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길어진 그림자 너머 다홍색과 오렌지색이 섞인 진한 노을이 세상을 곱게 물들이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수평선은 푸른색이 아닌 보라색과 오렌지색, 핑크색이 섞인 오묘한 빛으로 바다라기보다는 또 다른 세상을 가르는 길처럼 느껴졌다.
따뜻한 색, 따뜻한 세상.
그중에서 가장 따스하게 느껴지는 건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었다. 몸을 틀어 엄지손가락을 홱 붙잡아 올리자 베르트발드가 ‘싫어?’ 하며 정수리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세 번째 생일 축하해. 우리 공주님.』
귓바퀴에 흘러든 웃음소리가 밀려드는 파도 소리에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가끔은 엄마 놔두고 아빠랑 둘이서만 데이트하는 것도 좋지?』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트발드가 활짝 웃음 지었다. 늘 서늘하게 치켜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아래로 휜 모습이 너무 예뻐서, 에리얼이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마침 마음이 맞은 건지 꿈속의 에리얼 또한 손을 들어 베르트발드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뭐가 웃긴 건지 베르트발드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서 목을 울려 낮게 웃었다.
『저기. 저쪽 보이니?』
먼 곳을 가리키며 베르트발드가 에리얼과 시선을 맞췄다.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저택 동쪽에 위치한 바람개비 정원이었다.
『저쪽에 새로 토끼 우리를 만들 거야. 토끼 키우고 싶다고 했지?』
『응! 토끼 좋아!』
『저기서 토끼랑 거위랑 멍멍이도 키우고… 저기 옆에는 새로운 마사가 지어질 거야.』
『마사?』
『그래. 마사. 우리 공주님이랑 엄마랑 타고 다닐 수 있는, 착하고 귀여운 조랑말이 살 집.』
『아아! 리틀 포니!』
알아, 나도 알아. 잘난체하며 대꾸하자 베르트발드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짓궂게 웃었다.
『아는 것도 참 많네. 우리 공주님.』
검지를 들어 뺨을 쿡 찌르더니 손가락을 펴 뺨 전체를 살살 쓸어내린다. 아프지 않게 볼을 꼬집는 손길이 낯설면서도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져서….
…이건, 예지몽인데.
그냥 꿈이 아닌데. 눈앞에 투명한 막이 겹쳐져 있는 느낌, 시야가 제멋대로 휙휙 바뀌는 이 느낌.
모두 예지몽이 확실한데.
아기와 에리얼, 베르트발드까지 세 사람이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미래였다.
깨달은 순간 현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빠지직,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현실에 금이 갔다.
이윽고 현실이 조각나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떨어지는 세상의 파편 속에서 베르트발드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시야가 어그러지고 작은 속삭임이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릴리안. 엄마한테 돌아가자.』
낯선 이름이 귓바퀴를 스쳐 지나가 밀려드는 어둠 속으로 함께 빨려들어 갔다.
릴리안.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름을 따라 불러보았다.
물기가 스민 중얼거림이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에리얼의 사념 안에서 빙빙 맴돌았다.
검은 물감을 뿌린 것처럼 세상이 어둡게 덧칠되고 흐려지다가 천천히 암전되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에리얼은 조용히 무의식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마지막 빛이 사라졌다. 어둠이 무서워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의식이 꺼지기 직전. 에리얼은 어렴풋한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이런 꿈을 꿀 일이 없을 거라는 걸.
* * *
눈을 뜨자 칠흑 같은 어둠이 눈앞을 감쌌다.
정신을 차린 후 에리얼이 가장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두통이었다. 관자놀이 부근이 욱신거려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작게 신음을 흘린 순간 바로 옆에서 베르트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에리얼은 대답 대신 기진맥진하게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관자놀이 근처에 갖다 대자 부드러운 비단 천이 만져졌다. 그제야 에리얼은 눈앞을 깜깜하게 가로막고 있는 어둠의 정체가 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앞을 가려놨을까. 어디 다치지도 않았는데. 다친 데는 팔이랑 배였는데….
배….
지나간 일들이 벼락처럼 에리얼의 뇌리를 강타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몸이 무거워 마음대로 움직이지가 않았다.
가까스로 손을 들어 올려 허공에 허우적거리자 베르트발드가 손을 포개왔다. 에리얼은 맞잡은 손에 강하게 힘을 주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저, 그냥… 잠든 거죠? 그사이에 아기가 어떻게 된 건… 꿈이, 왜, 아니… 혀, 현자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괜찮아요. 다 괜찮으니까 우선 진정하고.”
정말 괜찮으니까, 연거푸 말하며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의 손등 위로 손을 포갰다.
“아기는 무사합니다. 물론 부인께서도 무사하시지요. 현자께서는 힘을 너무 많이 쓰셔서 잠시 쉬고 계십니다.”
초조한 듯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에리얼이 눈에 띄게 안도하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시 두통이 밀려와 눈매를 찡그린 채 숨을 삼켰다.
“두통은 금방 가실 거라고 했습니다. 눈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빛을 받으면 충격이 올지도 모른다더군요. 혹시 몰라서 안대를 묶어뒀습니다만.”
커다란 손이 이마 주변을 배회했다. 베르트발드는 눈 주변을 쓸어내리다가 느릿하게 손을 내려 에리얼의 상체를 일으켰다.
검은 안대를 쓴 채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는 에리얼이 그의 시야에 담겼다. 에리얼 또한 그의 시선을 느끼고 꿀꺽 침을 삼켰다.
마주 본 틈새로 묻고 싶은 말들과 궁금한 것들이 엉켜 섣불리 입을 열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늘 그랬듯 베르트발드였다.
“잠시 눈을 감아보십시오. 안대를 풀 테니까, 최대한 천천히 눈을 떠봐요.”
사르락,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갑갑하게 눈을 옥죄고 있던 감각이 사라졌다. 눈 떠봐요. 재촉하는 소리에 에리얼이 의구심을 뒤로하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안구 위로 차갑게 내려앉는 공기가 유달리 어색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아래, 더 이상 잿빛이라 부를 수 없는 화사한 동공 속으로 세상이 비치기 시작했다.
무채색 대신 낯선 색이 눈에 비쳐 움찔 눈매를 찌푸렸다. 다시 용기를 내 눈꺼풀을 완전히 들어 올렸다.
“…어….”
새파랗게 덧칠해놓은 푸르른 밤 속에 그가 홀로 앉아 있었다.
창가에 하늘거리는 하얀 레이스 커튼. 푸른 어둠을 빨아들여 노랗다기보다는 푸른 빛으로 빛나는 새하얀 백금발. 또렷한 이목구비에서 유달리 강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암청색 눈동자….
담담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각도에 따라 중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지나치게 남자다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한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슬쩍 아래로 처졌다. 눈매가 살짝 휘고, 보일 듯 말 듯 미미한 눈웃음이 그의 눈가에 서렸다.
깜박, 깜박, 여러 번 눈을 깜빡이던 에리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꿈이… 아직도 계속되는 건가? 왜 백작님이….”
“에리얼.”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의 손을 끌어당겨 제 뺨 위를 살살 쓸어내렸다.
“꿈 아니야.”
“…그럴 리가요. 지금 눈앞에….”
뚫어져라 에리얼을 응시하며 베르트발드가 한결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봐요. 이제 보이잖아.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느다란 손가락 아래로 그의 입꼬리가 위로 움직이는 감각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물론, 눈앞의 베르트발드 또한 웃고 있었다.
이렇게 만져지는 걸 보니 꿈이 아닌데.
하지만, 앞이….
색이 보여서.
시각과 촉각이 혼재되어 어느 쪽이 진짜인지 인식할 수가 없었다. 숨이 가빠왔다.
“…왜.”
온갖 의문과 해답이 뇌리를 스쳐 갔다.
이 감각은 꿈이 아닌데.
꿈이 아니라면, 정말로 눈이 보인다는 건데. 내가 눈이 보인다는 건.
아기를 대가로….
“아기를 포기한 게 아니야.”
담담한 목소리가 심리를 꿰뚫듯이 에리얼의 가슴속으로 날아와 박혔다. 내리깐 눈으로 에리얼을 응시하던 베르트발드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모그니드가 그러더군요. 제국이 마법사들의 명맥을 단숨에 끊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마력이 유전되기 때문이라고.”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베르트발드가 삭막한 표정으로 입매를 끌어당겼다.
“쉬운 겁니다. 마력을 가진 사람은 높은 확률로 마력을 가진 후손을 생산한다는 거지요. 물론 개체의 차이는 있겠지만 마법사들의 후손은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을 타고 난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렇게 명맥을 이어온 마법사들은 이제 남지 않았지만.”
“…….”
“드물게 스스로 마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그 시조가 된다는 거지요. 지금 남아 있는 그 현자들도 모그니드도, 부인께서도 그런 경우인 거고.”
“그, 말씀은.”
시선을 내려 아래를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누가 잘난 엄마 아빠 둔 꼬맹이 아니랄까 봐. 시대를 거슬러 꼬마 베리가 260년 전에 태어났다면 여섯 현자 중에 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과거에 태어났다면 꽤 대단한 마법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네?”
“뭐 마력을 대가로 바쳐서 이제는 평범한 아기가 되어버렸지만.”
에리얼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떡 벌렸다.
마력? 마력이라니?
“아기가 저처럼… 마력 체질로 태어났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모그니드도 해제술인지를 펼치고 나서야 알았다더군요.”
쓴웃음을 삼키며 베르트발드가 하루 전, 이 방에서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그 빛과 이상한 구체….
눈이 멀 것처럼 강렬한 빛이 모그니드와 에리얼을 감쌌다. 영원처럼 긴 것 같기도 하고 한순간 같기도 했던 그 오묘한 시간 속에서 베르트발드는 마법이란 게 정말 실존한다는 것을 절실히 실감했다.
빛이 사라지자 모그니드가 핼쑥해진 얼굴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어서 흘러나온 말은 그야말로 기적과 같았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요.」
헉헉대는 와중에도 말을 전하는 모그니드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힘의 대가는 이미 부인께서 지니고 계셨습니다. 더 이상 저주는… 발현되지 않을….」
그 말을 끝으로 모그니드도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베르트발드는 모그니드에게서 전모를 캐낼 수 있었다.
요는, 축복이라 불렀던 새 생명이 정말로 에리얼에게 축복을 부여하기 위해 나타난 아이였다는 것이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트발드는 부드러운 얼굴로 에리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기의 마력과 부인의 마력. 예지력… 모두 사라졌습니다. 대신 다른 걸 얻었지요. 이 눈과.”
길게 뻗은 손가락이 에리얼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작은 속삭임이 뒤를 이었다.
“꼬마 베리의 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