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에리얼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졌다.
속도 모르고 주절주절거리는 모습에 울분이 치솟아 올랐다. 흑발이니 잿빛 눈동자니 다 어쩌라는 건지. 에리얼은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리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백작님. 계속 그런 말 하실 거면 저 그냥 돌아갈래요.”
“왜 화냅니까. 화낼 이유도 없는데.”
“왜 그렇게 사람 약 올리세요…! 백작님, 나빠요!”
발칵 화를 내자 베르트발드가 진정하라며 에리얼을 다독였다. 그렇게 이어진 말 속에는 좀 전보다 웃음기가 더욱 강하게 서려 있었다.
“화낼 이유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림에 그려진 사람이 본인인데 왜 본인 보고 화를 냅니까.”
“네?”
“그 그림, 부인의 초상화입니다.”
“…네?”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자 베르트발드가 조금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거리며 한참 동안 웃던 베르트발드가 입가를 가려 웃음소리를 낮췄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맥락을 짚을 수가 없어 에리얼은 바보같이 멍하니 네? 네? 하고 되물을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베르트발드가 뭔가 대답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차마 대답을 이어가질 못하고 흐느끼듯 웃음을 이어갔다.
“뭐라고요?”
“초상화라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그게.”
“부인의 초상화라니까요.”
바보 같은 질답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린 에리얼이 멱살을 붙잡고 나서야 베르트발드가 웃음을 멈추고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이런. 설마 이런 일로 컬렉션 룸을 들킬 줄이야. 살다가 이런 창피를 다 당하네요.”
“아니 대체… 무슨. 무슨 소리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게 저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림의 주인은 부인이십니다. 초상화 전문가를 불러서 직접 감수해 그리도록 한 그림입니다.”
“어떻게, 그… 아니. 왜 초상화를. 아니, 그보다. 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말이 제대로 튀어나오질 않았다. 복잡한 에리얼의 심상과 별개로 베르트발드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 얼굴은 알지만 본인의 외양은 잘 모르셨나 봅니다. 하긴, 꿈에서는 관조자처럼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셨으니 본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던 베르트발드가 검지를 들어 에리얼의 뺨을 쿡 찔렀다.
“여기… 피부가 이렇게 하얗고 예쁜데. 깨물면 금세 자국이 남는 게 어지간히 피부가 약한가 보죠.”
말랑말랑한 볼을 천천히 덧그리다가 얼굴 이곳저곳으로 손가락을 옮겨갔다.
“코도 귀엽고 머리카락은… 빛에 따라서 광택이 변하는 게 고급 비단 같지요. 눈이야 뭐, 아까도 설명했듯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빨려들 것 같고. 음. 그렇게 인상 써도 예쁜 건 예쁜 겁니다. 이렇게 예쁘게 생긴 걸 여태 모르셨다니 부인께서는 인생의 반절 이상을 손해 보며 살고 계셨군요.”
팔불출 같은 소리를 길게 읊어가며 베르트발드가 슬쩍 입매를 끌어당겼다.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짓궂은 빛이 머물렀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초상화 앞에서 제가 한 짓은 못 보셨다는 말씀이군요.”
“뭘… 하셨는데요?”
“궁금하십니까?”
가늘게 뜬 눈매 속에 야릇한 파랑이 넘실거렸다. 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던 듯 베르트발드는 묵묵히 에리얼의 손을 붙잡아 올려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부드럽게 손바닥을 배회하던 입술 사이로 습한 숨결이 새어 나와 피부를 간질였다. 손금을 따라 움직이던 입술이 손가락 끝으로 올라오더니 스르르 벌어졌다. 베르트발드는 이를 세워 구부러진 검지 끝을 살짝 깨물었다.
흠칫하며 에리얼이 손바닥을 빼내려던 순간,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손님 때문이었을까요. 일하다가 갑자기 부인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베르트발드가 붙잡은 양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당겨 에리얼을 허벅지 위에 올려 앉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에리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얇은 쉬폰 드레스 너머로 탄탄한 하체가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숙여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꼼지락거리는 에리얼의 손을 억지로 잡아 끌어 맞닿은 아랫배 쪽에 올려두었다. 그대로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작은 속삭임을 흘려넣었다.
“그렇게… 부인의 얼굴을 떠올렸더니 흥분이 가시지가 않더군요. 그렇다고 쉬고 있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쳐들어가서 침실로 가자고 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림이라도 보면서 마음을 다스릴까 했는데…”
끄는 듯한 속삭임과 함께 낯선 감각이 하체에 전달되었다.
허벅지 근처로 묵직한 부피감이 느껴졌다. 그의 흥분이 천천히 부피를 키워 에리얼의 손바닥 부근까지 솟아올랐다.
“차분해지기는커녕 더 힘들어져서. 부인의 초상을 보며 스스로를 달랬지요.”
목선을 배회하던 입술이 귓가로 올라와 발갛게 상기된 귓불을 잘근 깨물었다. 순간, 피부 속부터 찌릿한 감각이 전해져 에리얼이 저도 모르게 새된 신음을 토해냈다.
뒤로 무너지려는 에리얼을 받쳐 들고 턱과 귀에 입맞춤을 이어갔다. 귓바퀴를 입술로 머금었다가 조금 더 과감하게 귀 전체를 핥아 내렸다. 흠칫거리던 에리얼이 그만하라는 듯 배를 밀어냈지만 단단한 상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밤마다… 잠든 걸 깨워서 할까, 아니면 그냥 잠든 채로 안아버릴까 고민하다가 계속 참았습니다만. 더 이상은 못 참겠습니다.”
느슨하게 묶여 있던 흑발이 금세 흐트러져 베르트발드의 팔 부근을 간지럽혔다. 닿았다가 떨어졌다가, 사르륵거리는 촉감에 이성이 무너졌다.
베르트발드는 초조함을 숨기기 위해 들리지 않도록 깊게 숨을 내뱉었다.
재빨리 리본을 풀어 가슴 부근에 매달려 있던 보닛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목과 윗가슴을 살살 더듬다가 등 뒤로 손을 돌려 드레스를 고정하고 있던 끈과 코르셋 끈을 단숨에 풀었다.
헐거워진 드레스 윗단을 그대로 끌어 내리자 우윳빛으로 빛나는 하얀 가슴이 위태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드레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속옷을 끌어 내리던 순간 에리얼이 자연스레 허리를 들어 손길을 도왔다.
젖은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각도를 바꿔 더욱 깊이 입술을 겹칠 때마다 새카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목 안쪽으로부터 새어 나온 가느다란 비음이 베르트발드의 목 안으로 고스란히 흘러들어 갔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감각에 젖어 있던 에리얼이 뒤늦게 옷자락을 끌어 올리며 붉어진 눈매로 베르트발드를 올려다보았다.
“백작님, 저기, 여, 여기서는….”
“하지 말까요?”
“…….”
“난 지금 당장 안고 싶은데. 당신은 싫어?”
거칠게 새어 나오던 숨을 깊이 억누르며 베르트발드가 차분한 음성으로 답을 촉구했다.
에리얼은 어찌할 바를 몰라 상체를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남편이 요구하면 언제 어느 때든 받아들이는 게 부인의 도리겠지만 정숙한 여자로서 이런 짓은 침대 위에서만 해야 하는 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수음을 했다는 남편에게 상식이라는 변명이 통할지 의문이었다.
“여긴, 그… 약도 없어요. 아기 생기면 안 되잖아요.”
“생기면 어떻습니까. 책임지면 그만인 것을.”
“배, 배, 백작님!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실 수가…!”
“책임진다는 게 무책임한 말이었습니까. 책임의 정의를 다시 배우시는 게 좋겠습니다.”
쏘아붙이듯 내뱉고서 베르트발드가 하체를 들어 에리얼을 뒤로 눕혔다. 바둥거리며 다시 일어서려던 에리얼이 가슴을 깨무는 입술에 힘을 잃고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쾌감 너머로 그의 체취가 진하게 밀려들었다. 뇌리에 단단하게 뭉쳐 있던 상식과 이성이 성기게 흐트러졌다. 가슴과 배꼽, 그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 입술이 닿지 말아야 할 곳을 부드럽게 짓눌렀다.
“흑…!”
허공에 뜬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단정하게 몸을 감싸고 있던 아이보리 색의 드레스 자락이 허벅지가 흠칫거릴 때마다 위로 말려 올라갔다.
에리얼은 한껏 고개를 쳐든 채 쾌감에 쓸려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들었다.
꽉 쥔 주먹을 펴 더듬더듬 옷자락을 짚었다. 흐트러진 코르셋 안쪽으로 보들보들한 천조각이 손에 잡혔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이리저리 흔들리던 에리얼이 그대로 몸을 굳힌 채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 신발이. 보고 있어요. 안 돼요!”
“갑자기, 하아, 무슨 신발.”
“아기 신발이…!”
상체를 들어 올린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이 조물거리던 아기 신발 주머니를 휙 뺏어들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더니 아기 물건이 있는 곳에서 관계를 가지면 부정 탄다느니 한다는 소리를 내뱉으려는 것 같았다.
베르트발드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옷가지들을 전부 벗겨냈다. 그대로 드레스 안쪽에 신발 주머니를 넣고 돌돌 만 다음 성의 없이 휙 옷가지더미를 나무둥치로 던져버렸다.
“이러면 안 보이죠.”
“감싸봤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부정 탄다니까요…!”
“부정 탈 거 걱정하지 말고 부인 걱정이나 해요. 힘 빼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잠깐, 잠….”
서늘한 속삭임과 함께 긴 그림자가 에리얼 위로 드리워졌다. 입술을 달싹인 찰나, 짓이기듯이 그가 밀려 들어왔다.
버거운 부피감에 에리얼의 얼굴이 하얗게 떴다. 벙긋거리는 입술 사이로 한숨처럼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끙끙거리며 도리질 치자 베르트발드가 부드러운 손길로 옆구리와 허벅지를 연신 쓸어내렸다.
가쁘게 숨을 내뱉으며 씨근거리던 에리얼이 움직임이 계속되자 조금씩 앓는 소리를 내며 베르트발드에게 매달렸다. 얄따란 허리를 들어 올려 잘게 치대자 에리얼이 발갛게 달뜬 얼굴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백작님, 싫어요. 이거 싫어요….”
“내가 이럴 때 뭐라고 부르라고 했습니까.”
양 손가락을 옭아맨 채 베르트발드가 깊숙이 고개를 낮춰 속삭임을 흘려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