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밋밋한 배에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괜스레 따뜻한 체온이 옮겨오는 것 같았다.
그래. 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그냥 순순히 받아들여야지.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만 신이 공평하다는 말만은 믿습니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작게 뇌까리던 그 말. 베르트발드가 했던 말을 천천히 입 속에서 굴려보았다.
“신은 공평하다….”
정말 그런 걸까.
부조리를 당연시 여기며 살아왔다. 스러진 자존감과 더불어 나이를 먹을수록, 파혼을 겪을수록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 따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여태까지의 불합리한 삶을 보상하듯 더없이 과분한 남자가 제 짝이 되었다. 푸른 창공 위에 빛처럼 떠올라 있던 그는 한 점 망설임 없이 자신이 머물러 있던 밑바닥으로 내려와 온갖 비난과 괄시에도 개의치 않고 예뻐하고 사랑해주었다.
그는 좋은 남편이었다. 그리고 좋은 아빠가 될 것이다.
“당신과 아이. 두 사람을 새로운 세상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겠소….”
낮은 목소리로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낮의 햇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 위로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신은 공평했다. 베르트발드를 만남으로써 바닥으로 기울어 있던 삶의 천칭이 비로소 수평이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견고히 굳어 반석을 이루고 있던 열등감이 천천히 녹아 사라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열등감이 사라진 자리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떠올라 가슴 구석구석으로 퍼져 갔다. 손을 들어 가슴 부근을 어루만진 후에야, 에리얼은 그게 잊고 있었던 자존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삶은 불합리하지 않았다. 그저 길고 긴 통과의례였을 뿐.
긴 세월 동안 박해받았던 이유는 그라는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었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가슴을 문지르던 손을 내려 다시 배를 감싸 안았다.
“아가야. 너도 그렇단다.”
엄마 아빠가 듬뿍 사랑해줄 테니까. 너는 그저 건강하게만 태어나줘.
두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은밀하게 속삭였다.
대답이 들려올 리 없었다. 에리얼은 웃으며 아무도 없는 허공 위로 네, 하고 대신 대답을 중얼거렸다.
* * *
튼튼한 아이를 낳을 거라 호언장담하던 말이 무색하게도 에리얼의 체력은 약해져만 갔다.
하루의 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고 금방 끝나리라 믿었던 입덧도 5개월에 다다른 현재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예지몽도.
사용인들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순식간에 봄이 지나고 초여름의 향기가 뭉근하게 저택을 휘감았다.
휴가를 빙자해 반년이 넘게 저택에 눌러앉아 있던 루스 또한 계절감을 느끼고 슬슬 저택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콘텔라렌 경. 짐은 이게 전부입니까.”
집사인 레오가 문 앞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을 가리키며 루스에게 물었다. 루스는 치렁치렁하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묶으며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일이라 원래 짐이 적습니다.”
“음… 이상하군요. 마님께서 돌아가실 때 드려야 한다며 뭔가 잔뜩 챙기시는 것 같았는데요.”
“아. 선물이요….”
선물을 떠올린 루스가 눈매를 찡그렸다.
금방 상해서 먹지도 못할 과일 한 보따리, 직접 떴다는 겉옷과 양말, 남부 특산품인 각종 절임과 말린 해산물들.
할머니도 아니고 뭘 그렇게 바리바리 챙긴 건지. 더군다나 냄새 때문에 빵도 제대로 못 집어먹는 여자가 말린 새우는 어떻게 집어넣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다 싸 들고 갈 수 없어 사탕 몇 개만 챙겨 짐가방에 넣었다.
사탕도 구리구리한 냄새의 그 고약한 감초 사탕뿐이라 갖고 갈까 말까 무척 고심했다. 자기가 좋아하면 다른 사람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멀쩡하게 생겨서는 취향 한번 특이한 여자였다.
…참.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할 구석이 없는 여자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빠졌는지.
왠지 얼굴을 보면 떠나기 싫어질 것 같았다. 이대로 그냥 출발할까 고민하던 중, 레오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대로 출발하실 건 아니지요? 작별 인사는 하고 가셔야지요. 안 그래도, 아까부터 계속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루스가 머쓱한 얼굴로 목덜미를 쓸었다.
그래. 떠나면 거의 만날 일 없을 텐데. 인사는 하고 가야지.
“금방 인사드리고 돌아오겠습니다.”
집사에게 잠시 기다려달라 이른 뒤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에리얼이 루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반가운 표정을 떠올렸다.
“루스. 기다리고 있었어요. 곧 떠난다면서요?”
일어나려는 에리얼을 만류한 뒤 루스가 반대편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여름 날씨에도 에리얼은 긴팔 드레스 차림에 얇은 숄을 걸치고 있었다. 빼빼 마른 몸에 보일 듯 말 듯 살짝 드러난 배가 가녀린 모습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었다.
원래 아기를 가지면 다 이렇게 마르고 허약해지는 걸까. 씁쓸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며 루스가 무겁게 말문을 뗐다.
“길드장께서 올라오라고 닦달하시니 별수 있겠습니까. 뭐… 너무 길게 있었죠.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아이, 무슨. 신세는 내가 졌죠. 그동안 알게 모르게 곁에서 수발드느라 고생했어요.”
에리얼이 길게 손을 뻗어 루스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수도에 가면 꼭 다시 만나요.’ 해맑은 목소리에 루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미련도 있고 별생각 없이 붙어 있고 싶어서 그냥 곁에 있었던 건데. 잘 먹고 잘 쉬며 마냥 놀기만 했는데 이렇게 인사받으니 양심이 따끔거렸다.
고작 반년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군.
루스는 아쉬운 기분으로 저택에서 있었던 기억들을 반추했다.
최악의 첫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 함께 나누었던 비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것, 좋아한다는 마음을 자각한 것.
또 뭐가 있더라. 그… 마법사인지 현자인지 하는 남자가 찾아온 일도 있었지.
“…음.”
그러고 보니 그 현자.
분명 반년 후쯤에 다시 찾아온다고 했었는데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현자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그와 나누었던 대화도 함께 떠올랐다. 떠나기 전, 뭔가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었지. 혹시 백작 부인의 몸이 약해진 것도 그것과 관계있는 걸까.
뭐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겠지만 떠나는 와중에 재차 주의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루스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에리얼에게 물었다.
“부인. 혹시 그… 현자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조심하라고 했던 것들. 기억납니까?”
“글쎄요. 가물가물한데….”
“왜, 있어요. 몸을 너무 차게 하지 말고, 인력… 무슨. 사람이 너무 많은 곳에 가지 말고. 마력 있는 사람하고 만나지 말고.”
“으음…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안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흐음. 이거 말고도 조심하라는 거 되게 많았는데. 뭐 마도구와 접하면 안 된다고 하고 마력 증폭시키는 것도 절대 먹지 말라고 하고. 무슨, 뭐라고 줄줄 알려줬는데. 뭐였더라….”
“뭘까요…?”
“…음. 기억날 듯 말 듯한데….”
루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현자님 이야기는 왜 꺼낸 거지. 생각과 함께 멀뚱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에리얼이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스, 루스! 가기 전에 잼 하나 챙겨줄게요. 어제 비에타랑 니키랑 같이 딸기를 땄거든요. 어제 막 만든 거라서 오래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예? 으, 잼이요? 웬 또 잼을.”
“엄청 맛있어요! 내가 직접 만든 거예요. 잠깐 기다려봐요.”
지팡이를 짚은 채 에리얼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어차피 들고 갈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주려는지. 루스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쉰 뒤 현자의 말을 떠올리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어쨌든 모그니드의 말을 종합하자면 결국 마력에 대해서 조심하라는 건데.
“마력 증폭이라….”
청새매의 단장으로서 수없이 많은 의뢰를 접했다. 물론, 마법사를 찾고 싶다는 의뢰도 수두룩하게 받아왔다.
평범한 사람들은 불가능한 영역을 맞닥뜨리면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진 자들은 자신의 직위와 돈을 이용해 기적에 매달리려 한다. 그 기적의 수단으로 마법이 거론되는 건 당연한 수순에 가까웠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입장상 철저히 자신들의 본거지를 은폐해왔다. 정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루스 또한 마법사들이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였으니.
하지만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마법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진짜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마력을 증폭시키는 약초를 섭취해 유사 마법 비스름한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켰다.
진짜와 가짜, 그리고 마법을 찾는 의뢰인들. 정보 시장의 주축에 선 루스로서는 본의 아니게 마법에 관한 지식이 해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에 대해 찾아보면서 마력을 증강시키는 약초들에 관한 것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현자가 말한 약초도 거기에 있었는데.
“무슨… 푸름초? 였나.”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만… 만리화? 아니다. 만, 만….
아. 그래. 만용화.
여태 잊고 있던 사실이 무색할만치 금세 이름이 떠올랐다. 푸름초와 만용화,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었는데.
마지막 하나. 들은 순간,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던 단어였다.
뭐였더라.
…분명 어디선가 들어봤던 단어였는데. 그래서 위화감이 들었던 거고.
뭐였더라….
“루스. 여기 잼이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탁탁, 지팡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에리얼이 큼직한 유리병을 한 손에 든 채 루스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왜일까. 여태껏 떠오르지 않았던 마지막 약초의 이름이 에리얼의 얼굴을 보자마자 둥실 뇌리에 떠올랐다.
“용소화.”
…그래. 그 꽃 차.
절대 먹지 말라고 했던 약초 중에 그 꽃 차가 있었는데.
깨달은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용소화. 먹지 말라고 강조한 이유가 있을 텐데. 먹으면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건가?
문제, 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잠식하려던 순간이었다. 에리얼에게 고정된 루스의 새빨간 동공 속으로 발이 뒤엉켜 주춤거리는 에리얼의 모습이 비쳤다.
“어…!”
찰나의 순간이었다.
뛰지 말라고 했었어야 했는데. 몸이 비틀거린다 느껴진 순간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병이 천천히 바닥으로 낙하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병이 깨졌다.
놀란 듯 커다랗게 뜬 눈, 그 얼굴이 몸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매우 느린 속도로 시야에 담겼다.
온갖 생각과 사념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루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부르짖는 것뿐이었다.
“부인!!”
깨진 유리병 위로 얄팍한 몸이 풀썩,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