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입니다.”
세루리안은 나를 수도에서 가장 큰 의상실로 안내했다. 내부는 갖은 천으로 장식해 몹시 화려했고, 공간은 넓었으며, 색색의 시제품들이 마네킹에 걸려 있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직원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리 왕림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으아.”
과한 환대에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예의상 미소를 지을 법도 한데, 세루리안은 미소는커녕, 대답조차 하지 않고 의상실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의상실 마담이 나를 보고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분이 드레스의 주인공이시군요.”
“네, 안녕하세요.”
“혹시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마담은 역시 프로였다. 세루리안 루크가 처음 보는 여인을 데리고 나타났는데도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니.
‘하녀로 따라나선 것도 아니고, 내 드레스를 맞추러 오다니. 내 인생에 있을 거라 생각도 못 한 일이네.’
참고로 나는 잠입 취재를 하기 위해 한 달간 하녀 노릇을 하며 귀족가에 숨어든 적도 있었다.
‘이제는 팔자에도 없는 약혼녀까지 연기하게 되었구나.’
내 목적이 로어에 있다 보니 이것도 잠입 취재하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하는 김에 잘해야지!
나는 생글 웃으며 세루리안의 팔에 팔짱을 꼈다. 바네린느와 만나기 전 미리 소문을 내 두는 편이 좋겠지.
“이 사람의 약혼녀예요.”
그러자 마담은 살갑게 웃으며 연신 박수를 쳤다.
“어머나, 어머나! 약혼이라니 축하드려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게 느껴진다.’
축하를 받는데도 이렇게까지 불편하기가 쉽지 않은데. 나를 향해 반짝이는 두 눈이 대놓고 묻고 있었다.
어디 사는 어느 댁 영애니?
‘아무 댁 영애도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도 없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마담은 꼭 내 오랜 친구처럼 팔을 이끌며 다다다 말을 쏟아 냈다.
“어서 이리 오셔서 치수를 재시어요. 공자께서 디자인을 미리 주시길래 도대체 어떤 분이 오시나 했더니, 과연 키가 크고 고풍스러운 미인이시네요.”
“네? 디자인이 미리 정해져 있나요?”
내가 원하는 걸 고르는 거 아니었어? 물론, 고르라고 해도 난감하긴 매한가지였겠지만 말이다.
내 말에 마담은 까르르 웃었다.
“그럼요. 아주 상세하게 지시서가 날아왔답니다. 이미 원단까지 모두 수배가 끝난 상황이지요. 다음 주에 입으셔야 한다면서요.”
세루리안을 바라보자 그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급박하게 일정을 잡아서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것 같군요.”
“별말씀요. 호호”
마담은 나를 파티션으로 가려진 반 밀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속옷만 남기고 다 벗으라고 했다.
주섬주섬 지시대로 하고 있으니, 마담이 대비할 틈도 없이 훅 치고 들어왔다.
“공자님은 사석에서는 어떠신가요?”
행여나 세루리안의 귀에 들어갈까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지만, 반짝거리는 눈빛이 백 미터 밖에서도 보일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가십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것인가 모범 답안들이 통통 떠올랐다.
그중에 내가 골라잡은 것은 이것이었다.
“……다정하셔요.”
남에게는 차갑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남자가 제일이지.
내 대답을 들은 마담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그녀의 표정이 ‘거짓말하지 말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네, 제 귀에도 상당히 거짓말 같네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세루리안도 들으면 어이없어할까? 그냥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굴겠지.’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니 새삼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 남자의 손을 답삭 잡았나 싶었다.
‘서로 원하는 것이 있어서 손을 잡았으니,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솔직히 그가 나와의 혼인을 그렇게 오래 끌고 갈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공작 위를 얻게 된 뒤에는 정중하게 이혼을 청할 가능성이 크겠지.
‘그때에도 신사적으로 굴 테니 걱정은 별로 안 돼. 그 부분만큼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
무슨 무리한 요구를 해도 표정 변화 없이 ‘그러세요’라고 대답할 것 같단 말이지.
‘나쁘지 않은 사람이야.’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결혼에 대해 생각하니,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이 유리 조각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젊을 때는 사랑하면 다인 줄 알았지. 쓰레기를 만날 바에는 애정 없이 믿을 만한 상대와 계약하는 게 더 나아.”
그렇게 투덜거리던 엄마는 내 머리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하지만 예쁘고 현명한 우리 딸은 널 사랑해 주면서 인품도 훌륭한 남편을 만날 거야. 엄마의 말을 듣고 미리 사랑을 포기하진 말렴.”
그런데 어쩌죠, 엄마. 이미 저는 미션에 실패한 거 같은데요.
‘우리 엄마도 내가 취재 목적으로 계약 결혼을 할 줄은 몰랐을 거야.’
아니, 애초에 내가 기자가 될 줄도 몰랐겠지.
내 몸 여기저기를 휘감는 줄자에 따라 이리저리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으니, 시중을 들던 마담이 호호호, 하고 웃었다.
“그런데 보통 드레스를 맞출 때는 어머님과 함께 오시는데요. 약혼자와 함께 오시다니 정말 사랑이 넘치시나 봐요.”
은근히 내가 어느 집 여식인가 떠보는 질문이었다. 기자 생활하면서 눈치만 비상하게 는 내가 그것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나는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었거든요. 그이가 배려해 준 거랍니다.”
“아, 죄송해요.”
돌아가셨다는 말에, 마담의 경쾌한 혀도 그 힘을 잃었다. 덕분에 남은 치수를 재는 동안 나는 조용히 있을 수 있었다.
마담은 꼼꼼하게 팔뚝과 허벅지까지 모두 둘레를 잰 뒤, 내게 단추가 달린 원피스를 내밀었다.
“치수는 다 쟀답니다. 이제 이 옷을 입어 주세요.”
“이건 뭐예요?”
“데이트에 어울리는 로맨틱한 드레스예요. 제가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아…….”
하긴, 계속 잠옷을 입고 번화가를 활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선물이라고 받기에는 과한 것 같은데.’
척 보기에도 문을 열고 나가면 양산을 쓰고 이런 원피스를 입은 여성들이 줄지어 있을 것 같은 최신 유행 드레스였다.
‘그냥 세루리안보고 이것도 값을 치르라고 말해야겠지? 나는 지금 지갑도 없고.’
그런데 세루리안에게 어디서 어디까지 돈을 내라고 해야 하나? 내 의복값도 계약 결혼의 착수비(?)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고 머뭇거리면서 쉬이 팔을 끼우지 못하고 있으니, 마담이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드레스를 스무 벌이나 주문해 주셨는데 당연히 저도 성의를 보여야지요.”
“스무 벌이요?!”
아니, 고르라는 말도 없이 치수부터 재라고 해서 그냥 미리 골라 놓은 디자인이 있나 보다 하긴 했는데.
‘스무 벌이라니, 너무 많잖아!’
내가 처음 듣는다는 기색을 역력히 냈는데도, 마담은 역시 능숙한 장사꾼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반응을 흘려넘겼다.
“너무 많이 고르셔서 기억이 안 나시지요? 디자인지를 보시겠어요?”
“아아, 네.”
“이게 아가씨께서 다음 주에 입으실 메인 드레스랍니다.”
나는 마담이 펼친 디자인지를 들여다보았다. 목선이 깊게 파인 연녹색 드레스였는데, 소매는 넓게 퍼지고 허리를 꽉 조인 것이 특징이었다. 허리의 리본은 연분홍색으로 지정하는 등, 세세한 디테일까지 구체적으로 지시되어 있었다.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나.’
도대체 어떤 표정으로 이 드레스를 골랐을까. 세루리안이 고른 게 아닌 걸까. 아니면 의외로 멋 부리는 것에 관심이 많다든가?
세루리안에 대해서 아직 아는 게 별로 없는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세루리안의 말대로 치수를 재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의상실에서의 볼일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마담이 챙겨 준 원피스에 신발을 챙겨 신고, 머리를 하나로 둥글게 말아 올린 나는, 의상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세루리안에게 소곤거렸다.
“아니, 무슨 드레스를 스무 벌이나 사셨어요?”
세루리안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눈을 깜빡이고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백 벌도 부족합니다.”
“아니, 그렇게 많이 쌓아 두어서 어디다 쓰려고요.”
평범치 않은 결혼이니 아마 약혼식은 생략할 테고, 나는 평민이고 바네린느 황녀가 건재하니 사교계 활동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스무 벌은 다 입지도 못하고 유행을 보낼 수도 있다고!’
하지만 마냥 세루리안을 탓할 수도 없었다. 나는 사교 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복장이나 장신구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중에 이혼할 때 나한테 청구하지는 않겠지. 이것도 다 추억이다, 하고 받아 두자.’
속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세루리안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더니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많습니까? 공작 부인을 보니 절대 많지 않은 것 같던데요.”
“그건 그분의 취향이죠. 저는 그냥 편안한 옷 입고 달달하게 조린 돼지고기 먹는 게 더 좋아요. 드레스는 입으면 불편하기만 하고.”
공작 부인이야 황녀 출신이니 오죽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하는 데 익숙하겠나.
어쨌든 아침부터 폭풍처럼 몰아쳤더니 배가 고팠다. 나는 세루리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런 의미에서 맛있는 식당은 찾아 두셨어요? 저 이제 현기증 날 것 같아요.”
“이상한 말이군요.”
세루리안은 자신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내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가볍게 그 손을 붙들어 자신의 팔에 올려놓았다. 갑자기 그의 에스코트를 받게 된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직접 맛있는 식당을 알아보겠다더니, 정말 그가 안내한 곳은 맛있는 모닝 세트가 나왔다.
‘우와, 요새는 셰퍼드 파이를 아침에 내는 가게가 별로 없는데.’
빵 안쪽을 자르니 잘 익힌 등심이 육즙을 주르륵 흘렸다. 스르륵 녹아서 늘어지는 치즈를 돌돌 감아서 입에 쏙 넣으니,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진짜 맛있다.’
즐겁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세루리안은 무얼 먹고 있나 싶어서 쳐다보았지만, 그의 앞에는 따뜻한 물 한 잔만 놓여 있었다.
‘식사를 하고 온 걸까?’
냄새에 예민한 것 같더니, 그래서 차 대신 맹물만 마시는 걸까.
‘이거 맛있는데. 기껏 알아보고 자기는 먹지 않는다니 아쉬운걸.’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두 손을 깍지를 끼고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셨군요.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그의 말에 깜짝 놀란 건 나였다. 파티션 뒤에서 잠깐 나눈 대화인데도 다 들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