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초록 가시덤불에 둘러싸여 있는 저택의 마구간은 짚으로 대충 만들어진 여느 남부의 마구간들과 다르게 백참나무로 만들어져 튼튼하고도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했다. 여물을 고르고 있던 마구간지기가 백작 부인의 방문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손을 털었다.
“마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루스는 에리얼을 벤치에 앉힌 뒤, 답지 않게 싹싹한 어조로 말문을 뗐다.
“동물을 좋아하신다길래 겸사겸사 모시고 왔습니다. 좀 순한 녀석 없습니까?”
“낯을 안 가리는 녀석이 한 마리 있긴 한데… 은근히 고집이 있어서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고삐는 제가 잡고 있을 테니 괜찮습니다. 가급적 초보자 경험이 많은 녀석이면 좋을 것 같은데.”
루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 그 녀석이 좋겠네요.’ 하면서 마구간지기를 끌고 마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아주 새카맣게 광택이 도는 흑마 한 마리를 끌고 에리얼 앞에 다가왔다.
“부인. 말 타보셨습니까?”
의기양양하게 말을 끌고 온 게 무색하게도 에리얼은 벤치에 머리를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인, 부인.”
“…어. 어어아.”
“아니, 그새 또 잠이 들면 어떻게 합니까.”
입가에 넘실거리던 침을 츄릅 삼키며 에리얼이 허겁지겁 자세를 바로 잡았다.
“날이 따뜻해서 졸린가 봐요. 지금 잠… 어머, 어머나. 눈앞에 있는 이 아이는 뭘까요.”
“말입니다.”
“말. 말? 어, 진짜 말이요?”
“예. 백작님의 애마라더군요. 엘이라는 녀석입니다.”
엘, 엘. 입 속으로 이름을 되뇌인 에리얼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 말이 고개를 내려 에리얼의 손끝을 툭툭 건드렸다.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던 에리얼이 난처한 얼굴로 말을 올려다보았다. 축축한 코의 감촉이 낯설어 손을 빼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에리얼은 곧 용기 내어 말의 콧등 위에 손을 올렸다.
“안녕, 엘.”
부드럽고 탄탄한 살결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느낌이었다. 가만가만 콧등과 얼굴을 매만지던 에리얼이 문득 탄성을 내지르며 반가운 표정을 떠올렸다.
콧등 위, 십자 모양의 특이한 상흔. 이 상처는 분명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아, 엘! 이 애 누군지 알아요.”
“어라. 여기 오신 적 있으십니까? 마구간지기는 처음 뵙는다고 했는데.”
“아니, 아니요. 처음 온 건 맞는데.”
에리얼이 천천히 벤치에 상체를 기댄 채 허공 위로 나른한 눈빛을 쏟아냈다. 눈앞을 가리는 거대한 그림자는 분명, 꿈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온몸이 칠흑처럼 새까만데, 발굽 쪽만 크림을 묻힌 것처럼 새하얀 아이. 맞나요?”
“어떻게… 네. 맞습니다.”
“아아… 역시. 얼마 전에 그 산에서 본 아이가 너였구나, 엘.”
며칠 전, 꿈속에서 새카만 말이 마사를 탈출해 해안가를 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반쯤 감아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말을 쳐다보던 에리얼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저기… 절벽 쪽으로 뛰어가다가. 관절이 다칠 뻔한 걸 바이온이 붙잡아서… 그걸 봤어요. 말은… 관절을 다치면 큰일 난다고… 절대 풀어두면 안 돼요. 꼭… 마사 문을 잠가둬야….”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지고, 띄엄띄엄 이어지던 목소리가 이내 완전히 끊겨 종적을 감췄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에리얼이 벤치에 목을 기댄 채 다시 졸기 시작했다.
“하이고. 또 주무시는구만, 또.”
루스는 깨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마사로 돌려보냈다.
구름이 걷히고 낮게 떠오른 해가 나뭇잎과 잔가지에 부딪혀 피상적인 그림자를 자아냈다. 그늘진 벤치 위에 떠도는 작은 숨소리가 잔잔한 파도 소리와 맞물려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를 구성했다.
목을 한껏 뒤로 늘어뜨린 채 잠들어 있던 에리얼이 바람이 불자 부르르 상체를 떨며 괴로운 듯 눈썹을 찡그렸다. 벤치 끄트머리에 앉아 그를 지켜보던 루스가 겉옷을 벗어 살며시 에리얼의 몸을 덮어주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마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싶어 다시 쳐다봐도 확실히 더 마르고 비실비실해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찡그려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루스가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르트발드가 주치의 어쩌고 했을 때에는 쓸데없는 호들갑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그 말이 맞다고 한마디 거들 걸 그랬나 싶었다. 그렇게 혀를 차며 다시 에리얼을 바라본 순간.
“어…!”
새빨간 코피가 에리얼의 입술을 거쳐 턱 밑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니, 잠깐 눈 뗀 사이에 웬… 부인, 부인!”
겉옷을 끌어 올려 코를 틀어막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잘 오는지 에리얼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억지로 흔들어 깨우자 에리얼이 가물가물한 눈으로 루스를 올려다보았다.
“루스…? 왜요?”
“부인, 코피 납니다! 잠깐 일어나 보세요,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서…!”
“코피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에리얼이 소매로 코밑을 슥슥 문지르며 멍하니 루스를 쳐다보았다. 냉찜질하러 가자고 연거푸 재촉하자 에리얼이 아주 느린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팽이보다 느린 속도에 천불이 난 루스가 그냥 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갈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에리얼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부인!”
넘어질 뻔한 몸을 반사적으로 붙잡아 올렸다. 가물거리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대로 상체가 추욱 늘어졌다.
“부인! 부, 부인! 정신 차리십시오!”
부둥켜안고 이름을 외쳐도 에리얼은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게 멈춘 자리에 줄줄 흐르는 코피만이 루스의 팔뚝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니, 왜…! 아니, 아니…!”
뺨을 툭툭 건드려봐도 핏자국만 더 넓어질 뿐이었다. 몸을 흔들자 삐져나온 머리카락과 함께 상체가 맥없이 흔들렸다. 처연한 정도로 얄팍한 몸, 멈출 기미가 없는 코피와 그새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해진 얼굴까지….
덜컥 겁이 났다. 루스는 이를 악물며 에리얼을 그대로 안아 올렸다.
드레스 윗단이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상황의 위급함을 알리는 표식 같았다. 평소라면 더럽고 끔찍하게 느껴졌을 타인의 피, 그리고 타인의 숨결과 체온이 끔찍하기는커녕 사라져서는 안 될 유일무이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끌어안은 손등 위로 바짝 힘줄이 돋았다. 흐느적거리는 여체를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언제고 한 번쯤 안아봤으면 싶었던 몸을 이런 식으로 안게 되다니. 그럼에도 욕정할 수가 없었다.
“하, 젠장…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루스가 저택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 * *
백작 부인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저택이 발칵 뒤집어졌다.
하녀장부터 정원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허옇게 뜬 얼굴로 소식을 날랐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속이 뒤집힌 사람은 단연 베르트발드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집무실을 뛰쳐나온 베르트발드가 바짝 굳은 턱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뒤이어 흘러나온 음성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지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뭐라고?”
기뻐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차가운 반응이 이어지자 주치의가 꿀꺽 침을 삼키며 베르트발드의 눈치를 살폈다. 주치의는 잠든 백작 부인을 흘깃 쳐다본 다음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작은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하얀 밀가루가 담긴 접시 한가운데에 녹즙을 뿌린 듯한 청록빛 액체 서너 개가 띄엄띄엄 모여 있었다.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옆으로 세운 채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주치의가 얼핏 당황스러운 표정을 떠올리더니 헛기침을 하며 접시를 다시 내려놓았다.
“피를 떨어뜨려서 붉은색이면 임신이 아니고, 연두색으로 변하면 임신입니다만… 여기 보시면 미약하게 색이 변한 게 보이실 겁니다.”
“…그게, 그럼 방금 그 말이.”
“예.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축하한다는 말에도 베르트발드는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임신이라니.
에리얼이 임신? 에리얼이 왜… 어떻게?
임신?
아기 생기면 안 된다고 하도 호들갑을 떨길래 에리얼을 안을 때에는 꼭 약을 먼저 삼키고 관계를 가졌었다. 딱 한 번을 제외하면 늘 약을 챙겼는데….
…설마.
베르트발드의 머릿속에 정경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글라디올러스 그림자가 넘실거리던 바람의 절벽, 커다란 가시나무 그늘 아래.
피크닉 매트를 힘껏 부여잡고 있던 작은 손과 혈홍이 피어난 목덜미. 복숭아 빛으로 물들어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앙큼한 얼굴까지.
떠올린 순간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베르트발드가 목덜미를 슥 쓸어내렸다. 풀밭에 깔려 신음하는 에리얼이 지나치게 예뻐서, 그날 유독 오랫동안 괴롭히기도 했었다.
“색이 청록색인 걸 보니 아직 초기이신 듯한데… 최근에 몸이 많이 약해졌다고 하셨지요.”
“…그렇소.”
“임신 초기에는 평소보다 훨씬 체력이 떨어지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체력 회복에 도움 되는 약을 지어놓을 테니 잊지 마시고 꼭 챙겨드리십시오.”
펼쳐놓은 도구들을 정리한 뒤, 주치의가 신중한 눈길로 에리얼을 훑었다.
핏자국이 남아 있던 얼굴은 하녀들이 닦아서 깔끔해졌지만 드레스에 묻은 얼룩들은 지워지지 않은 채로 처연한 분위기를 유발했다. 주치의는 안쓰러운 눈길로 에리얼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모두 물러간 자리에 베르트발드 혼자 남았다.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숨을 내쉰 베르트발드가 눈을 감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걸 어쩌면 좋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이, 아이라니.
괜찮은 건가. 아이가 생기는 게 좋은 일일까.
원래도 몸이 약한데 괜히 아이 때문에 몸이 더 약해지면 어쩌나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아니, 잉태하고 있는 건 그나마 괜찮았다. 낳다가 죽는 경우도 부지기수라던데. 아이를 가졌으면 싶긴 했지만 정말 임신 사실을 들으니 혹여 잘못되지 않을까 온갖 상념이 몰려들었다.
긍정적인 사고는 기분 전환에 그만이지만 앞날을 설계할 때에는 아무 짝에 쓸모없다. 안 좋은 상황을 가정하고 미리 대비해야 최소한의 리스크로 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
늘 그런 습관으로 일을 처리해온 베르트발드로서 지금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온통 우울한 가정들 뿐이었다. 에리얼의 건강, 태어날 아이의 미래.
아이도 엄마처럼 눈이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엄마.
방금 내가 엄마라고 했나?
그럼 나는?
내가 아빠… 아빠가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