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적당히 치고 빠지자는 뜻으로 세루리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세루리안은 용케 알아듣고 나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물론, 악당처럼 백스텝으로 도망치면서도 나는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그이가 데리러 왔으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귀중한 파티에 초대해 주셨는데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해 아쉽습니다.”
어디 어른 앞에서 네 멋대로 물러나냐고 난리 칠까 봐 심장이 조여들었는데, 세이지 부인은 그 부분이 아니라 내가 세루리안을 부르는 호칭에 꽂혔다.
“우리 그이?”
“우리 그이라는 표현이 좀 그런가요? 그럼 자기? 허니?”
“채신머리없이 어디 그따위 호칭으로 부르려고 해!”
아하. 저도 사실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술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다소 당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요. 저희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연애결혼이죠.”
“하!”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세이지 부인의 얼굴은 험악하게 구겨졌다. 이제는 비꼴 여유도 사라졌는지, 세루리안에게 대차게 소리를 지르는 것 아닌가.
“평민 여자와 사랑 놀음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위가 좋은 줄은 몰랐군요, 세루리안 경!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요!”
뭐래. 사랑에 신분이 어디 있어.
하지만 원래 이런 타입에게는 또박또박 논리로 반박하면 도리어 지게 되는 법이다. 나는 뺨을 복숭아처럼 붉히며 수줍은 듯, 해맑게 소리쳤다.
“진정한 사랑의 승리인 거죠. 그런 의미에서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님.”
얼른 세이지 부인의 입을 다물게 하라는 뜻으로 바네린느를 도발한 것인데.
바네린느는 언제 감정을 숨긴 것인지, 성모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완벽한 미소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깜빡깜빡 경고등이 들어왔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며느님. 자신만만하고 발랄한 것이, 마치 저와 각하의 첫 만남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바네린느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입조심을 하는 편이 좋겠어요. 한 점 거짓이라도 있었다가는 자비로운 저도 차마 감싸 줄 수 없는 참혹한 상황에 처할 수 있거든요. 이 나라의 황족능멸죄는, 그 정도 여부를 망라하여 교수형이랍니다.”
그 말을 남기고, 바네린느는 어서 떠나라는 듯이 우리를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는 순간 얼어붙어서,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하고 돌아섰다.
바네린느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다리가 휘청거렸다. 세루리안이 나를 부축해 주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의 경고등은 꺼지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 가리고 말벌 집을 작대기로 후려친 격이야.’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성급하게 덤벼들었다. 공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공작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소리를 해 버렸으니…….
‘좀 더 준비해서 대응했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까지 그녀와 맞서 싸울 정보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의 약을 바싹 올렸으니. 세루리안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머리가 끓어오른 게 문제였다.
충분히 정원에서 멀어졌을 때, 세루리안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에델, 조금 전에는…….”
하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아아, 어지러워. 세상이 빙글 도는 것 같아.’
너무 긴장한 채로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번진 어지럼증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세루리안의 팔에 매달렸다.
“세루리안.”
“예?”
세루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저 눈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이 푹 놓이는 건지. 나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밀접해진 접촉에 그의 몸이 흠칫거렸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귀에 속삭였다.
“……도저히 못 걷겠어요.”
이것이 현기증이구나.
남의 혈압은 올렸는데, 정작 내 혈압이 떨어지고 말았다.
* * *
그 뒤로는 정말 눈뜰 힘도 없어서 나는 숨만 할딱거렸다. 세루리안은 말없이 나를 안아 들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의 품에 안겨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무거울 텐데 죄송해요.”
“못 들 정도는 아닙니다.”
“빈말로라도 깃털처럼 가볍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거짓말은 못 하는 성정이라.”
가쁜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있는 나를 세루리안은 응접실로 데려갔다.
거기서 꿀을 듬뿍 넣은 캐모마일 차를 마시고 나니 그제야 정신도 또렷해지고, 마음도 다시 차분해졌다.
나는 두 손으로 따끈따끈한 찻잔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따끈한 차를 마시니까 이제야 살겠네요.”
배 속이 따뜻해지니,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금박을 입힌 화려한 벽 장식과 천지창조를 옮긴듯한 벽화, 벨벳 소파.
그리고 나를 이 끝에 앉혀 두고 저 끝에 앉아 있는 세루리안의 모습까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서 앉아 계세요?”
그러자 세루리안이 가볍게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당신과 너무 가까이 앉은 탓에, 감각이 예민해져서 거리를 두는 것뿐입니다.”
“……?”
아니, 진짜 나 무슨 냄새 나니? 이제는 상처받으려고 그래.
‘정말 저 사람도 독특하다니까.’
불쾌할 수 있는 말들인데도, 그가 너무나 건조하게 말해서인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특이했다.
세루리안은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까는 놀랐습니다. 세이지 부인과 공작 부인에게 그렇게 용맹스럽게 맞서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다리의 힘이 풀리다 못해 쓰러진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더니. 그는 세이지 부인의 속을 뒤집은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용맹은 무슨. 그냥 난동을 부린 거죠. 그리고 기절했잖아요.”
세루리안을 무시하는 듯한 세이지 부인의 시선을 보는 순간, 나는 바네린느에 의해 누명을 썼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몇 번을 말해요! 내가 한 게 아니라고요!”
그녀의 추종자들은 애타게 혐의를 부정하는 나를 꾸짖었다. 내 변명은 한마디 듣지도 않은 채 말이다.
“너같이 천한 것이 감히 누구 말씀을 부정해?”
처음에는 근위대가 조사하면 자연스레 내 누명이 벗겨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조사는커녕, 내게는 한마디 말도 듣지 않고 바네린느의 증언대로 수사를 진행했다.
유일한 증인이자 피해자인 하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황궁의는 한 시간 이상 폭행이 이루어진 것 같다고 진술했다.
다행인 것은 그 시간에는 나와 함께 문서 작업을 한 동료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더 이상 나를 범인으로 몰아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내가 무고한 상황임이 분명한데도, 바네린느 황녀는 수사관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허나, 엄연히 피해자가 있는데,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야.”
그리 말하는 황녀의 표정은 너무도 천연덕스러웠다. 주변 사람들이 어째서 바네린느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과연 자비로우신 황녀님’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지도 이해가 될 만큼.
“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난 잘못이 없으니까요! 끝까지 소송을 걸 거라고요!”
항변했지만 결국 나는 짐 상자를 들고 황궁 밖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황궁 밖으로 나온 나를 반긴 소식은 내 투지를 꺾기에 충분했다.
“간밤에는 어디 있었니, 에델? 네 어머니가 너를 찾아 나섰다가 로어한테…….”
바로 엄마가 로어에게 희생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세이지 부인의 눈빛은 그때 바네린느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던 사람들과 똑같았지.’
그래서 참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수모를 견디는 세루리안이, 그동안 오늘 내가 목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모를 당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세루리안을 위해 나섰다기보다는, 그와 겹쳐 보이던 과거의 나 때문이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그래도 속은 시원하네요. 후환이 두렵기는 하지만요.”
세월 참 좋아졌다. 내가 이렇게 바네린느 황녀의 속을 살살 긁을 수 있게 되다니. 돈 주고도 못할 진귀한 경험이었다.
“모두 당신이 와 준 덕분이에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그 소리를 그냥 듣고 있었을걸요. 물론, 순순히 당해 주지는 않았겠지만요.”
하다못해 티 파티가 끝난 뒤 눈물을 흘리며 신문사와 인터뷰라도 했겠지.
대중들은 신데렐라 스토리에 열광하니, 평민이면서 차기 루크 공작 부인이 될지도 모르는 내 이야기에 쉽게 공감하고 힘을 보태 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내가 오늘 온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당신의…… 기척을 느꼈습니다.”
“예?”
기척? 이 넓은 저택에서 그게 가능하긴 해?
더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세루리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 설명하기 어렵고요. 그건 그렇고.”
세루리안은 짙게 가라앉은 푸른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꼭 내 속마음을 모두 읽겠다는 듯이 말이다.
“당신은 그녀를 원망한다고 말했지요.”
그건 그의 말투만큼이나 우아한 표현이었다.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원망? 그건 참 가벼운 표현이네요. 저는 그녀가 벼락을 세 번쯤 맞아서 죽었으면 좋겠어요. 한 줌 재도 남지 않게요.”
바네린느를 떠올리니 저절로 내 어조가 신랄해졌다. 그리고 그 신랄함은 공작 부인의 마지막 눈빛을 떠올리는 순간 파스스 스러지고 말았다.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으으, 그래도 막상 그녀의 미소를 마주하고 있으니 심장이 쫄깃한 거 있죠?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고.”
그토록 온화하고 상냥한데 영점 이하의 온도로 느껴지는 미소도 이 세상에 없으리라. 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세루리안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저를 꼭 보호해 줘야 해요! 알았죠?”
내 말에 세루리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부인도 나 몰라라 하는 쓰레기는 아닙니다만.”
그의 인품이야 믿지만, 사람이 나쁜 일을 하는 건 그 개인의 품성보다도 상황의 영향이 더 크기 마련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혹시 모르죠. 이혼하는 것보다 사별하는 편이 동정 여론에 좋겠다 싶어서 죽도록 내버려 둘지.”
“과연 기자다운 분석이군요.”
세루리안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헤헤,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내가 가십난을 담당하면서 너무 막장 이야기를 많이 들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