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곤란한 얼굴로 에리얼을 내려다보던 모그니드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을 툭툭 쳐냈다. 그리고 곧장 가슴 중앙에 한 손을 올렸다.
이윽고 두 사람이 연결된 곳으로부터 옅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타인의 몸 안에서 마력을 운용하는 건 단단한 흙 아래로 뿌리를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사람의 기운을 살피는 건 거대한 마력보다 얼마나 마력을 세밀하게 운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모그니드는 마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운용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자였다.
따스한 기운이 손을 타고 에리얼의 심장으로 흘러들어 갔다. 가슴에서 시작된 온기가 배와 어깨로 천천히 퍼져 몸 구석구석까지 닿는 데에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온기에 취해 나른한 웃음을 띠고 있는 에리얼과 달리 모그니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대고 있었다. 이윽고, 모그니드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머뭇거리며 손을 떼어냈다.
“역시… 몸이 지나치게 약해지셨습니다. 부인. 주의사항 말씀드린 거 기억나십니까.”
“주의사항이요….”
“마력 증폭시키는 약재는 절대 손대지 말라고 신신당부 드렸을 텐데요. 용소화를 지나치게 섭취하셨다고요.”
용소화.
단어를 들은 순간 에리얼의 동공이 작게 흔들렸다.
“그게… 그냥. 예쁘기도 하고….”
“용소화를요? 그냥 예뻐서 드셨다고요?”
에리얼은 대답 없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지분거렸다. 추궁해봤자 별 의미도 없을 텐데 모그니드는 굳이 힐난하는 눈초리를 에리얼에게 쏟아냈다.
베르트발드는 턱을 쓸며 모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냥 깜박 잊어버렸거나 잘 몰라서 그런 거 아니었을까. 그런 베르트발드의 예상은, 잠시 후 이어진 모그니드의 말로 인해 산산히 부셔졌다.
“알면서 드신 거 아닙니까.”
“…….”
“몸이 약해지는 대신, 힘이 강해지는 게 분명 느껴졌을 텐데… 그렇지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베르트발드가 눈을 홉떴다.
“알면서 계속 마신 거라고? 그 차를?”
…몸이 약해지는 걸 알면서도 그 차를 계속 마셨다는 건가?
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모그니드에게 눈길을 던졌지만 그 또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시 에리얼에게 시선을 돌렸다. 잿빛 눈동자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아기를 가졌단 걸 안 이후로는… 거의 안 먹었는데….”
혼곤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던 에리얼이 이내 눈꺼풀을 닫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그게. 그때는 그랬어요. 어차피 눈이 보이지 않을 거라면. 내 꿈으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감긴 눈동자 속에 깜깜한 어둠 대신 회색빛 인영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에타, 마리아, 에바, 주드… 각각의 실루엣 가운데에 노란색과 분홍색 파문이 잔잔히 일고 있었다.
“이 꿈들… 내게는 의미가 없지만. 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났고 즐거워하고.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몸이 약해지면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울컥하며 베르트발드가 외치자 에리얼이 알아요, 하며 그의 외침을 끊어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는 거. 그래도 난… 나는. 그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 광인으로 매도당한 이후부터 에리얼은 꿈에 대해서 언급하는 걸 피하고 있었다.
안 좋은 일만 알려주는 그 꿈들. 자신이 느끼기에도 마녀의 계시처럼 느껴지던 그 꿈들….
…용소화.
차를 마시면서 꿈이 더욱 선명해지는 게 느껴졌다. 꿈에서 볼 수 있는 게 더욱 다채로워졌다. 비참하고 안 좋은 일뿐만이 아닌, 조금 더 큰 미래까지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꿈이 또렷해지는구나 하고만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었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꿈의 효용성을 인정하자 에리얼은 걷잡을 수 없이 꿈에 빠져들게 되었다.
「오늘은 남편이 아닌 라흐주의 판무관으로서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에리얼. 영주민들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베르트발드는 그 말이 얼마나 큰 의미로 에리얼에게 와닿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말이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꿈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게 꿈에 기대게 되었다. 절대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꿈들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작은 오지랖은 큰 감사로 되돌아왔다. 주드는 비 오는 날 드레스가 망가지지 않아 기뻤다고 했다. 비에타는 풍랑이 이는 날 출항한다는 아버지를 말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에바는 긴 장마를 대비해 창고를 미리 수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날씨를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고 누군가는 위험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작은 사탕과 과자, 직접 뜬 옷감과 양말. 볼품없지만 따사로운 감정이 실린 선물들이 속속들이 에리얼의 품 안으로 안겨 들어왔다.
꿈 덕분에 에리얼은 더 이상 저주받은 장님이 아닌 무척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감정들.
…그다지 대단치도 작은 감사 인사들.
그러나 그게 조금씩 모여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그들의 감사하는 마음은 메말라 있던 에리얼의 자존감을 촉촉히 적셔 그녀를 지탱하는 큰 반석이 되었다.
문제가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의 칭찬과 감사에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몸이 약해지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한번 칭찬에 취해보니까 절제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내가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그게 너무 기뻐서.”
“…부인….”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만약 알았다면 진작부터 안 마셨을 텐데….”
말을 흐리며 에리얼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련한 짓이라는 걸 스스로도 뼈저리게 알고 있던 만큼 부끄러워서 차마 얼굴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모그니드는 미간을 추어올린 채 서글픈 얼굴로 에리얼을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헤어나오실 수 없으셨겠지요. 압니다.”
어떤 심정으로 하는 말인지 잘 안다.
서번트, 그녀와 같은 사람들 모두가 장애에 길들여져 자격지심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으니까.
미래를 예지한다 해도 어지간한 서번트들은 제대로 된 미래를 볼 수 없다. 불투명한 막에 가려진 무언가를 볼 뿐이었다. 그렇게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예지해봤자 미친 소리라 치부하는 게 대다수의 반응이었다.
백작 부인도 그랬을 것이다. 눈도 안 보이고, 미래를 예지해봤자 광인이라 욕먹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의 쓸모를 증명받으니 얼마나 달콤할 것인가.
오래 관찰해온 만큼 서번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모그니드로서는 도저히 바보 같은 짓을 했다며 그녀를 타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모그니드가 뜸들이듯 여러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무거운 어조로 말을 뱉었다.
“이대로는 아무리 누워 계셔도 회복될 수 없습니다. 저주를 너무 남용하셨어요.”
“그 말씀은….”
“저주가 통제 불가능한 상태까지 악화되어서… 아마 부인께서는 계속 꿈을 꾸실 테고 계속… 약해지실 겁니다.”
흐릿한 말미에 긴 한숨이 덧대어졌다.
에리얼 또한 입을 다문 채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더없이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계속 몸이 약해진다니.”
차가운 정적을 깨부순 건 베르트발드였다. 무감한 얼굴로 둘을 지켜보고 있던 베르트발드가 모그니드의 팔을 붙잡고 그를 자신 쪽으로 돌려세웠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해결 방도가 없다는 말인가?”
눈매를 험악하게 뜬 채 추궁하듯 묻자 모그니드가 눈동자만 힐끗 돌려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을 노려보던 모그니드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양손을 맞잡고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황을 타계할 방도가 없는 건 아닙니다. 부인께서 살아나실 수 있고… 눈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비장한 얼굴로 무슨 뜸을 그렇게 오래 들이나 했더니 막상 나온 대답은 맥빠질 만큼 긍정적인 말이었다. 베르트발드가 홉뜬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어처구니없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눈도 나아질 수 있다?”
“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그럼 여태 있었던 얘기는 뭐지? 지금 내 앞에서 장난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입술을 깨문 채 분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모그니드가 천천히 눈을 뜨고서 말을 이었다.
“지금 부인께서 품고 계신 매개체를 대가로 바치면, 부인께서는 저주에서 벗어나실 수 있습니다.”
“…매개체?”
의아한 어조로 베르트발드가 되묻자 모그니드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었던 탓이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공기가 방 안 가득 밀려들었다. 베르트발드가 다시 한번 무슨 소리냐 묻기 직전, 에리얼이 모그니드의 소매를 붙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품고 있는 매개체라니?”
“…….”
“아… 아기를… 아기를 대가로 내놓으라는 거예요?”
소매를 붙든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그보다 더 창백한 얼굴이 모그니드의 시야에 들어찼다.
“해제술의 대가는 마력과 생명력이라고 했지요. 마력은 대체할 수 없지만 생명력이라면….”
시선을 회피하며 모그니드가 묵묵히 말을 이었다.
“지금 부인께서는 두 명분의 생명력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를 희생하면 하나는 충분히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그런… 그런.”
“다만. 이후로 다시는, 아이를 가지실 수 없을 겁니다.”
말하기도 괴롭지만 듣는 이는 더 괴로울 문장들.
스스로도 선택지라고 제시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선택을 읊고 나서 모그니드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붉은 눈동자 속에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리얼이 비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를 응시하는 게 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모그니드는 다시 아래로 시선을 떨구며 소매를 붙잡고 있던 에리얼의 손을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베르트발드에게 눈길을 향했다.
시선을 의식한 듯, 잔뜩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베르트발드가 띄엄띄엄 말을 토해냈다.
“아기를… 대가로.”
상상도 못 한 선택지였다.
아기를 대가로 에리얼이 살아날 수 있다니. 게다가 앞이 보일 수 있다니.
어느 날, 창가로 날아온 파랑새가 비어 있는 새장 문을 열고 스스로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감히 바랄 수 없었던 큰 행운에 베르트발드가 할 말을 잃고 초조한 손길로 입매를 두드렸다.
양자택일의 선택지에서 베르트발드가 선택할 목숨은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깊이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베르트발드가 입을 열기 전, 에리얼이 재차 모그니드의 팔목을 붙들며 절박하게 외쳤다.
“아기는요?”
“예?”
“지, 지금 현자님 말씀대로라면 아기가… 배 속의 아기도. 나를 희생하면 아기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