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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11)화 (11/138)

그때 세루리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 앞에 다가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처럼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의 손바닥에 손을 얹자, 그가 담담한 어조로 맹세를 읊었다.

“제 명예와 목숨을 걸고, 당신을 보호할 것이라 맹세합니다. 레이디 에델.”

내게 레이디라고 불러 주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일부러 설레라고 하는 행동이면 10점 만점에 10점이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눈앞의 수려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설마 인간이 아니고 미남 신인가? 내가 정체를 맞추면, ‘사실 세루리안 루크인 척 네게 장난을 쳐 보았단다’라고 말하면서 씩 웃는 거야.’

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와는 계약관계일 뿐, 그는 날 사랑하지 않고, 나도 얻을 것만 얻어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도 마음이 울렁거릴 정도로.

“레이디 에델?”

그는 대답 없는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는 뺨을 살짝 붉혔다.

‘설령 거짓이라도 좋아.’

이게 한때의 연극이라도, 완전한 가짜라도.

‘최선을 다할 거야.’

나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좀 쑥스럽네요.”

그리 생각하며 세루리안의 손바닥 위에 얹어진 손의 방향을 바꾸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딱딱한 손바닥이 델 정도로 뜨거웠다. 나는 그것을 씩씩하게 흔들며 덧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루크 공자.”

내 말에 세루리안의 눈이 깜빡거렸다. 왜 그러나 했더니, 그가 낮은 어조로 내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세루리안이라고 부르십시오. 아까는 잘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아, 아까는 몹시 당황했으니까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세루리안도 그때를 떠올렸는지.

피식.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맴도는 것 아닌가!

‘어어? 웃었어?’

눈을 깜빡깜빡하는 사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지만.

분명 미소였다.

* * *

어쨌든 세루리안의 깜짝 맹세 덕분에 내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저기요, 세루리안.”

내 부름에, 내 맞은편에서 찻잔을 들고 있던 잘생긴 청년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고집스럽게 닫힌 입술과 무심해 보이는 눈빛이 차가웠지만, 전처럼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가 그에게 그만큼 익숙해져서 그렇겠지.’

어쨌든 오늘 루크 공작가에서 해야 하는 일에는 모두 응한 것 같았다. 나는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런데 내가 말하기 전에 세루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이 많이 진정된 거 같으니, 이제 들어오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네? 무엇을요?”

“당신에게 내가 마땅히 마련해 드려야 하는 검이랄까요.”

“진짜 기사인 당신도 검을 차고 있지 않으니, 비유적 표현이겠군요.”

세루리안과 내가 상대해야 하는 건 같은 적. 바로 바네린느 로사 루크 공작 부인.

내가 그녀를 상대하는데 가질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이겠는가.

‘혹시 정보?’

“저기, 세루리안. 혹시 제가 알지 못하는 공작가의 일원들만 은밀히 알고 있는 바네린느의 약점 같은 게 있을까요?”

“네?”

그거다 싶어진 나는 습관적으로 가슴 주머니에 손을 올렸다가, 지금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세루리안에게 부탁했다.

“일단 펜이랑 수첩 좀 주시겠어요? 기왕이면 공작님에 대한 정보도 주신다면 좋겠네요.”

“공작 부인과 공작 각하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시다는 말씀입니까?”

“네. 제가 공작 부인에게 공작님께서 이미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큰소리를 땅땅 쳤잖아요. 공작 부인은 아마 그 부분부터 확인할 거예요. 저를 광장에 매달기 위해서요.”

황족능멸죄는 교수형이라고 배시시 웃으며 말하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만만치 않은 상대야.’

과거가 떠올라서 손이 덜덜 떨리면서도, 또 반드시 잡아 꺾고 싶은 호승심도 들끓는 묘한 기분이었다.

세루리안은 표정 변화도 없이 떨리는 내 손끝을 바라보다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리본은 나비 모양으로 묶어 드리겠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는 데는 10초 정도가 필요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설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건 아니죠?”

내가 지금 교수형 밧줄이 나비 모양인지, 고리 모양인지가 중요하겠냐고.

‘하지만 이건 그냥 막연한 상상이 아니야. 공작과의 만남이 일주일 이내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제로 일어날 일이다!’

바네린느의 무서운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천사처럼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툭 하고 나락으로 밀어 버릴 테니 말이다.

‘지금 이미 내 뒷조사에 들어갔을 거야.’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힘이 되어 줘야 하는 세루리안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농담이긴 했지만, 반쯤은 진담입니다. 바네린느 황녀도 그렇지만 각하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게 없거든요. 각하께서는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아들한테도요?”

“아들이어도요.”

나는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제가 공작님께 편지라도 쓸까요?”

“……예?”

여간해서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세루리안의 얼굴이 이번에는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저건 또 무슨 반응이람. 나는 턱을 괴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지난번에 루크 공작가의 위대함에 대해 각하께 직접 말하라면서요. 그런 편지를 쓰면 좀 더 제게 호감이 가지 않을까요?”

“각하께서는 그리 감정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그건 해 봐야 아는 거 아닌가요.”

세루리안이 드물게 길게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이 어쩐지 피곤하게 느껴졌다.

“에델, 각하께서는 감정이 거의 없으신 분입니다. 공작 부인이 당신에 대해 묻는다고 해도 이렇다저렇다 대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공작 부인의 말을 두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보다도 더 딱딱하다는 뜻인가요?”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이군요.”

거짓말. 다 알면서.

‘세루리안도 거의 표정이 없잖아.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무래도 세루리안과 루크 공작은 혈연이 아님에도 상당히 비슷한 스타일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루크 공작은 사교계 기사에도 거의 오르지 않는 인물이고.’

내가 턱을 톡톡 두드리며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세루리안이 가볍게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을 흔들었다.

“마침 제가 당신께 드리려고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예?”

바로 그때 집사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와서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

길고양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사이즈로군. 그런 잡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세루리안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선물입니다.”

무미건조한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네요.

“열어 보십시오.”

“이게 뭔데요? 어머!”

상자를 여는 순간, 보석이 빛나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습니까?”

괜찮냐고?

샛노란 빛이 마치 태양처럼 내 눈을 찔렀다. 나는 얼른 상자를 덮었다.

“안 괜찮아요!”

상자 안에 있다가 내 눈을 공격한 물건.

그것은 내 주먹만 한 노란 보석이었다.

‘척 보기에도 보통 물건이 아니야. 아무리 싸구려 보석이라도 내 주먹만 하면 가격이 천문학적일 텐데,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영롱하게 빛나는 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평생 구경할 일도 없어야 마땅한 보석이었다.

깜짝 놀라 입술을 벙긋거리니, 세루리안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계약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계약금?”

누가 계약금을 이렇게 엄청난 것으로 줘.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폭 내었다. 그리고 상자를 반대편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못 받아요. 이건 너무 부담스러워요.”

아직 딱히 뭘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커다란 걸 받다니.

그러나 내 단호한 거절도 단단한 벽 같은 세루리안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세루리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계약에 걸어 준 당신의 인생에 비하면 이 크고 무겁기만 한 돌덩이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냥 크고 무거운 돌덩이가 아니니까 그렇지, 이 사람아.

게다가 인생이 걸렸다니. 솔직히 이혼하고 나면 깔끔하게 내 인생 살 거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다소 의아한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저한테는 이렇게 큰 보석은 필요하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부담스럽다. 나라고 왜 금은보화가 좋지 않겠나. 만약 내 엄지손톱만 한 보석이었으면 좋다고 덥석 받았을 거야.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목에 걸리기 마련이라고.’

그건 우리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세루리안의 말에, 내 마음은 순식간에 ‘안 받는다’에서 ‘받는다’ 쪽으로 기울었다.

“이건 루크 공작 부인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옐로 사파이어입니다. 공작 부인이 계속 달라고 했지만 각하께서 건네주지 않았던 가문의 귀물이죠.”

“세상에…….”

역시 심상치 않아 보인다고 했더니, 루크 공작가에서도 손에 꼽는 귀물이었다.

나는 다시 상자를 열고 보석을 구석구석 뜯어보며 물었다.

“아니, 이런 걸 어떻게 가져온 거예요.”

“그냥 방에서 꺼내 왔습니다.”

“공작 부인이 달라고 했지만 각하께서 거절하셨다면서요.”

이게 무슨 소리야. 농담인지, 선문답인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세루리안을 바라보니, 세루리안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공작 부인께 줄 수 없으셨던 거죠. 제가 이 가문에 처음 입적되었을 때 각하께서 제게 주신 게 바로 이 보석이거든요.”

“이걸요?”

나이도 어린 남자아이에게 왜 공작 부인의 보석을 주었을까.

‘차기 공작은 너다, 하는 증표 같은 거였을까?’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기울이니, 세루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대답은 내 예상과 달리 맹숭하기 그지없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네가 알아서 처분하라고 하시더군요. 아마 제게 있다는 것도 잊고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

“…….”

우리 공작님, 보기와 다르게 허술하시네.

이렇게 커다란 보석을 잊을 수 있다니, 그건 그거대로 대단한 일이었다. 나는 신기한 눈으로 보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꼴도 보기 싫다고?’

그냥 준 것으로 생각하기에는 그 말이 거슬렸다.

‘설마 누군가에게 선물했던 걸까? 그런데 돌아온 걸 보면 거절당했을 테지.’

공작이 오랫동안 독신이었을 뿐이지, 연애 자체를 아예 안 한 건 아닐 테니 말이다.

‘그건 흥미로운데.’

오랫동안 가십난의 기둥을 담당해 온 기자로서 촉이 살랑살랑 발동했다. 언젠가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 정보를 머릿속 한구석에 저장해 두었다. 지금 중요한 건 십수 년 전에 왜 이 보석을 주었느냐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게 바네린느 황녀도 달지 못한 그 보석이라 이거지?’

그런 물건이 나를 장식하고 있으면 얼마나 배가 아플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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