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에리얼 혼자만이 관점이 다른 결론을 내뱉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모그니드와 베르트발드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내뱉지 못하는 상황에서 에리얼의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를 희생하면 아이가 앞이 보일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죠?”
“그건, 그건 맞지만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던 에리얼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꽃처럼 피어났다. 무구함만이 가득한 그 표정에, 모그니드가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말을 흐렸다.
“저처럼 장님이 아닌거죠?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현자님?”
에리얼은 아픈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악력으로 모그니드의 팔목을 끌어당기며 대답을 종용했다.
“그렇, 그렇습니다만….”
모그니드가 시선을 내리깔며 말문을 닫았다. 환희에 물든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에리얼과 도저히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표정을 읽지 못하는 에리얼은 그저 환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둥글게 휘어진 눈시울과 방긋거리는 입매에서 그녀의 기쁜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정말….”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에리얼이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방금 전까지 활짝 웃고 있던 게 무색하게도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손 틈 사이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깨를 떨며 한참을 훌쩍거리던 에리얼이 이불자락을 말아 코를 훔쳤다.
“사실은요. 이, 임신 소식 듣고 엄청 마음 졸였거든요. 백작님은 괜찮다고 하셨지만… 못난 엄마 때문에 아기까지 눈이 안 보이는 건 너무 가엾잖아요.”
그는 괜찮다며, 에리얼과 아이 모두가 소중하다고 말했지만 막상 아이를 품은 입장으로서 모든 근심을 떨쳐내는 건 무리였다.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는 것과 아이의 고난을 걱정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괜찮을 거라 다독이는 것뿐, 에리얼의 가슴속에는 아기에 대한 걱정이 가득 쌓여만 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 이미 생겨버린 걸 탓해서는 안 되니까… 괜찮을 거라고, 다른 데 모두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좋은 거라고만 생각했는데요.”
잔뜩 추어올린 미간 아래, 여전히 기쁨의 빛이 머물고 있는 눈매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눈가를 손으로 훔치며 에리얼이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침에…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처음으로 태동을 느꼈어요. 아직 배도 많이 안 나왔는데 갑자기 통통 쳐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손을 내려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두꺼운 붕대 아래, 작게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까도 넘어졌을 때 배 속이 막 웅웅거려서… 다쳤을까 봐 걱정했는데 괜찮다니까. 아… 그런데 눈도 보일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쁠까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에리얼이 문득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커다랗게 뜬 눈으로 베르트발드를 올려다본 에리얼이 손을 파닥거리며 가까이 오라 일렀다.
“빨리, 빨리요.”
베르트발드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재촉하는 손짓에 못 이겨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에리얼이 늘어진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 배로 이끌었다.
커다란 손이 에리얼의 손길에 이끌려 분홍빛 핏물이 은은하게 비치는 붕대 위를 가만가만 쓸었다. 감히 만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베르트발드의 손을 꾹 누르며 에리얼이 밝은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방금 엄청 세게 찼는데!”
“…그랬습니까.”
“손대니까 부끄러워하나 봐요. 귀여워라….”
히히 웃으며 에리얼이 베르트발드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태동이 있었다니. 배가 불러오는 걸 매일 지켜보면서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베르트발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배에 손을 대고 있었다.
아주 조금,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도 여전히 빈 손바닥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간사한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새로운 선택지를 찾아낸 지금은.
정말 우습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타산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스스로에게 환멸이 날 것 같았다. 착잡한 심정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새어 들어왔다.
“백작님. 신은 믿지 않지만 신이 공평하리라는 건 믿는다고 하셨잖아요.”
메마른 손이 베르트발드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잠이 오는 지 나른한 얼굴로 에리얼이 조용하게 목소리를 이어갔다.
“나… 이렇게 태어나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좋아해주는 사람도 없어서. 이대로 혼자서 쓸쓸하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혼자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에리얼이 졸린 듯 눈을 깜빡이다가 반쯤 감은 눈으로 눈앞의 붉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붉은색.
문득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자신 또한 붉은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길들여진 시간만큼 그에게 물들었을 테니까.
“백작님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백작님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에요. 좋은 남편이고… 꼬마 베리에게도 멋진 아빠가 될 거예요.”
나른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에리얼이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천천히 눈꺼풀을 덮었다.
“아기… 우리 꼬마 베리. 우리 아기는 나처럼 힘들지 않게. 행복하게만….”
들릴 듯 말 듯 작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이윽고 적막이 되었다.
내내 에리얼을 주시하던 베르트발드가 작게 벙긋거리는 입 모양에서 마지막 전언을 짚어냈다.
‘아기를 살려주세요.’
그걸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 *
혹시 또 정신을 놓았으면 어쩌나 싶어 베르트발드가 서둘러 주치의를 불렀다. 그냥 잠들었을 뿐이라는 말에 안도하던 것도 잠시뿐, 베르트발드는 모그니드를 제외한 모두를 밖으로 물린 뒤 어두운 얼굴로 시선을 떨궜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늘 그렇듯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하얗게 뜬 입술 주변으로 불그스름한 핏자국이 남아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따뜻한 물로 수건을 적셔 핏자국을 살살 닦아냈다. 손이 움직일수록 하얀 수건에 분홍빛 핏물이 들었다.
순백을 망가트린 분홍색 자국이 꼭 배 속의 아이를 연상케 했다. 핏자국을 내려다보던 베르트발드가 쓰린 얼굴로 수건을 바닥에 내던졌다.
아기를 살려달라니.
시린 침묵 너머, 날카롭게 벼린 죄책감과 자괴감이 베르트발드의 내면을 무자비하게 후벼팠다. 동시에 에리얼의 목소리가 죄책감이 스쳐 지나간 상흔 위로 짓뭉개듯이 내려앉았다.
“아기….”
먹먹한 심정으로 에리얼을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그녀의 마지막 말을 입 속에서 굴려보았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아기를, 에서 더 이상 읊어지지가 않았다.
왜 아기를 선택한 거지. 지금 와서 아기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왜. 대체 왜.
“굳이… 왜.”
자신만 생각하면 됐을 것을.
늘 이런 식이지. 바보 같은 에리얼.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대로 눈을 감아 잠든 에리얼을 시야 속에서 지웠다.
머릿속이 진창이 되어 깊이 생각하는 걸 거부하고 있었다. 모든 게 복잡했고 모든 게 싫었다.
선택, 아기, 생명, 행복….
…행복하게.
눈가에 경련이 이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차가워지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택이니 뭐니 다 잊고 지금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행복한 생각만….
그저 행복하기만 했던 시절의 그녀를.
회색도 검은색도 아닌 모호한 어둠 속에서 처음 만났을 적의 에리얼이 둥실 떠올랐다. 치렁치렁하게 기른 까만 머리카락을 미역처럼 휘감고 있던 에리얼.
「오빠 되게 겁 많다. 그렇게 겁 많은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엉망진창인 재봉선, 삐뚤어진 바느질로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에리얼.
가슴에 달린 사슴 모양 패치를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며 손등으로 연신 코를 훔치던 그 아이.
「에리얼은 마녀 같은 거 아니야.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어딘지 모자라 보이는, 그 때문에 더욱 순박해 보이던 에리얼.
기억은 미화된다지만 아쉽게도 에리얼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천사나 요정, 여신으로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에리얼은… 언제나 에리얼이었다.
제멋대로 기른 머리를 대충 올려묶고 하얀 썰매 개를 타고 다니던 그녀에게서는 그 어떤 단어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자유로움이 묻어났다.
과거를 지우기 위해 다시 눈을 떴다. 어렸을 때와는 전혀 달라진 모습. 그러나 본질적인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늘 한결같은 그녀의 모습이 짙푸른 동공을 가득 메웠다.
“…에리얼….”
에리얼. 에리얼 아이기스.
…그래. 너는.
너를 보고 있으면 그 초연함에 같이 물드는 느낌이 들었지.
남들이 중요하다 떠드는 세속적인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고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가 보였다.
욕하는 자를 웃으며 용서하고 무가치한 것들에 의미를 붙여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았다. 보잘것없는 장님 공녀 주제에 행복해지는 법을 알았다.
너를 관찰하면서 알아낸 진리는 하나였다.
행복이라는 건, 행복을 추구하는 자에게 축복처럼 쏟아지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 숨겨진 작은 것들에 행복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일이라는 걸.
물론 그런 사람은 드물지. 하지만 너는 드물게 그 재주를 실행할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행복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너 같은 사람을 옆에 두면, 나도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행복에 나도 전이될 거라고 믿었다.
갖고 싶었고, 그래서 가졌다.
곁에 묶어두었다. 너는 웃으며 내 옆에 있겠다 다짐했지만 그걸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네게서는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안 될 무언가가 사람이라는 틀에 묶여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는,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이 공존했다.
그때는, 잃을 게 없는 사람 특유의 초연함이라 생각했지. 잃을 게 없기에 허세 부리는… 아무래도 좋다는 자포자기가 허무함으로 네 주변을 떠도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아니야. 그런 게 아니었어.
스스로가 귀한 존재임을 알기에 그만큼 타인도 귀하게 여겼던 것뿐. 살아가는 모두가, 생명이 귀하다는 걸 알아서….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녀가 모든 사람에게 존대하던 것도, 쉬이 화내지 않던 이유도 모두 그에 기반한 것이었다.
배 속의 아이는 그녀에게 있어 저주를 탈출할 수 있는 행운 따위가 아니었다. 당연히 살아갈 권리가 있는 생명이었다.
축복이라고, 함께 키워나가자고 그럴 듯하게 꼬셔놨는데.
…진짜 아이를 축복이라고 생각한 건 에리얼 혼자뿐이었다.
그런데 어쩌지.
아이를 기만했다는 사실이, 미안하지도 않고 후회되지도 않아.
“…….”
바짝 힘주고 있던 눈꺼풀에 힘을 풀었다. 그녀를 투영하고 있던 시야가 천천히 어둠에 물들었다.
배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내려던 순간, 손바닥 안으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굳은 얼굴 위로 작게 실금이 갔다.
무표정하던 베르트발드의 얼굴에 괴로움이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