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1)화 (1/138)

엄숙한 목소리가 법정을 울렸다.

“죄인, 바네린느 루크 공작 부인.”

황제의 목소리에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솟아났다. 연한 금빛 머리카락이 흩어져서 수척한 얼굴을 감쌌다.

죄수석에 앉은 청초한 여인, 그녀는 바로 내 시어머니다.

“내가 죄인이라니…… 하지만 분노로 법정을 어지럽히진 않겠어요. 악법도 법이니까요.”

누가 보면 없는 죄를 만들어서 가두는 듯 가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은 나는 속이 뒤집혔다.

‘가증스러운 모습도 이제 끝이야. 정말 오랜 인내의 시간이었어. 당신을 그 자리에 앉히기까지 말이야.’

바네린느는 황녀였기 때문에 법정에도 황제가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다. 황제는 증인석에 선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대, 더 할 말이 있는가?”

“신분과 상관없이 지은 죗값을 공정하게 치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지금도 들키지 않았더라면 이런 꼴이 되지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고 계실 테니까요.”

법정은 조용했다. 내 말을 들은 바네린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더 이상 회피할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바네린느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잔인한 독설이 아름다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게 말이야. 벌레 같은 것들이 광분하는 꼴이 우습구나.”

그것은 천사인 척하던 악마가, 비로소 제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그녀의 축 처져 있던 동그란 눈망울이 요염한 미소를 그렸다.

소름과 전율이 동시에 일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드디어, 내 원수가 사악한 본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구나!’

내가 철천지원수의 며느리가 된 것은 몇 달 전의 일이었다.

* * *

내 이름은 에델 아지안. <뉴캐슬 타임스>의 간판 기자다.

주요 분야는 가십. 내게는 처음 만난 사람도 자신의 흑역사를 줄줄 불게 할 친근함과 천연덕스럽게 위장하여 정보에 접근하는 뻔뻔함, 그리고 떠도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배치하는 글솜씨가 있었다.

편집장은 그런 나를 가십난을 책임지는 <뉴캐슬 타임스>의 기둥이라 부르곤 했다.

뭐, 본래 내 꿈이 ‘가십난의 기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내 꿈은…….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을 떠올리며, 평소와 다를 게 하나 없는 출근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찢어질 듯 높은 비명이 들렸다.

“로어다!”

“뭐?”

특종이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비명이 시작된 한쪽 거리 끝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반대쪽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넘어져서 신발이 날아가면 맨발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포에 물들어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종이 뎅 하고 쳤다.

‘이건 진짜야!’

정리된 사건 현장을 후속 취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란 말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내 발은 본능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로어. 무엇 때문에 생겨나는지, 어디서 찾아오는 건지 모를 무시무시한 마물.

뉴캐슬을 공포에 떨게 하는 미스터리한 마물, 로어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바로 내 진정한 꿈이었다.

‘로어가 나타나면 현장을 봉쇄하니, 제대로 된 목격담이 없어. 기자들에게 보여 주는 현장은 늘 깨끗하게 치워진 것들뿐이고.’

몇 년 전, 나는 로어에 의해 엄마를 잃었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엄마가 그날 입었던 옷가지뿐이었다.

그 뒤로 다짐했다. 더 이상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로어에 대해 파헤치기로 말이다.

‘평소에는 그렇게 찾아다녀도 나타나지 않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순식간에 사람들은 멀어지고, 거리에는 어느 순간 나만이 남았다.

‘도대체 어디?’

나는 눈도 깜빡거리지 못한 채 거리를 살폈다.

‘대체 어디 있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고요해진 거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들어가 봐야…….’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앞의 시야가 일그러지고 균형 감각이 흐트러졌다. 마치 커다란 망치가 내 머리를 후려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수첩을 두 손으로 힘주어 쥐었다.

‘설마 지금 로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당황한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시야에 급작스레 바닥이 가까워졌다. 내가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혼란스러워졌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힘주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과 얼굴을 마주했다.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에, 맑은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남자였다.

꾹 다물린 입술 때문인지, 아니면 표정 없는 얼굴 때문인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조각상이 입을 벌렸다. 얼굴과 어울리는 그윽한 목소리가 담담한 어조로 울렸다.

“왜 남들과 반대로 달리고 있습니까?”

“그야…….”

내 목적을 밝히려던 순간이었다. 남자의 수려한 미간이 일그러지더니 현기증이 인 듯 갑자기 비틀거렸다.

“헉!”

“뭐, 뭐야? 괜찮아요?”

“윽.”

이 남자는 갑자기 왜 이런단 말인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이마를 짚었을 때였다.

“냄새…….”

그의 입술이 벌어지고 억지로 쥐어짠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겨워.”

“뭐?”

냄새라니? 역겹다니?

나는 반사적으로 내 어깨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뭐라도 더 묻고 싶었지만, 그는 이야기를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위험한 곳이니 대피하십시오.”

건조한 어조로 그리 말한 뒤, 나타났던 방향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나는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뭐야, 진짜…….”

* * *

출근길에 특종을 잡는가 했더니, 낯선 남자에게서 역겹다는 말만 들었다.

결국 빈손으로 헐레벌떡 신문사에 들어오니 대머리 편집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에델! 지각이야, 지각! 주간지 마감이 오늘까지인 거 잊었어? 이번에는 사교계의 나쁜 며느리 특집을 쓰기로 했잖아!”

“다 썼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편집장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우리 매출이 빵꾸가 날랑말랑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면 뭐가 중요하다고?”

“로어요. 로어가 나타났었다고요.”

흥분을 억누르며 대답하는 내 뒤를 편집장은 계속 쫓아다니며 칭얼거렸다.

“또또, 로어 타령! 제발 그거 하지 말라니까. 그런 특집은 해 봤자 우리 애독자 중엔 보는 사람도 없고, 취재비도 못 뽑는다고. 어휴, 글만 못 썼어도.”

편집장이 저렇게 자기 말만 할 때 입을 다물게 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는 봉투를 편집장의 품에 안겨 주었다.

“자자, 이게 바로 찾으시던 그 특집 기사입니다.”

“오오옷!”

원고를 꺼내 본 편집장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폴짝폴짝 뛰었다.

“좋아. 아주 좋아. 다들 에델만큼만 해!”

“허허.”

저렇게 했던 말을 바로 바꾸는 것도 재주다, 재주.

자리에 앉은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편집장을 보내고 나니 짙은 허탈감이 밀려왔다.

‘결국 이번에도 로어는 허탕이었어.’

드디어 실물을 볼 수 있나 싶었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도 나뿐인가 싶고.

‘정말 로어를 취재하는 건 의미가 없을까.’

내가 한숨을 폭 내쉬고 있으니, 후배가 나를 불렀다.

“선배, 기사 좀 봐주시겠어요?”

“뭔데? 이리 줘봐.”

후배가 내미는 기사의 헤드라인은 자극적이기 짝이 없었다.

<세루리안 루크, 그는 이대로 영원히 공자로 끝날 것인가!>

자극성이야 우리 신문사의 특징이니 별로 놀랄 건 없었는데.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헤드라인이 아니라, 그 기사에 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 초상화를 낚아채며 물었다.

“이게 누구야?”

내 물음에 후배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웃었다.

“누구긴 누구예요? 세루리안 루크 공자죠.”

“세루리안 루크.”

그린 지 오래된 듯 살짝 빛이 바랜 초상화 안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금발 소년이 서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진작 왜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지?”

이렇게 눈에 띄는 얼굴인데 말이다.

그는 바로 아까 만나, 나에게 역겹다는 말을 내뱉은 남자였다.

‘최연소 로어 사냥꾼.’

* * *

집에 돌아온 나는 부츠만 벗어 던진 채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자료실에서 들고 온 세루리안 루크의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세루리안 루크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독신남이었다.

오랫동안 미혼이었던 루크 공작이 들인 하나뿐인 수양아들.

한때 공작가를 물려받게 된 이 운 좋고 예쁘장한 평민 아이에 대해서 온 나라 신문이 기사를 쏟아 냈었단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때일 뿐.

스물넷이 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루크 소공작이 아닌 루크 공자였다.

‘그의 사정은 이 나라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지. 몇 번이나 신문에 났고 말이야.’

처음 이 평민 아이가 공작가에 발을 디뎠을 때, 사람들은 이 아이가 차기 루크 공작이 될 거라고 조금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루크 공작이 6년 전 열 살 어린 아내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기 전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 부인은 나도 몹시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바네린느 황녀.”

입술 사이로 내뱉는 그 이름이 몹시 익었다. 수년간, 한 번도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불에 덴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렴. 인생이 원래 그런 거란다.”

그녀와 마주한 게 벌써 수년 전 일인데도 떠올리는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해묵은 원한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 여자는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나를 이렇게 괴롭게 만들고도.’

내 시선은 다시 세루리안 루크의 초상화로 향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 때문에,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지금은 시리도록 푸른색으로 보였다.

최연소 로어 사냥꾼.

‘기사의 순위를 매기는 것이 저급한 행위로 치부되어 말을 꺼내지 않을 뿐이지, 이 나라 최고 기사를 꼽으라면 다들 내심 그를 꼽을걸. 그만큼 로어에 대한 정보도 많이 가지고 있을 거야.’

더불어 그는 바네린느 황녀를 물 먹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공작 위를 잇는 것이 확실해지면 바네린느 황녀도 속이 뒤집힐 테지.’

로어의 정체를 파악하고 바네린느에게 복수하는 것.

내가 원하는 두 가지는 모두 이 남자를 통해서 이룰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늘 만났을 때 좀 더 붙들고 이야기해 볼 걸 그랬어. 아니면 연락처라도 받아 둘 것을!”

아쉬움에 다리를 마구 굴렀지만, 그 발버둥은 오래지 않았다.

“……역겨워.”

분명, 역겹다고 했다. 그런 말을 내뱉는 남자를 붙들고 뭐라고 말할 수 있겠나.

“어쨌든 다시 만나면 좋겠다.”

그땐 꼭 캐묻고 말 것이다. 로어가 무엇인지.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쳤다.

“……계약 결혼이라도 해 보자고 할까?”

작위 계승을 위해서 그에게 부인이 필요하다는 것은 기자들끼리는 암암리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공작 위를 물려주기 위해 바네린느가 내세운 조건이 혼인이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이상적인 거래가 되지 않을까?’

그는 나와의 결혼으로 공작 위를 쟁취하고, 나는 그에게 로어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바네린느를 물 먹이고.

“뭐, 그것도 다 내 생각이지.”

다시 만날 수나 있겠나. 나는 그리 생각하며 초상화를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래.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기는 했다.

그러긴 했다고. 그런데.

“그대가 쓴 기사들은 모두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이른 아침, 신문사 테이블에 세루리안 루크가 흰 장갑을 낀 손을 깍지 낀 채 다리를 꼬고 조각상처럼 현실감 없는 자태로 앉아 있었다.

무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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