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139화 (139/145)

139화

문 앞에 서서 백작의 부름을 기다리던 모그니드가 거친 신음이 새어 나오는 걸 듣고 화들짝 놀라 문을 열었다. 그러곤, 신음의 출처가 백작 부인이 아닌 백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찌할 바를 몰라 문 앞에 멈춰 섰다.

쓰린 얼굴로 모그니드를 돌아본 베르트발드가 다시 에리얼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짧은 망설임 끝에, 움츠러드는 손을 억지로 펴서 다시 조심스레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다.

기다렸다는 듯 작은 진동이 손바닥을 잔잔히 울렸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어쩌지.”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야를 애써 다잡았다. 베르트발드는 미간을 좁힌 채 문가에 서 있던 모그니드를 쳐다보았다.

“살아 있어.”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가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목소리 같았다. 베르트발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배를 쳐다보았다가 재차 모그니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처한 심정으로 입술을 말아 물고 있던 모그니드가 손을 맞잡고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베르트발드는 모그니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쩌지. 여기… 살아 있는데. 지금, 손에 느껴지는데.”

“…….”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걸 어떻게… 자네라면 어떻게 할 건가?”

“…….”

“에리얼의 말을 따를 수는 없지. 그야 당연히 중요한 건… 아니, 답은 아는데. 그래도 살아 있잖아. 왜 하필 지금… 아니. 여태까지… 아니, 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데. 난, 내가.”

푸른 눈동자가 총기를 잃고 허공을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주 볼 용기가 없어 모그니드 또한 아래로 고개를 떨궜다. 그럼에도, 선택을 종용해야만 했다.

“아기인지 부인인지, 백작님께서 선택하셔야 합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재차 입을 열었다.

위로가 되리라고는 믿지 않지만, 진심 어린 한 마디를 덧붙이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셔도 존중할 겁니다. 누구도 백작님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모그니드의 말에 바닥을 투영하고 있던 암청색 동공이 혼란스러운 빛으로 탁하게 물들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며 베르트발드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잠든 건지 실신한 건지 알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멀어지고 축 늘어진 가냘픈 여체가 시야에 들어찼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손이 우유를 부어놓은 것처럼 희게 빛났다. 가느다란 목선 위에 자신이 남겨놓은 울혈 자국이 꽃처럼 작게 피어 있었다.

하얀 얼굴 위에는 미처 닦지 못했던 붉은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애처로움을 더하고 있었다.

“이렇게 마르고 연약해서는. 제 걱정이나 할 것이지….”

허탈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배회하다 먼지처럼 흩어졌다.

곧게 허리를 편 뒤, 다시 에리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심스레 손을 펴 깍지를 엮었다.

잠든 와중에도 자연스레 맞잡아오는 손이 사랑스러웠다. 손을 붙잡은 채 나머지 손을 다시 배 위에 올렸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통, 하고 배가 울렸다. 손바닥 전체에 울리는 강한 진동이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존재감을 강하게 내뿜고 있었다.

무너지려는 마음을 수습하며, 베르트발드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안녕, 아가야.”

담담하게 입을 열었지만 낯선 단어를 읊는 목소리에 희미하게 떨림이 서려 있었다.

태동이 느껴지면 매일매일 덕담을 해줄 거라 속으로 다짐했었건만.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니.

“엄마에게 와 줘서 고마워. 너는… 우리에게 축복이란다. 만약 내가 널 가졌다면 나도… 아빠도. 엄마처럼 기꺼이 목숨을 내놨을 정도로. 소중한 존재야.”

목소리가 자꾸 잠겨 들어서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단단히 굳은 입매 아래로 감정을 삭이려는 듯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그런데 있잖아. 아빠 목숨보다 소중한 게 엄마거든. 나는, 아빠는. 다른 건 다 잃어도 괜찮은데… 엄마는 안 돼.”

입 안을 씹었는지 찝찔한 피 맛이 느껴졌다. 목이 메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지막 고해를 토해냈다.

“엄마는… 안 돼. 그래서… 그러니까. 그래서 미안해. 아빠는… 미안하다.”

에리얼을 담고 있던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베르트발드는 붙잡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에리얼의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신이 있다면, 천국이 있다면. 먼저 가서 기다려주겠니. 물론 아빠는 천국에 갈 수 없겠지만 적어도, 엄마는 갈 수 있을 테니까. 아빠는 그 아래에서 평생 속죄할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두껍게 앞을 가로막고 있던 투명한 물막이 천천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어 에리얼의 손등에 뺨을 기댔다. 맞닿은 손등이 눈물로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잠긴 목구멍 안쪽으로 비릿한 눈물 내음이 느껴졌다. 속으로 삼키려 했지만 넘쳐흐르는 감정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베르트발드는 손을 붙잡고서 한참을 소리 없이 오열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모그니드가 굳은 얼굴로 시선을 외면한 채 나직이 말했다.

“나머지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모그니드가 조심스레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우두커니 앉아있던 베르트발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매를 쓸었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젖은 눈으로 에리얼을 내려다보던 베르트발드가 몸을 숙여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배를 한 번 더 쓰다듬고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씁쓸한 얼굴로 발치를 내려다보던 모그니드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에리얼 앞에 섰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눈앞의 서번트를 저주에서 구제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믿고 마음을 다잡았다.

“금방… 끝내겠습니다. 부인의 안전만 생각하세요.”

“…부탁하겠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모그니드의 귓가를 스쳤다. 돌아볼 자신이 없어 모그니드는 고개만 끄덕였다.

길게 숨을 내쉰 뒤, 모그니드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코르크를 빼 액체를 손에 쏟아부었다. 은색 펄이 반짝이는 민트색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대신 살아 있는 것처럼 둥글게 구를 이루더니 손안에서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력 전도체로 흔히 쓰였지만 지금은 구하기 힘들어진 광연수였다.

양손으로 광연수를 붙잡은 모그니드가 에리얼의 배 위에 구체를 올렸다. 점점 더 빛이 밝아지고 이내 눈부심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쯤, 광연수가 에리얼의 배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반쯤 흡수된 광연수는 더 이상 밝게 빛날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으로 방을 환하게 물들였다.

“…이건.”

눈부심을 견디지 못한 모그니드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마력과 생명력이 강할수록 광연수는 강하게 빛을 뿜어낸다. 그러나, 지금 이 빛은 도저히 두 사람분의 생명력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빛났다.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점점 더, 점점 더 밝아지기만 해서….

이를 악물었다. 이상하다고 느낄 새가 없었다. 전도체가 흡수되자마자 해제술을 시작해야 한다.

광연수가 에리얼의 몸속에 전부 흡수된 순간. 모그니드가 마력을 전부 끌어모아 에리얼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눈이 멀 것만 같은 밝은 빛이 모그니드와 에리얼을 감쌌다. 빛에 온몸이 잠식되려는 찰나, 모그니드는 깨달았다.

팔을 타고 흐르는 강대한 마력.

확장된 시야 속에 미래와 현재, 벽 너머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선택지와 가능성이 줄기처럼 뻗어나가 눈으로,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해제술 따위 시전할 필요가 없었다. 교환도 치환도 필요 없었다.

자신이 에리얼인지 모그니드인지조차 불분명한 벽 너머의 지평에서 모그니드는 왜 이렇게 빛이 강한지, 왜 광연수가 폭주하는 건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 * *

뇌리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밀려났다. 익숙한 느낌이다.

또 이 꿈인가, 생각하며 에리얼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꺼풀 안쪽에 뿌연 막이 어려 눈앞이 혼탁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가슴께까지 자라 있는 초록의 물결이었다. 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파스스 소리와 함께 몸을 간질이는 잡초들.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초록이 발에 걸려 도통 나아갈 수가 없었다.

끙끙거리다가 너무 힘들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파삭, 파사삭, 수풀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언덕이 높아서 힘들구나. 이리 와.』

다정한 말과 함께 커다란 손이 다가와 겨드랑이를 쑤욱 들어 올렸다.

관목과 수풀로 가득 차 있던 시야가 금세 넓어졌다. 숲을 둘러보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우거진 초록을 배경으로, 그립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에리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니까 힘내자.』

밤하늘을 담아놓은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눈웃음을 자아냈다. 하얀 백금발이 바람에 나부끼며 그의 이마 위로 흐트러졌다.

지그시 자신을 굽어보던 베르트발드가 웃는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쪽, 작은 소리와 함께 이마에 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길이 가파르니 꼭 끌어안고 있어. 움직이면 위험해.』

더없이 다정한 태도에 에리얼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자신으로서는 볼을 쓰다듬거나 고개를 숙이는 건 무리였다.

대신 꿈속의 에리얼이 베르트발드의 목을 끌어안고서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비비적거리며 뭐라 웅얼대자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베르트발드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수풀이 멀어지고, 확 트인 시야 속에 언덕과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비쳤다.

거센 바닷바람에도 한결같이 꿋꿋하게 서 있는 나무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그리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리우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풍경. 눈을 들어 올리자 베르트발드 또한 회한이 묻어나는 눈으로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른 눈동자 속에 하얀 글라디올러스가 물결을 이루고 있는 꽃밭이 투영되었다. 꽃들을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시선을 느꼈는지 머쓱하게 웃으며 에리얼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마음에 드니?』

장난스레 머리를 쓰다듬으며 베르트발드가 물었다. 내려다보는 눈빛 속에는 여전히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쪼그려 앉아 에리얼과 시선을 맞추더니, 글라디올러스 군락 쪽으로 손을 뻗었다.

베르트발드가 글라디올러스를 꺾어 에리얼에게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라디올러스를 쳐다보던 에리얼이 아니야, 하더니 손바닥으로 줄기를 홱 쳐냈다.

…나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기껏 꽃을 꺾어줬으면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에리얼이 있지도 않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곤란한 심상에도 아랑곳없이 베르트발드는 그래? 하더니 다시 꽃 무리 근처로 손을 뻗었다.

『그럼 이건?』

손에 들린 건 글라디올러스가 아니었다. 작고 동그란 꽃이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

은방울꽃.

베르트발드가 치맛자락 근처에서 머뭇거리는 손을 붙잡아 은방울꽃을 쥐어주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던 에리얼이 꽃과 베르트발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메슈가 힘들게 일궈놓은 꽃밭인데. 이렇게 예쁜 꽃보다 제멋대로 피어난 들꽃이 더 좋다는 거니.』

『응!』

『하여간… 엄마랑 취향이 똑같다니까.』

냉소적인 말투는 여전했지만 어조는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베르트발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난처한 웃음을 짓고서 다시 에리얼을 팔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나무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