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127화 (127/145)

127화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에리얼이 고개를 기울인 채 조심스레 단어를 골랐다.

“네. 예지몽이요. 요즘은 예전보다 꿈꾸는 빈도가 훨씬 잦아지고 엄청 선명하게 보여요. 예전에는… 다른 사람의 꿈을 멀리서 엿보는 느낌이었다면 요즘은… 뭐라고 해야 할까. 제가 직접 체험하는? 뭐 그런 느낌으로. 굉장히 생생하게 느껴져요.”

이전에 꾸던 꿈들이 건물 밖에서 창문으로 찔끔찔끔 엿보는 느낌이었다면, 요즘 꾸는 꿈들은 건물 자체가 투명해져서 고스란히 안을 엿볼 수 있는 느낌이었다.

작게는 날씨부터 크게는 사건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이 꿈을 통해 흘러들어 왔다. 시야 또한 넓어져서 이전에는 저택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보였다면 요즘은 저 바다 멀리 먼 대륙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일들까지 알 수 있었다. 선명하고 넓은 시야로 미래를 엿보는 감각은 무척 짜릿하면서도 중독적이었다.

“백작님. 내일 청사로 출근하실 거죠?”

“예.”

“맞춰볼까요. 내일 오후에 백작님이 만나는 사람! 회색 제복… 모자를 쓰고 배지가 잔뜩 달려 있었으니까 아마 군복이겠죠? 엄청 짧은 머리에 왼쪽 귀 끝에 잘린 듯한 상처가 있고… 이렇게 눈썹이 굵은 남자분. 내일 만나시는 분 맞죠?”

신나서 재잘대는 에리얼과 달리 베르트발드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부릅뜬 눈으로 에리얼을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귀의 상처… 맞습니다. 해군 장교인 게니드 중장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와! 맞혔다!”

에리얼이 짝짝짝 물개 박수를 치며 뻐기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뒤늦게서야 ‘대단하군요.’ 하고 칭찬을 건넸다.

“매번 느끼지만 참… 신기한 꿈이군요. 그런 것까지 꿈에 보입니까?”

“놀랍게도 그것뿐만이 아니랍니다. 그분과 만나는 이유, 서대륙으로 이송하는 무기 때문인 거죠?”

베르트발드가 날카롭게 벼려진 눈으로 에리얼을 응시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에리얼은 미간을 좁힌 채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거 좀 위험해요. 중장님이 타고 가는 배, 서대륙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중간에 해적을 만나거든요.”

“해적?”

“호위선까지 포함해서 다섯 대. 맞나요? 그런데 해적들 배가 훨씬 빨라서… 중장님은 살아남지만 무기를 싣고 있는 배는 해적들한테 전부 뺏기거든요. 그래서 중장님이 수도로 가려고 뱃머리를 돌리는데….”

“자, 잠깐. 잠깐만.”

반사적으로 에리얼의 입을 막아 재잘거림을 멈췄다. 베르트발드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황당하다는 눈빛을 에리얼에게 쏟아냈다.

공교롭게도 현재 베르트발드는 정책 자문위원회의 군사 부문 수석 위원이었다. 자유항의 주인이자 군사위원으로서 베르트발드는 군수물자를 운용하는 데에 가장 효율적인 인재였다.

그러나 대륙의 평화를 수호하는 제국의 입장상, 제국 수뇌부가 서대륙에 무기 밀매를 알선한다는 사실은 극비 중에 극비였다.

…그런데 설마 에리얼의 입에서 무기 운운하는 말이 나올 줄이야.

무기 이야기가 나온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거기에 더해 해적에게 밀매선을 빼앗기다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하지만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에리얼은 이미 그를 구하고, 또 라흐주의 태풍을 예지한 사람이었다. 지금 하는 말도 장난일 리가 없었다. 애초에, 장난이라기에는 내용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베르트발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평온한 어조로 에리얼을 떠보았다.

“해적… 그렇습니까. 서해 근방에 해적이 자주 출몰한다는 말은 누차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함을 건드릴 만한 간 큰 해적들은 없지 않을까요.”

“어머. 그 배는 군함이 아니지 않나요? 라흐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평범한 카락선이었는데요.”

에리얼의 말대로였다. 밀매선은 늘 평범한 상단으로 위장해 출항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무기 밀매선을 군함으로 보내면 밀매는커녕 대놓고 건네준다고 홍보하는 꼴일 것이다.

떠보는 것도 실패했다. 베르트발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출항 날짜와 루트를 다시 조정해야겠군요. 참… 몇 번이나 부인께 도움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뭘요. 도움이 됐다면 저야 기쁘죠.”

“이런 도움은 무척 반갑지만… 혹시. 그 밖에 다른 것도 꿈으로 나옵니까? 꿈으로 저를 사찰하고 계신 거 아닐까 걱정됩니다만.”

“그…! 그럴 리가요!”

에리얼이 과장스럽게 목청을 키우며 ‘설마요!’ 하고 말을 이었다.

“안 그래요! 저 막, 막 꿈으로 다 볼 정도로 대단한 능력자도 아니고요.”

“…정말입니까?”

“진짜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 사생활인데 어떻게 막….”

에리얼이 양손과 함께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는 꼴이 영 미덥지가 않았다. 베르트발드는 두 손을 낚아채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삐딱하게 고개를 세웠다.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부인께서 영문모를 소리를 하시길래 뭔가 했는데. 집무실에 혹시 여자 손님 오지 않느냐 물어보셨던 적 있었잖습니까.”

사흘 전이었나.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에리얼이 시무룩한 얼굴로 ‘오늘 혹시 집무실에 여자 손님 오시지 않나요?’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날 방문하기로 약속한 사람은 집정관인 포엔 후작의 비서였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누가 알려줬나 보다 하고 넘겼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후작의 비서가 여자라는 사실은 베르트발드와 바이온 외에는 달리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것도 꿈으로 엿본 거였을까. 의심 어린 눈초리로 에리얼을 쏘아보자 에리얼이 입을 우물거리다가 변명하듯 대답을 토해냈다.

“아니… 그건. 그게. 그건 어쩌다 보니 그냥 보여서.”

“이런. 정말로 저를 사찰하고 계셨습니까? 세상에,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그날만 어쩌다 보니 꿈에서 보여서…!”

“혹시.”

베르트발드가 붙잡은 손에 세게 악력을 가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날… 손님이 돌아간 다음. 집무실에서 제가 했던 짓은 보지 못하셨습니까.”

잡힌 손바닥을 파닥거리던 에리얼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뭔가… 그냥. 편지 같은 걸 쓰시는 것 같았는데.”

“그리고?”

“집무실 안쪽에… 책장 뒤에.”

책장이라는 단어에 베르트발드의 턱이 단단히 굳었다. 에리얼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눈치를 살피듯 힐끗 눈동자를 굴렸다.

“그… 무슨, 문 같은 게 나타나서 거기 들어가셔서.”

“그리고?”

“바, 방에… 책상 위에. 무슨, 장신구랑 여자 옷이랑 있고… 벽에….”

“벽에 뭐가 있었습니까.”

우물쭈물대던 에리얼이 눈매를 잔뜩 찡그린 채 화난 듯, 난처한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벽에… 어떤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고… 백작님이 의자에 앉아 그 그림을 바라보시더라고요…?”

“…그랬습니까.”

“그것까지밖에 안 봤어요. 진짜예요. 거기서 꿈이 끊겼으니까요.”

떨리는 어조로 말을 끝마치고서 에리얼이 서러운 심정을 숨기지 않고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꿈을 꾼 지는 꽤 됐지만 설마 싶어 내내 숨기고 있었다. 워낙 언짢은 꿈이라 베르트발드에게 확인받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라면 아무 관심 없다는 사람이. 그렇게 절절하게 자기를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이.

…그런 비밀 방 안에 누군가의 흔적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을 줄이야.

“백작님께 꽤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 봐요…?”

묻고 싶지 않았는데 저절로 물음이 튀어나왔다. 거기에 더해 비아냥거리는 어조까지. 스스로 내뱉은 말에 놀란 에리얼이 뒤늦게 입술을 깨물었다.

톡, 톡, 찻잔을 두드리는 소리가 침묵 사이로 옅게 스며들었다. 가만히 에리얼을 지켜보고 있던 베르트발드가 게슴츠레 뜬 눈가를 살포시 접으며 물었다.

“의미라니. 그 그림의 주인 말입니까?”

“네, 그, 뭐.”

“그 그림 속에 그려진 사람. 혹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십니까.”

건조한 음성에 에리얼이 고개를 들어 베르트발드를 응시했다. 붉은 인영은 아무런 동요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무슨 의도로 이런 걸 묻는 거지. 저절로 미간이 좁혀드는 것을 느끼며 에리얼이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그냥… 평범한.”

“평범?”

“스쳐가듯 봐서 잘은 못봤지만… 그냥, 그냥. 별로 예쁘지도 않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랬습니까? 좀 예쁘거나 아름답거나 그런 느낌도 없이?”

“…….”

“이상하군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림 속에 그려진 여자, 엄청 미인 아닙니까?”

“…제가 지금 칭찬했어야 하는 건가요?”

결국 참다 못한 에리얼이 사납게 눈을 치켜뜬 채 베르트발드를 노려보았다.

“백작님. 정말 너무하세요. 제가 몰래 엿본 건 잘못했지만 꿈이 멋대로 보여주는 걸 제 잘못이라고만 타박하시면… 게다가 생면부지의 여자를, 그것도 백작님이 은밀히 흠모하는 여자를 제가 예쁘다고 칭찬해야 하는 건가요?”

“이런. 화나셨습니까.”

“당연히 화나죠! 백작님,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입술을 실룩거리던 에리얼이 서러움에 못 이겨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고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손톱을 뜯고 싶어 손을 홱 밀쳐냈다. 그러나 붙잡힌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끙끙거리며 손목에 힘을 주던 찰나 머리 위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그 그림, 자세히 봤다면 좋았을 텐데. 길게 흘러내린 흑발이 무척 아름답지 않았습니까. 얼굴도 소담하니 예쁘고… 눈도. 살짝 웃고 있는 눈매 속에 무척 몽환적인 빛깔의 잿빛 눈동자가 담겨 있지요. 눈이 보이게 되면 잿빛 눈동자가 어떤 색으로 보일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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