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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141화 (141/145)

141화

가라앉은 공기가 침대를 떠돌았다. 멍하니 그의 말을 반추하던 에리얼이 한참 동안 입을 벙긋거리다 가까스로 말을 토했다.

“그게… 그런. 어떻게 그렇게….”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말도 안 돼,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혼잣말이 에리얼의 귀에 닿았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들이닥쳤던 삶의 기로는 늘 좌절과 그보다 더 심한 좌절로 갈리곤 했다. 좋은 것 없이 최악이 아니기만을 바라던 인생의 수많은 선택지들.

아기와 눈, 이번 일 또한 다른 타협점 없이 불운을 순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걸 불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를 희생해서 아이가 평범하게 자랄 수 있다면….

눈이 먼 아이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꾸, 꿈이야.”

쨍한 하늘색과 연두색이 섞인 오묘한 빛의 눈동자 속에 천천히 물기가 고였다. 울음을 참기 위해 바짝 굳은 입매 아래, 턱 끝에 호두 모양으로 주름이 일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을 보고 베르트발드가 서글픈 웃음을 흘렸다.

“꿈 아니라니까.”

“꿈…이야. 나한테,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베르트발드가 자꾸 오므라드는 그녀의 손을 세게 부여잡았다.

“내가 말했죠. 우리 아기는 축복이라고.”

몸을 숙여 에리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그리고 꺼질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해줄 수 없던 걸 우리 꼬마가 엄마한테 해줬네.”

“…….”

“당신. 힘들었잖아. 여태까지 그만큼 고생했으니까….”

그만큼 힘들었으니까. 행복해져야지, 이제는.

다정하게 어르는 목소리에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온갖 색채로 물들어 있던 망막이 부옇게 흐려져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말도 안 돼. 쉴 새 없이 말도 안 된다 중얼거리면서도 바쁘게 눈으로 세상을 담았다. 그림자가 아닌 진짜 세상을.

처음 알았다. 밤이 이렇게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날 수 있다는 걸.

꿈속에서 보는 게 아닌 진짜 밤은 이렇게 어두우면서도 신비로운 빛을 뿜어낸다는 걸.

눈물이 고이면 색들이 흐리멍덩하게 보인다는 것도, 눈을 깜박여 눈물을 떨궈낼 때마다 깨끗해진 유리창처럼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도.

…모든 게 처음이라.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켜보려 해도 자꾸 신음이 입술을 뚫고 새어 나왔다. 그 와중에, 시야에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백금발이 또 예뻐서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만지고 있었다.

팔을 타고 올라온 베르트발드의 커다란 손이 에리얼의 뺨과 귀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잠시 망설이던 베르트발드가 팔을 둘러 에리얼을 세게 끌어당겨 안았다.

“울지 말고. 이렇게 기쁠 때는 웃어야지.”

팔뚝에 힘을 줘 부서트릴 것처럼 세게 끌어안은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시 에리얼을 떨어트려 놓았다. 베르트발드는 목을 숙여 에리얼과 시선을 맞춘 뒤 유쾌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 내가 보입니까.”

베르트발드가 엄지로 에리얼의 젖은 눈매를 쓸어내렸다. 맑아진 시야 속에 그의 얼굴이 가득 들어차, 에리얼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입니까.”

그가 느슨하게 접은 눈으로 에리얼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마치 웃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 에리얼은 힘겹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눈매가….”

엉망이 된 얼굴로 웃고 있다니. 흠잡을 데 없는 외모인 그에게 내보이기에는 너무 창피한 몰골이었다.

그래도 에리얼은 웃을 수 있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눈매가… 깊어서. 다정한 성격 같고… 윗입술 선이 뚜렷해서 말을 잘하실 것 같고.”

“그리고?”

“눈썹이 곧고 숱이 진해서. 고집이 좀 있으시겠어요.”

말끝이 자꾸 떨려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짧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눈꺼풀을 달싹여 고여있던 눈물을 떨궈냈다. 조금 더 밝아진 시야에 그가 비쳤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가 에리얼을 바라보았다. 또렷한 콧날, 날카롭게 이어지는 얼굴선과 공들여 그린 듯한 입술. 정말 예쁜 사람이었지만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화려한 외모에 지지 않으려는 듯 범상치 않은 성격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푸른 밤 그 자체를 녹여 넣은 듯한 암청색 눈동자 속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동공에 비친 에리얼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 속에, 그저 상대만을 담았다.

세상에 오롯이 둘만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리얼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예뻐요. 너무… 예뻐요.”

속눈썹에 고이는 달빛의 반짝임도.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얼핏 드러나는 새하얀 이도.

저 눈.

눈 속에 담긴 애정과 헌신, 그리움과 아련함과 다정함이 섞인 저 눈빛도 모두.

그저 예뻐서….

예쁘기만 해서.

“꿈에서 봤을 때보다… 진짜 살아 숨 쉬는 백작님은 훨씬 더 멋지네요. 이렇게 예쁜 얼굴로… 예쁜 눈으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턱을 스쳐 올라가 부드럽게 뺨을 매만졌다.

“나를 보고 있었구나.”

에리얼은 눈물을 삼키며 그의 뺨을 감싸 자신에게로 시선을 이끌었다. 이미 자신을 투영하고 있음에도 더욱 깊이 그 눈에 스스로를 새겨넣고 싶었다.

“눈이 보인다는 건 참 편리하네요. 보기만 해도 알겠어… 백작님은 늘 이렇게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저를 보고 계셨네요.”

꿈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차분한 표정으로 웃고 있던 어머니는 난생처음 보는 감정이 잔뜩 서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감정이 감히 측정할 수 없는 하해와 같은 애정이라는 걸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은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담고 있는 저 푸른 눈동자 속에는 그보다 더 절절한 무언가가 진득하게 휘감겨 있었다. 맑고 선명한 눈인데도 감정이 뚝뚝 묻어나 눈물처럼 흐르지 않을까 염려될 만큼.

그 감정의 이름을 지금 알았다.

“저를 사랑하고 계셨네요….”

뺨을 쓸어내리는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떨리는 손과 달리 에리얼의 목소리가 매우 곧고 또렷하게 허공에 울려 퍼졌다.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에리얼을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미간을 구긴 채 웃었다.

“천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눈짓이 더 강렬하다더니. 눈만 마주쳤는데 속내를 들켜버리니 대단히 곤란하군요.”

슬쩍 눈을 내려 아래를 쳐다봤다가, 다시 눈을 올려 에리얼을 응시했다.

“군림하는 입장에서 속이 까발려지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도 없는데… 부인께서 제 속을 간파하시는 게 화나기는커녕 기쁜 걸 보면 저도 어지간히 빠진 모양입니다.”

뺨을 붙들고 있던 에리얼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아 내렸다.

여전히 눈물이 매달려 있는 눈망울이 단전이 쿡쿡 쑤실 만큼 예뻐서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 분위기를 음미하고픈 욕망이 더 컸다.

“상투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결국, 부인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는 이것뿐이라는 사실에 좌절을 느낍니다.”

“…백작님.”

“맞아요. 사랑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겁니다.”

사랑이란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감정이란 욕정과 소유, 그 둘뿐이라고 생각했다.

에리얼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 착각은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사랑이라는 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소중하고 소중하면서도 때론 파괴적으로 지배하고픈 충동, 그녀에게 물들고 싶다는 마음과 나로 덮어버리고 싶다는 이기적인 갈망.

낙차의 폭이 좁혀지지 않는 그 양가적인 감정이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는 이 느낌은 과연, 사랑이라는 말 외에 그 어떤 단어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

“낯간지러운 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나 더 덧붙이자면. 그 눈에 가장 처음 담긴 사람이 저라는 사실이 못 견딜 만큼 기쁩니다.”

담담하게 고백을 읊자 그를 직시하던 고운 터콰이즈 민트색의 눈동자가 둥글게 호선을 그리며 웃음을 자아냈다.

“…부인의 눈이.”

홀린 듯 에리얼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색을 되찾은 눈동자가 달빛을 반사하여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흐릿한 잿빛 눈동자도 예뻤지만 지금 이 눈은 그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보석 같아.”

…또 이런 상투적인 표현뿐이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역시 보석 같았다.

“내 옆에, 이렇게 예쁜 보석이 있었네요.”

자신만을 오롯이 비추는 눈 속에 낙원이 도사리고 있었다.

얼간이처럼 중얼거린 말에 보드랍게 휜 에리얼의 눈매가 더욱 예쁘게 곡선을 그렸다. 그게 너무도 사랑스러운 나머지, 베르트발드는 마음속 다짐을 내다 버리고 작은 몸뚱이를 끌어당겨 결국 입을 맞추고 말았다.

* * *

안도한 탓인지 에리얼은 그로부터 이틀간 내내 잠에 빠져 있었다.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이었다.

안락한 어둠만이 뇌리를 배회할 뿐 매일매일 에리얼에게 새로운 세상을 안겨주던 예지몽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새벽녘, 밤도 아침도 아닌 어슴푸레한 시간에 눈을 떴을 때였다.

“진짜로… 꿈이 사라진 건가.”

아쉬운 마음과 함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화려한 색채로 시각을 물들이는 현실이 아름다워 아쉬운 마음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하얀 셔츠를 입고 있는 두꺼운 가슴팍이 시야에 비쳤다. 에리얼은 멍하니 가슴을 쳐다보다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무거워….”

자신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팔에 숨이 막혔다. 팔을 밀어내며 슬쩍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곱게 눈을 내리깐 채 잠들어 있는 단정한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눈을 뜨고 있을 때에는 흰자가 설핏 보여 어딘지 서늘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잠든 베르트발드는 무척 유순하면서도 하얀 머리색 때문에 경건한 분위기를 풍겼다.

처음 보는 얼굴에 에리얼이 홀린 듯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미간이 살짝 찡그려지더니 베르트발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네.”

잠기가 서린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의 몸을 바짝 끌어당겼다.

“계속 잠만 자길래 또 어디가 아픈 거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배는 안 고프십니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에리얼의 귀 언저리를 맴돌았다. 걱정하는 기색이 다분하게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조금요. 저 얼마나 잔 거예요?”

“이틀 동안 한 번도 깨지 않고 주무시더군요. 몸이 놀랐나 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베르트발드가 호출벨을 당겨 사용인을 불렀다. 간단한 음식 두어 개와 차, 따뜻한 물을 준비하라 이른 뒤 에리얼을 일으켜 허리에 쿠션을 덧대주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베르트발드와 달리 에리얼은 방 안을 둘러보느라 정신없었다. 창밖에 비치는 손톱달, 그 주변을 둘러싼 달무리. 열린 창가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커튼과 옆에서 나붓하게 흔들리는 화병의 꽃.

모든 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물을 좇던 시선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베르트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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