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아빠, 아빠라.
입 안에서 가만히 단어를 굴리던 베르트발드가 헛웃음을 흘리며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미쳤군.”
미간을 와락 찡그린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현기증이 밀려 들어와 저도 모르게 창가에 허리를 기댔다.
뇌리를 휘감고 있던 우울한 상념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은 건 규정할 수 없는 환희뿐이었다.
…세상에. 아빠라니.
황량한 사막 속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게 이런 느낌일까. 아니, 시장 바닥에서 우연히 신을 마주치는 게 더 비슷한 기분일지도.
꽉 쥔 주먹을 들어 올려 입가를 툭툭 두드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행운을 거머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 이런 고결한 감정을 감히 단어로 표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작님….”
꺼질 듯 작게 들려온 목소리에 베르트발드가 퍼뜩 이성을 되찾았다.
언제부터 깨 있던 건지 에리얼이 모로 누워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지쳐 보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까 고민하던 베르트발드가 몸은 괜찮냐 물어보려던 순간, 에리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진짜… 정말로 아기가 생긴 거예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말을 잇는 어조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베르트발드는 떨리는 눈가를 손으로 누르며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듣고 있었던 걸까.
그런데 반응이 왜 저러지. 먼저 나서서 축하한다고 호들갑을 떨어야 하나.
고민이 무색하게도 에리얼은 무척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랬구나. 어쩐지 계속 잠이 쏟아지더라니… 그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부인. 몸은 좀….”
“괜찮아요. 잠이 부족해서 그랬나 봐요.”
비척대며 몸을 일으킨 에리얼이 앞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헤죽 웃었다.
“백작님. 비에타에게 물 좀 갖다 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 그리고… 조금 더 자고 싶은데요….”
“아, 그럼 제가 옆에서 잠들 때까지.”
“백작님은 일하셔야죠. 전 괜찮으니까 이제 가보세요.”
평소처럼 다정하게 말하고 있지만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대체 왜 저렇게 담담한 건지 의아해하던 찰나 에리얼이 재차 나가라며 문을 가리켰다.
단호한 몸짓에 베르트발드는 반박할 새도 없이 방 밖으로 쫓겨났다. 그렇게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가만히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있던 에리얼이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아기가….”
방금 전까지 차분하던 음성은 어디 가고 동요에 젖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던 에리얼이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꽉 감아버렸다.
“설마 했는데.”
정말 설마 했는데.
이렇게 쉽게 생길 줄이야. 어떻게… 대체 어떻게.
수습되지 못한 감정을 안고서 다시 털썩 몸을 누였다. 종아리를 끌어안아 최대한 작게 몸을 웅크렸다.
따뜻한 날씨임에도 이유 모를 한기가 느껴져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음에도 답답하기는커녕 더 추워지기만 했다.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는데.
저주고 뭐고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데 덜컥 아기가 생겨버렸다.
다 알고 있었는데. 조심했어야 했는데.
왜 하필, 왜.
대체 왜!
“아… 어떻게 해. 어떻게 하면… 하아. 이 바보 같은 계집애…!”
손가락을 굽혀 무릎을 박박 긁었다. 잿빛투성이의 시야 속으로 뿌옇게 막이 서리는 게 느껴졌다. 우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라는 생각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 우습기도 하지.
장님 공녀가 저와 똑같은 장님 아기를 낳다니.
어떻게 이런 웃음거리가 다 있을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웃긴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목 안쪽으로 익숙한 울렁임이 울컥 솟아올랐다. 울지 않기 위해 하염없이 입술을 씹고, 또 씹었다.
하지만 아무리 입술을 깨문들 기분이 나아질 리 없었다. 이윽고, 입술을 비집고 신음 섞인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대로 사라져버렸으면….”
이불 속에 갇힌 채, 에리얼은 절망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 * *
파슬리를 뿌린 새콤한 토마토 수프, 계란과 크림만 넣은 심플한 오믈렛, 손에 닿으면 파삭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라임 파이.
입덧에 좋다는 요리만 모아놨지만 쟁반을 내려다보는 에리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한참 동안 쟁반을 노려보던 에리얼은 맥빠진 한숨과 함께 쟁반을 시야 밖으로 치워버렸다.
“어쩌면 좋지….”
임신 소식을 들은 이후로 이틀이 지났다.
원체 긍정적인 성격의 에리얼이었으니만큼 부정하고, 분노하다 현실에 타협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만 하루면 충분했다. 그러나 우울감에 빠지는 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하고 좋게 넘기고 싶었는데 자꾸만 슬픈 기억이 떠올랐다. 태어날 아이도 눈이 안 보여서 자신처럼 박해받는다면….
생각을 끊으려 눈을 감았다. 그러나 우습게도, 괴로운 기억들이 더욱 선명한 색채로 떠올라 에리얼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 다가오지 마!」
「앞이 안 보이시니 가르친다 한들 제대로 수행하실 수 있으실지 원….」
「아이기스 공작도 퇴물이 됐군. 그렇게 질 떨어지는 여자를 공작 부인으로 앉힐 때부터 알아봤는데… 허 참, 자식이랍시고 저런 아이를 낳아서는….」
「너 같은 거, 저주받았다고 했을 때부터 멀리했어야 했는데…!」
「네 어머니가 대체 언제까지 네 뒤치다꺼리를 해야겠느냐!」
잊혔다 믿었던, 마음을 헤집어놓았던 가시들이 뾰족하게 날을 세워 가슴을 후벼팠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진 말들이 한데 모여 생채기를 냈다. 따스한 말을 위안 삼아 상처를 덮으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상처가 너무 많았다.
딱지가 아물기도 전에 상처 난 곳에 다시 피가 흘렀다. 장님, 저주, 마녀, 병신. 그러나 사람 일이 늘 그렇듯 영영 익숙해지지 않을 거라 믿어왔던 단어조차 금세 익숙해졌다.
그렇게 마음이 무뎌졌다. 그렇게 매사에 덤덤해졌다.
…그러나 상처 받은 과거가 흐려지는 일은 없었다.
“나도 이렇게 견디기 힘들었는데… 아기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미 닳을 대로 닳은 손톱에서 피 맛이 났다.
그렇게 멍하니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때였다.
“응?”
창가로 다가가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역시,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피아노…?”
맑은 선율이 귓가를 맴돌다 부드럽게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분명 어디서 들어본 곡인데 편곡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택에 피아노 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리얼이 홀린 듯 선율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커지는 피아노 음율에 탁탁거리는 지팡이 소리가 섞여 묘한 리듬을 자아냈다.
지팡이 소리가 멈춘 곳은 아기 방 앞이었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피아노 앞에 붉은 인영이 앉아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피아노 치던 사람이 백작님이셨어요?”
놀란 어조로 묻자 건반을 바라보던 붉은 인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리얼을 마주 보았다.
얼핏, 그가 웃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예상대로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피아노 선율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역시 부인 꼬드기는 데에는 악기가 제일 효율적인가 봅니다.”
짓궂게 웃으며 베르트발드가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우아한 음색은 어디로 가고, 쿵쿵 내리치듯 제멋대로 연주를 이어가는 통에 엉망진창이 된 선율이 에리얼의 고막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에리얼이 왈칵 화를 내며 베르트발드의 손을 붙들었다.
“안 돼! 그렇게 치면 안 돼요! 건반이 상해요!”
“하하하.”
“으! 진짜라니까요! 너무 세게 두드리면 아무리 튼튼한 피아노라도 망가진단 말이에요…!”
탁, 손을 밀어낸 에리얼이 베르트발드 옆에 앉아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가슴을 펴고 제대로 된 연주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발랄한 음율의 스케르초가 빠른 템포로 이어졌다. 얇은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베르트발드가 작게 감탄을 토해냈다.
“피아노 천재라는 말씀이 허언이 아니었군요.”
웃는 듯 마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에리얼을 굽어보던 베르트발드가 허리를 조금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에리얼이 그를 돌아보던 때였다.
“우는 것보다 차라리 화를 내요. 그게 더 나으니까.”
본질을 건드리는 음성에 에리얼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건반을 배회하던 손가락도 움직임을 멈췄다.
관절이 불거진 커다란 손가락이 건반 위에 놓여 있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손에 새기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느린 속도로 올라와 손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에리얼의 손을 아래로 내린 채, 베르트발드가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다시 피아노 소리가 방을 채웠다. 가벼운 전조로 시작된 곡은 낭만적인 도입부로 이어져 귓속을 황홀한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이 곡. 뭔지 압니까.”
귀족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유명한 오페라의 아리아였다.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아요. 엄청 유명한 노래잖아요. ‘명예로운 찬탈자’의 아리아.”
“내용은 아십니까.”
“그야… 춘희였던 아드리아나가 귀족의 아이를 임신한 걸 알게 돼서….”
말끝을 흐리며, 에리얼이 고개를 돌려 멍한 얼굴로 베르트발드를 쳐다보았다.
길거리의 잡역부와 사랑에 빠져 달콤한 나날을 보내던 아드리아나.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의 연인이 반역자로 쫓기고 있던 2왕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드리아나는 자신도 아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는 절망에 빠져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려 한다. 그 순간, 그의 연인이었던 2왕자가 나타나 아드리아나를 붙잡고 사랑한다 고백한다.
오페라 자체가 워낙 유명하기도 했지만 사랑 고백이 어찌나 절절하던지 에리얼 또한 여러 번 따라 불러본 적 있는 노래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노래를 이런 상황에서 듣게 될 줄은.
“당신이 잉태한 건 죄악의 씨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을 위한 낙원의 인도자리니.”
연주를 이어가던 베르트발드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가사를 읊기 시작했다.
“부디 끈을 놓지 마오. 맹세코 당신과 아이, 두 사람을 새로운 세상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겠소.”
건반을 누르던 손길이 점차 느려졌다. 나직하게 이어지던 목소리도 끝을 맺었다.
익숙한 가사였는데. 아무 의미 없는 사랑 노래였을 뿐인데.
복잡한 상황과 맞물려 미심쩍은 의미로 에리얼의 심상을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