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가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남부의 햇살은 계절감 없이 쨍하게 저택을 내리쬐었다.
수풀이 무성한 정원은 노란 알라만다가 활짝 피어 풀 내음과 함께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정원에 물을 주고 있던 메슈가 시선을 느끼고 2층 창가를 향해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에 맞춰 에리얼도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하얀 손톱 끝에 햇살이 부서져 반짝거렸다.
“정원은 봐도 봐도 정말 예쁘다니까. 어쩜 이렇게 알록달록한지.”
창밖을 바라보던 에리얼이 풍경에 넋을 잃고 점점 고개를 쭈욱 뺐다. 까치발을 들고 앞으로 몸을 숙이더니, 이내 상체의 대부분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뒤편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베르트발드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쯧, 혀를 찼다. 그리고 능숙한 손길로 에리얼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위험하다니까.”
질질 끌려오는 몸은 배가 부풀 만큼 부풀었음에도 여전히 가볍기만 했다. 놔달라고 바둥거리던 에리얼은 베르트발드의 얼굴을 마주치고서 합, 입을 다물었다.
“2층에서는 몸 내밀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그게, 구경하다 보면 저절로 몸이 앞으로 나가요. 저도 조심하고는 있는데.”
“어제도 그러다가 떨어질 뻔했잖습니까. 부인께서는 겁이 없어서 더더욱 곤란합니다.”
에리얼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저도 아는데. 조심하고 있는데….’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엄한 얼굴로 그녀를 꾸짖던 베르트발드는 이게 몇 번째인가 싶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이 보이기 시작한 이후로 에리얼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걷다가 넘어지기가 일쑤였다. 발밑을 보고 걸어야 하는데 앞의 사물만 홀린 듯이 쳐다보고 걸으니, 당연히 넘어질 수밖에.
세상이 신기해서 그러는 건 이해하지만 그녀는 아기를 가진 몸이었다. 다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덜렁대는지.
매일 그녀를 지켜보는 베르트발드로서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사용인들이 부인을 지켜본다 해도 한계가 있었다. 자신이 곁에 없을 때 그녀가 다치는 건 지긋지긋했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던 베르트발드는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나 내년까지 출산 휴가야.」
청사에 출근하자마자 이 말 한마디만 내뱉고 몸을 돌렸다.
보좌관인 셰인은 무슨 또 헛소리냐는 둥, 집정관 때려치우더니 이제는 영주도 때려치우려 한다는 둥, 임신한 게 백작 부인이지 저 인간은 아니지 않느냐는 둥 하며 애꿎은 바이온의 등짝을 짝짝 후려쳤다.
바이온 또한 어처구니없는 건 마찬가지였던지 등짝을 맞으면서도 아니, 허, 참, 허,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백작님! 파하르 도산하는 꼴 보고 싶으세요?」
마차까지 쫓아온 셰인이 얀셀가의 인장을 들고 협박했다. 베르트발드는 턱을 쓸며 고민에 빠졌다.
만약 베르트발드가 좋은 상사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다 사과하고 함께 열심히 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트발드는 좋은 상사라기보다는 현명한 상사였다. 진정 현명한 상사는 자신이 직접 일하는 것보다 자신이 할 일을 똑똑한 놈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셰인과 바이온은 제법 똑똑한 놈들이었다.
「도산하면 자네에게 줄게. 갖고 싶으면 힘내 보라고.」
내년에 봐, 출산 선물 잊지 말고. 손을 흔들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뒤에서 셰인이 백작니이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소식 이후, 당연히 청사가 발칵 뒤집혔지만 베르트발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정말 중요한 일 외에는 부르지 말라 으름장을 놓고 휴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에리얼과 붙어 있었다.
“백작님은 매일 붙어서, 매일 하지 말라고만 하시고.”
그러나 막상 들려온 건 불만스러운 목소리였다.
드레스 자락을 조몰락거리던 에리얼이 눈을 외면하며 작게 투덜거렸다.
“먹지 말라는 것도 많고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노는 것도 안 된다고 하시고 나가는 것도 안 된다고 하시고.”
“그야 부인께서 위험한 짓만 하시니 그렇지요. 걷는 것도 뒤뚱거리면서 땅따먹기는 무슨… 쪼그려 앉아서 화초 심는 것도 금지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그리고 먹는 것도. 커피, 멜론, 날생선, 파인애플 전부 드시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오래 놀지도 않는다고요. 먹는 것도 조금씩은 괜찮다고 에바가.”
“에바는 에바고 저는 접니다. 안 되는 건 안 돼요.”
분한 듯 입술을 우물거리던 에리얼이 베르트발드를 힐끔 쳐다보고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하러 나가실 때가 좋았는데.”
팔짱을 낀 채 그 꼴을 내려다보던 베르트발드가 코웃음을 쳤다.
정말 나가볼까요, 나가서 들어오지 말아볼까요 하며 쏘아붙이려다가 이런 건 역효과만 난다는 생각에 말을 삼켰다.
눈을 되찾은 이후로 지금까지 약 두 달여간 에리얼과 붙어 있던 결과, 베르트발드는 이 여자가 굉장히 청개구리 같은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면 할수록 더 하는 것이다. 참다못해 호되게 꾸짖으려 하면 목을 잔뜩 움츠린 채 망아지 같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본다. 고운 눈으로 억울한 듯 자신을 쳐다보면 혼내려던 감정이 사르르 녹아 사라져버린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된 결과 에리얼은 점점 더 기세등등해졌다. 눈빛에 속아 유야무야 넘어간 자신도 등신이긴 마찬가지지만 태도를 고치지 않는 에리얼도 문제가 있었다.
더 이상은 곤란하지. 베르트발드는 노선을 바꾸기로 했다.
“봐요, 에리얼.”
창틀 너머로 쭈욱, 몸을 뻗었다. 양손으로 창틀을 움켜쥐고서 정원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상체가 넘어갈수록 에리얼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베르트발드는 뛰어내릴 것처럼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말했다.
“여기 높이를 좀 봐요. 밑에 관목이 있긴 하지만 완충 효과는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이대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죽어요! 백작님! 뒤로, 뒤로!”
“죽나 안 죽나 한번 확인해볼까요?”
“아익! 빨리 뒤로 오세요! 진짜 위험하단 말이에요!”
바지춤을 붙든 채 에리얼이 애원했다. 베르트발드는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걸 참고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난처한 얼굴로 서 있던 에리얼을 제품으로 끌어당겼다. 튀어나온 배 때문에 저절로 간격이 생겼지만, 개의치 않고 에리얼을 꽉 끌어안았다.
“보세요. 부인께서 보시기에도 위험하지 않습니까. 부디 조심하세요. 잠깐 눈 뗀 사이에 매번 넘어지고 다치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조심할게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에리얼이 대답했다. 여전히 시선은 아래로 향한 채였다.
지그시 그녀를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최근에 에리얼이 나와 얼굴을 마주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없는 것 같은데.
눈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항상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했는데 우습게도 시력을 되찾은 이후로는 늘 시선을 딴 데 두고 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상한데.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 이름을 불렀다.
“에리얼.”
“네?”
힐끔, 맑은 눈동자가 잠시 그의 얼굴 위를 머물렀다가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졌다.
“에리얼.”
“네, 듣고 있어요.”
또다시 힐끔, 눈동자가 올라왔다가 떨어진다. 베르트발드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자꾸 눈을 피합니까. 얼굴 들어봐요.”
“아니, 그게.”
“왜요. 혹시… 나한테 잘못한 거 있구나. 그렇죠?”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힐끔, 힐끔힐끔, 눈동자가 바쁘게 위아래를 오가며 베르트발드를 힐끔거렸다. 대체 뭔가 싶어 베르트발드가 턱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에리얼이 질끈 눈을 감았다.
“저 백작님 얼굴 보는 거… 좀 그래요.”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옆으로 세운 채 에리얼을 내려다보았다. 동그랗게 치켜뜬 눈이 금세 가늘어지고, 암청색 눈동자 속에 의아함과 분노가 일었다.
초면에 꺅꺅거리는 게 자연현상처럼 느껴질 만큼, 살아오는 내내 외모에 대한 찬사를 지겹도록 들어온 베르트발드였다. 그런데 얼굴을 보는 게 좀 그렇다니.
아니, 싫으면 싫은 거지 좀 그렇다는 건 또 뭔가.
“제 얼굴이 싫으십니까.”
아래를 향해 눈을 끔뻑거리던 에리얼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그게 아니고!”
서슴없이 에리얼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자신을 바라보게 하자 에리얼이 꾸욱 눈을 감았다. 베르트발드는 다른 손으로 에리얼의 눈을 벌려 억지로 자신을 보게 했다.
“으, 백작님! 왜 그래요! 으!”
“예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내외합니까. 눈 떠요, 빨리.”
“으아, 아니! 좀 놔주시고!”
에리얼이 주먹을 들어 베르트발드의 손을 툭툭 쳤다. 그럼에도 베르트발드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 뜰게요, 뜬다고요, 수긍의 빛을 내비친 이후에야 베르트발드가 손을 내려놓았다.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에리얼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새카만 속눈썹 아래, 파하르의 에메랄드 빛 바다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만 같은 화려하고 예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 돌리지 말고.”
베르트발드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지그시 에리얼을 마주 보았다.
입덧이 끝난 에리얼은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전보다 더 동그랗고 어여뻐졌다. 항상 초점이 흐릿하던 잿빛 눈동자 대신 고운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니 얼굴만 봐도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었다.
즐거운 베르트발드와 달리 에리얼은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흔들리는 동공과 부들부들 떨리는 입매가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에리얼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마지못해 진심을 털어놓았다.
“백작님이랑 눈 마주치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단 말이에요. 막, 안절부절못하고… 아무튼 불편해요.”
“내가 왜 불편… 눈 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가는 머리통을 단단히 붙잡고 물었다. 억지로 마주 보게 했지만 에리얼은 눈을 옆으로 굴려 시선을 피했다.
“또 그런다. 똑바로 봐요.”
“아니… 그냥 저 혼자 보고 있을 때에는 괜찮은데요. 백작님이랑 눈이 마주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