 점에서는 세루리안이나 우리 찰스나 똑같은 어린아이잖아요? 혼인을 치르기 전에는 작위를 물려주기 어렵지 않을까요?”

제 다섯 살 난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세루리안의 작위 계승을 막겠다는, 뻔한 술수였다.

‘어차피 찰스는 공작이 될 수 없을 텐데.’

루크 공작 위는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어를 사냥할 수 있는 사람이 가주가 될 뿐.

이 나라에서 극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로어는 사실 인간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마수다. 그것은 인간의 공포심에서 태어나 인간 자체를 삼키고, 두려움을 양분으로 더더욱 몸집을 불린다.

결국 무감정한 사람만이 로어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네린느 황녀가 뻔한 술수를 쓰는데도 세루리안은 담담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찰스 루크는 로어 사냥꾼이 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계약 결혼까지 하고, 남의 집 소파에 누워 있게 될 줄이야.’

세루리안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에델의 얼굴을 담았다.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살짝 찌푸려진 이마를 꾹꾹 누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느낄 리 없는 충동이었다. 아니, 말도 안 되는 계약 결혼을 수락한 것부터 그녀에게 홀린 것일 수도.

‘……내가 미쳤군.’

이 집은 지나치게 에델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소리, 맛, 냄새, 촉감. 에델의 모든 것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러고 보면 각하 또한 평소와는 달랐지.’

세루리안은 혼약서에 도장을 받기 위해 공작의 서재에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굴러들어 올 작위를, 굳이 혼인까지 하면서 앞당겨 받으려는 아들을, 공작은 무감각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시끄럽게 굴지 마라.”

단도직입적인 거절이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루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 여자의 말이 뭐라고 여기까지 이걸 들고 왔단 말인가.

‘들떴던 모양이야. 답지 않게도.’

세루리안이 드물게 자조적인 감정을 느꼈을 때였다.

“잠깐만.”

“예?”

세루리안이 혼약서를 다시 집어 드는데, 공작이 갑자기 혼약서를 붙들었다.

꼼꼼하게 읽는 것 같던 그는 초조한 듯 몇 번이나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몸을 휙 돌려 나가 버리며 말했다.

“……책상 위에 있으니 네가 찍거라.”

루크 공작이 초조해하는 것도, 의견을 번복하는 것도, 그의 아들이 된 이래 십수 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예상치 못해 굳어진 세루리안의 눈에 책 한 권이 들어왔다. 바로 주간 가십지였다.

‘공작 각하 서재에 왜 이런 것이?’

에델 아지안에 관해서는, 정말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 * *

세루리안이 몸을 일으킨 건 내가 초고를 완성했을 때였다.

작업에 몰입해 있어서, 그가 곁에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래서 내 곁에 서서 눈으로 기사를 읽고 있는 세루리안을 마주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꺄악!”

“위험합니다.”

깜짝 놀란 나머지 중심을 잃자, 의자가 휘청거렸다.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려는 나를 세루리안이 팔로 끌어안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우와, 힘이 세. 팔이 단단하고.’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없었다. 그래서 막연히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한 손으로 아이를 번쩍 들고, 덥석 안아 올리는 아버지의 팔을 말이다.

‘이런 느낌일까.’

하지만 아버지의 품이라고 하기에는 심장이 아주 안 좋게 펄떡거리는걸. 나는 후다닥 세루리안의 가슴을 밀어내고 다시 반듯하게 식탁에 앉았다.

“고, 고마워요.”

손바닥으로 심장을 꾹 누르니, 내 착각이 아니라 정말 콩콩 뛰고 있었다. 나는 몇 번 심호흡을 했다.

‘너무 깜짝 놀라서 그래. 의자 채로 넘어질 뻔한 일이 얼마나 흔하겠어. 그래서 그렇다고.’

입을 벌리면 두근거리는 소리가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아서,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세루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집필에 무척 집중하신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리어 다치게 할 뻔했군요.”

나는 두 손을 내저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건 세루리안의 탓이 아니었다. 저렇게 큰 덩치의 사내가 곁에 올 때까지 자각하지 못한 내 탓이지.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너무했네요. 집에 손님을 두고 이렇게 제 일에 집중하다니.”

내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사과를 건네니, 세루리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그 부분은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사를 작성하는 모습은 보기 힘드니까요. 초고는 이런 식으로 쓰는 거군요.”

그가 너무나 진중한 어조로 대답하는 바람에 내 얼굴은 푹 익은 토마토인 양 붉어지고 말았다.

“으윽, 창피하네요.”

“흐음?”

그 말에 세루리안의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도대체 왜 창피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창피한 걸 어떻게 해!’

초고는 정돈되지 않은 나의 내밀한 면을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는 느낌이랄까!

한참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던 세루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약혼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킬 수 있는 훌륭한 기사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저까지 궁금해질 지경이군요. 특히 ‘세루리안 루크 공자는 평소 단아하고 우아한 미인을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연 그에 부합하는 미인인가?’라는 대목에서는…….”

“앗, 잠깐만요!”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기 있기, 없기?!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는 의식이 혼미해지는 충격을 느꼈다.

‘저 깔끔한 얼굴로 자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읊다니!’

심지어 세루리안의 억양은 상류층 특유의 것이어서 저 날것의 가십도 우아하게 들리도록 만드는 마법을 보이고 있었다.

‘창피해!’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삶은 오징어인 양 몸을 배배 꼬는 나를 보며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시죠?”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눈앞에서 제 기사를 낭독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요.”

내 대답이 기가 막혔는지, 그는 잘생긴 눈썹을 찡그렸다가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부끄러움이 많으시면서 어떻게 가십난의 기둥이 되셨는지 모르겠군요.”

“저도 모르겠거든요! 세상에는 어쩌다 보니 적성이었다는 것도 있잖아요!”

‘이 남자, 생긴 것만큼이나 무심하고만!’

나는 마음속에서 세루리안의 점수를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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