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뚫어져라 에리얼을 쳐다보던 루스가 발칵 성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건 왜 또…!”
넘어질 때 부딪힌 건지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양쪽에서.
놀라서, 또 황당해서 루스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에리얼이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거렸다.
흐르는 코피를 손에 묻힌 채 뺨을 더듬거리자 창백한 뺨에 핏자국이 얼룩덜룩 번져갔다. 손가락이 지나친 자리가 묘하게 차가워졌다 느낀 순간, 에리얼이 뒤늦게 소매를 들어 올려 코를 훔쳤다.
“피… 여기도 피가 나나요? 왜 그러지?”
“그, 그렇게 거칠게 문지르시면 안 됩니다.”
“이상하다… 코는 안 부딪혔는데. 괜찮… 으…!”
찡한 아픔이 갑자기 들이닥쳐 에리얼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서둘러 손을 내려 아랫배를 감싸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유리 조각들이 자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에리얼은 한 손으로 배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연신 코를 훔쳤다. 축축하게 소매가 젖는 느낌도 끔찍했지만 그보다 더 에리얼을 괴롭게 만드는 건 복부의 통증이었다.
“왜 갑자기 배가… 윽…!”
속 깊은 곳에서부터 둔하게 밀려오는 통증에 에리얼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배를 쓰다듬었다. 살짝 튀어나온 배, 찢어진 드레스 너머 유리 조각이 박혀 있던 살갗의 우둘투둘한 감촉.
손끝에 스미는 감촉에 에리얼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 넘어지면… 안 됐는데. 아기가… 아기.”
뒤늦게 사태 파악이 되자 하얗던 안색이 더더욱 하얗게 질렸다.
조심해야 했는데. 어쩌지.
하얀 안색보다 더 하얗게 비어버린 뇌리에는 그저 당혹만이 남았다. 질질 흘러내리는 코피를 훔치며 에리얼이 루스를 바라보았다.
“아기… 다치지는 않았겠죠? 배는… 아프긴 한데… 괜찮겠지. 괜찮… 윽…!”
“부인. 많이 아픕니까? 지금 의원을 불렀으니까…!”
“아… 으, 하아…! 왜. 왜….”
흐린 눈동자가 비추는 건 루스가 아니었다. 에리얼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되뇌었다.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 어떻게… 왜….”
“부인. 이러지 말고 누우시는 게….”
“이런 사건을 왜. 꿈이… 왜 꿈이 안 알려준 거지? 조심하라고 알려줬어야지….”
“…꿈?”
“평소에는 쓸데없는 것만 보여주면서 왜! 윽… 왜 꼭 필요할 때는…!”
에리얼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몸을 숙인 채 열심히 코를 훔쳤다.
그러나 소매로 연신 훔쳐낸들 코피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더듬던 에리얼은 포기한 듯 손을 내리고 살포시 튀어나온 배를 어루만지는 데 집중했다.
꿈, 꿈, 꿈. 멍한 표정으로 성토하듯 꿈을 타박했다. 넋 나간 듯한 태도가 낯설어 루스는 차마 말을 붙이지 못한 채 곤란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중얼거림 속에 희미하게 신음이 섞여들었다. 아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에리얼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 배, 아파….”
손을 쥐락펴락하던 루스가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에리얼을 바라보다가 덥석, 그녀를 끌어안았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빨리 누군가 왔으면. 루스는 에리얼을 끌어안고서 하녀장이나 베르트발드, 하다못해 하녀가 와서 상황을 타개해주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상황을 구제한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부인!”
하녀들을 제치고 방에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모그니드였다. 모그니드는 흐트러진 숨을 정돈할 새도 없이 허겁지겁 다가와 에리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 현, 현자님…?”
확장된 에리얼의 동공 속에 경건하리만치 밝게 빛나는 푸른 인영이 들어찼다.
떨리는 손을 뻗어 모그니드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고개를 저어 흔들리는 시야를 좀 더 맑게 해 푸른 인영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다행이다. 현자님이야.
아기… 아기가 아픈 거면….
배 속의 아기는 의사도 못 살린다고 했는데.
이 사람, 분명 마법사라고 했지. 엄청 찾기 힘든 진짜 마법사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나도 아기도 괜찮을 거야.
일그러진 표정 대신 오묘한 환희가 에리얼의 얼굴 위로 퍼져나갔다. 에리얼은 신을 바라보는 절실한 성도의 얼굴로 모그니드에게 물었다.
“현자님. 저 괜찮은 거죠? 배… 아기 있는데. 현자님이 살려주실 수 있는 거죠?”
“아기… 아기요…?”
“왜 꿈이 이런 건 안 알려줬을까요? 안 좋은 일은 다 알려줬는데.”
“부인. 진정하시고…!”
“조금만 나쁜 일도 다 알려줬는데. 매일, 매일 매일… 매일 알려줬는데. 배가 아파요…! 괜찮겠죠?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안 알려준 걸까요? 왜 하필 오늘만….”
주의 깊게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모그니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에리얼의 팔을 붙들었다.
“꾸, 꿈을 매일 꾸셨다고요?”
“네? 네. 매일… 하루에 두 번도….”
“그럴… 주기가 그렇게 짧아졌다고요? 그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언짢은 듯한 모그니드의 목소리에 위로 치켜 올라갔던 에리얼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팔뚝을 붙잡은 손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푸른 인영 속에 새하얀 빛이 크게 파문을 이루었다.
그림자가 출렁일 정도로 크게 울리는 물결. 그게 동요라는 걸 에리얼이 모를 리가 없었다.
“현자님. 왜…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닌….”
제대로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드문드문 끊어지는 목소리가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무채색 시야가 깜박깜박,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줄줄 흐르는 코피와 별개로 목 안쪽으로 피가 꿀떡꿀떡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입술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또다시, 배가 아팠다. 배에 손을 올리려고 했으나 이내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곧 암전되었다. 들이닥치는 어둠에 쓸려가지 않도록 노력해봐도 의식은 하염없이 아래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모든 감각이 사라지려는 끝에, 누군가가 자신을 세게 부둥켜안는 게 느껴졌다.
오금을 스쳐 훌쩍 안아 드는 손길, 청량한 바람 냄새와 섞여 있는 특유의 베르가못 향기.
…익숙한 체온.
그제야 안심하고 에리얼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사람이란 지나치게 놀라면 되레 차분해지는 법이다.
에리얼이 다쳤다는 소식은 루스와 하녀들, 하녀장을 거쳐 채 5분이 되지 않아 가주의 귀에까지 전달되었다. 집무실에 있던 베르트발드는 소식을 듣자마자 감정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홀린 듯 응접실로 뛰어가 에리얼을 안아 들었다.
주치의를 부르고 응급처치를 하고 어질러진 방을 치우기까지, 모든 일이 거의 시간차 없이 이루어졌다. 또한 모든 과정에서 베르트발드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렇게 주치의가 돌아간 후, 에리얼의 방에는 백작 부처 두 사람만이 남았다.
내내 침착을 유지하고 있던 베르트발드가 표정 없는 얼굴로 잠든 에리얼을 내려다보았다.
“…요즘 어째 조용하다 싶더니만 역시. 조용할 날이 없군.”
가벼운 찰과상이었고 천만다행으로 배 속의 아이 또한 이상 없다고 했다. 그러나 주치의는 한참 동안 멈추지 않던 코피로 인한 빈혈, 그리고 산모의 심리적인 충격이 남은 과제라고 덧붙였다.
목 끝까지 올라간 슈미즈 아래, 헐벗은 몸 위로 하얀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유달리 처연한 그 모습에 베르트발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심스레 슈미즈를 아래로 내리고 발치에 밀려 있던 이불을 들어 몸을 덮어주었다. 이마와 귓불을 살살 매만지다가 살포시 튀어나온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뒤늦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밖으로 삐져나온 손을 억세게 움켜쥐고서 손끝에 입을 맞췄다. 손끝에서 묻어나는 딸기향이 어제와 같아 괜스레 안심이 되었다.
“백작님.”
익숙지 않은 목소리에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방 문 앞에서 루스와 모그니드가 베르트발드의 눈치를 살피며 서 있었다. 몸을 틀어 문가를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계 어린 눈초리로 낯선 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당신은….”
붉은 더벅머리의 남자. 아까 응접실에서 에리얼을 붙들고 있던 놈이었다.
꼬질꼬질한 행색도 이상했지만 에리얼도 루스도, 이 남자와 서로 아는 사이 같아서 더욱 의심이 갔다.
이런 남자를 에리얼이 만날 일이 있을까. 아니면 혹시 루스의 끄나풀인가. 길드의 인간이라기에는 분위기가 어째 느슨한 것 같은데….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날 선 어조로 입을 열었다.
“루스. 자네 옆의 남자는 누구지.”
루스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모그니드와 베르트발드를 연신 바라보았다. 당혹스러운 눈짓에 모그니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에 들어섰다.
사실 모그니드는 백작이 이렇게 차가운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길드를 통해 자신을 찾은 이가 얀셀 백작이라고 들었는데, 자신을 반기면 반겼지 이런 떨떠름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아니면 설마.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모그니드가 목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님. 베넥 모그니드라고 합니다.”
“아내와 무슨 관계인가.”
예상이 적중했다. 모그니드는 백작 부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 함구해왔음을 깨닫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마스터 안델루가 휘하의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바이올렛 님의 서신을 받고 올해 초에 백작 부인을 찾아뵈었습니다만….”
안델루가, 안델루가.
이름을 되뇌던 베르트발드가 미간을 구기며 모그니드를 직시했다.
현자들의 본거지에서 만났던 그 수장. 그의 이름이 안델루가였는데. 게다가 바이올렛이 직접 서신을 보냈다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던 정보들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찾고 있던 그 현자가, 자네였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베르트발드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루스와 모그니드, 잠든 에리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현자가 뜬금없이 나타난 것도 황당한데 연초에, 이미 에리얼을 만났다고?
그런데 왜 그녀는 말하지 않았던 걸까.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걸까. 이 남자는 왜 지금 나타난 거지.
모든 게 엉망이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연초라면… 설마. 나는 북부로, 자네는 남부로 온 건가.”
“예.”
“길이 엇갈렸던 거군.”
“서신을 받는 대로 최대한 빨리 움직였습니다만, 설마 백작님께서 직접 북부로 오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현자들 자체가 아이기스 공작의 은밀한 비호를 받는 집단이니만큼 여간한 사람으로서는 그들에게 접촉조차 할 수 없다.
때문에 으레 그렇듯 의뢰인을 만나기 위해 직접 걸음한 건데, 이런 식으로 엇갈릴 줄은 모그니드도 예상치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배회했다. 먼저 말문을 뗀 건 베르트발드였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이미 아내를 만났다고 하니 본론만 묻지. 이 저주. 풀 수 있는 건가 없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