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연주를 멈춘 베르트발드가 지그시 에리얼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침묵 사이로 내려앉은 목소리는 고저 없이 평탄하기만 했다. 묻는 듯한 시선을 되돌리자 베르트발드가 짧게 웃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미숙한 존재입니다. 알아서 젖을 물고 반나절 후에 스스로 일어나는 다른 동물과 다르게, 사람은 보살피고 가르쳐야만 제 구실을 하지 않습니까.”
다소 시니컬한 어조로 내뱉으며 베르트발드가 검지손가락으로 매끈한 건반을 쓸어내렸다.
“완벽을 갈망하는 기원에는 다다를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이 서려 있기에 그런 게 아닐까요. 사람이 무리 지어 사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완벽하지 않아서… 자신의 불완전성을 보완하려고 사회를 이룹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가문의 문장을 알고 계십니까.”
갑자기 튄 화제에 에리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네. 천칭을 든 세이렌이요.”
착한 학생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에리얼을 내려다보며 베르트발드가 살풋 미소를 떠올렸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만 신이 공평하다는 말만은 믿습니다.”
베르트발드가 양손을 들어 허공에 길게 선을 그었다.
“그 말을 적용했을 때, 사람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에리얼과 나를 천칭에 올려둔다면 아마 천칭은 완벽한 수평을 이룰 겁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눈이….”
“부인께서는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직감이 뛰어나시지 않습니까. 또 너그러운 마음씨와 남다른 포용력도 지니고 계십니다.”
“…….”
“반면 저는 허울이 멀쩡하고 머리가 좋은 대신 타인의 감정 변화에 둔하고 성격도 괴팍하지요. 편식도 심한 편이고.”
편식이라는 단어에 에리얼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보는 웃는 얼굴이 기꺼워 베르트발드가 살며시 에리얼의 뺨을 쓸었다.
“만약 우리 아이가 눈이 안 보인다면.”
턱선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천천히 눈가로 올라와 눈매를 쓸어내렸다. 베르트발드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하염없이 에리얼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부분이 뛰어나겠지요. 당신과 나를 닮았을 테니 우리의 장점을 타고 날 겁니다. 내 똑똑한 머리에 더해 당신의 외모와 상냥함까지… 그렇게 잘난 인간으로 태어날 텐데, 거기에 눈까지 보이면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불공평하다 하겠습니까.”
“…….”
“부족한 부분은 우리가 있으니까. 신이 곁에 있을 수 없으니 부모를 대신 보냈다던가요. 그럼, 우리가 대신 눈이 되어주면 그뿐이지 않겠습니까.”
붉은 인영을 바라보는 잿빛 눈동자에 투명한 막이 어렸다. 그대로 멈춰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가만히 앞을 바라보던 에리얼이 천천히 미간을 찡그렸다.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눈가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먼저 다가와 눈물을 닦아냈다. 애틋한 눈으로 에리얼을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싱긋 웃으며 속삭였다.
“축하해요, 에리얼. 정말로 꼬마 베리의 엄마가 되었네요.”
“백작님….”
“우리 아기. 미워하지 말고 축복이라고 생각합시다. 당신과 내 아이인데…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니까.”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에리얼이 일그러진 얼굴로 울음을 삼켰다. 뺨을 만지작거리던 베르트발드가 실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아까, 우는 것보다 화내는 게 낫다는 말 취소하겠습니다. 당신 정말….”
뒷목이 당겨진다 느낀 순간, 베르트발드가 입술을 겹쳐왔다.
갈구하듯 입술을 탐하던 베르트발드가 아랫입술을 쪽 깨물어 당긴 채로 작게 웃었다. 우는 얼굴도 이렇게 예뻐서 어쩌면 좋아. 입 속으로 밀려든 말이 젖은 소리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 정말… 진심으로. 당신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의 절정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는데.”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서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의 상체를 세게 끌어당겼다. 헐떡이는 몸을 빈틈없이 끌어안고서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당신이 내 낙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볼을 비비적거리던 베르트발드가 입술과 콧등, 눈가에 이르기까지 얼굴 전체에 쪼는 듯한 입맞춤을 쏟아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샅샅이 핥고서 다시 다정하게 볼을 비볐다.
하얀 금발이 에리얼의 눈가를 간질이고, 그와 같은 색의 속눈썹이 발갛게 상기된 뺨을 스쳐 지나갔다. 선연한 감각에 에리얼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낙원의 인도자. 꼬마 베리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수식어가 있을까요.”
맹세코 당신과 아이, 두 사람을 새로운 세상의 주인으로 만들어줄 테니.
기분 좋은 듯 아리아의 한 구절을 작게 흥얼거린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의 허리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여전히 울상으로 있는 에리얼의 코를 살짝 꼬집고 나서 활짝 웃었다. 누가 봤다면 정말 베르트발드가 맞느냐 놀랄 만큼 무구한 미소였다.
“에리얼.”
“…네, 백작님.”
“아프지 말고.”
“…네.”
“식사 거르지 말고.”
“…네.”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곧바로 나 불러요. 알겠습니까.”
“네….”
허리를 붙든 손에 힘을 주어 허벅지 위에 에리얼을 앉혔다. 힘없이 늘어진 그녀의 팔을 자신의 옆구리에 끼운 뒤, 베르트발드가 좀 전보다 더 강하게 에리얼을 껴안았다.
온몸이 옥죄이는 감각이 갑갑하다기보다는 든든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에리얼은 내내 억누르고 있던 울음을 토해냈다.
“미… 아니, 고마, 백작님, 고마워요….”
…이제 더 이상 미안하다고 하지 말자.
미안한 게 아니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이 사람은 나를 받아들여 줄 테니까.
계속 눈이 보이지 않아도, 나 같은 아이를 낳게 되더라도.
내가 나로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도, 우리 아기도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해줄 테니까.
서러운 마음과 안도되는 마음이 서로 부딪혀 수용하는 마음으로 수렴되었다. 흐느낌 너머로 울지 말아요, 그의 중얼거림이 새어 들어왔다.
가슴 안쪽으로부터 따스한 무언가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리자 코르셋 안쪽으로 옷감 뭉치가 만져졌다.
노란 아기 신발.
죄책감으로 여겨졌던 부산물이 다시 희망의 상징이 되어 가슴을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내내 품고 있던 아기 신발이 이제 주인을 만나겠구나 하는 생각에, 에리얼은 울면서도 새삼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 * *
임신 소식에 시끄러워질 거란 우려와 달리 저택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축하받아야 할 백작 부인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빵 두 접시는 기본으로 해치우던 호쾌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에리얼은 입덧이 시작되자마자 음식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했다. 원래도 마른 몸이 삭풍에 이는 나뭇가지마냥 삐쩍 말라서 달랑거리는 모습에 에바와 비에타의 입이 바싹 말라갔다.
“마님. 입덧이 아직도 심하신가 봐요.”
에바가 안절부절못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쟁반을 쳐다보았다. 하얀 자기 그릇 위에 에리얼이 좋아하는 망고와 멜론이 거의 손대지 않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먹어보려고 했는데 왠지 거북해서. 못 먹겠어요.”
“아이고… 계속 이러시면 곤란한데. 오늘 크래커 두 조각 드신 게 전부인걸요. 드시고 싶으신 거 없으세요? 어지간한 계절 식재료는 다 구비해놨으니까 바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창가에 기대 쿠션을 조몰락거리던 에리얼이 에바의 말에 방긋 웃었다.
“웃기다. 방금 전에 백작님도 똑같은 말씀 하고 가셨거든요.”
“어머, 뭐라고 하셨는데요?”
“에바랑 똑같이 ‘드시고 싶으신 건 없습니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는 다 구비해놨으니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라고요.”
에리얼이 턱을 치켜든 채 내리뜬 눈으로 테이블을 쳐다보며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제법 그럴듯하게 흉내 내는 모습에 에바가 깔깔대며 좋아했다.
신이 난 에리얼이 다리를 꼬고 오만한 표정을 떠올린 채 ‘남편 옆에 두고 침대 밑에서 자는 기분이 썩 유쾌하신가 봅니다.’, ‘손톱 뜯는 모습이 대단히 아름다우십니다.’ 따위의 말을 흉내 냈다.
비꼬는 말을 눈치채지 못한 채 재미있다는 듯 따라 하는 마님이 우스워 에바가 입가를 가리고 한참 동안 웃어댔다.
“빨리 입덧이 끝나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마님께서 식사를 거르시니까 가주님께서도 요즘 식사량이 엄청 줄으셨거든요.”
웃어서 아픈지 늑골 주변을 어루만지며 에바가 안타깝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에리얼이 꼬고 있던 다리를 다소곳이 모으며 동그랗게 눈을 키웠다.
“그래요? 요즘 식사 잘 안 하세요?”
“네. 조금 드시는가 싶다가도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매일 같이 식사하시다가 혼자 드시려니 외로우신 건지….”
씁쓸한 얼굴로 푹 한숨을 내쉬던 에바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매를 실룩거리며 옅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뭐… 웃는 일도 많아지시고. 밖에서 아빠 된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시나 보더라고요. 매사 시큰둥하던 가주님이 어쩜 그렇게 달라지셨는지….”
언월처럼 둥글게 휜 눈매 속에 아련함이 머물러 아롱거렸다.
싫어, 됐어, 치워 따위의 귀엽지 않은 말만 내뱉던 우리 도련님이 어느새 이런 팔불출 남편이 되셔서는.
건방진 도련님의 추억을 곱씹던 에바가 서둘러 쟁반으로 손을 뻗으며 흐트러진 감정을 수습했다.
“아휴, 나이 먹으니 눈물만 많아져서 큰일이네요. 차 준비해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달그락달그락, 은 쟁반과 식기가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달칵, 문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에바의 궤적을 눈으로 좇던 에리얼이 회색빛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달콤한 여운으로 귓가에 맴돌았다.
“백작님이… 아빠가 된다고 자랑을….”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치켜올라 갔다. 에리얼은 창가 위로 다리를 쭉 뻗고서 살며시 배를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